45화
수현과 해강의 미묘한 냉전 상태를 깬 것은 해강의 한 제안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해강은 양치를 하고 교실로 돌아가려는 영서를 붙잡고 불쑥 말했다.
“영서야, 방학 때 뭐해?”
또 이 질문이냐. 왜 다들 내 방학 계획에 대해 궁금해하고 난리인지. 영서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학원에서 이번 여름 방학 때 입시 대비반 하잖아. 그거 하겠지. 너는 안 해?”
“그래? 아직 신청 안 했는데. 해야겠네.”
“마음대로 해.”
“그러면 학원 외에는 별다른 일정 없는 거지, 아직은?”
“그런데 왜?”
“그럼 나랑 놀러 가자.”
엥?
영서는 사물함에 양치 도구를 넣다 말고 맥이 풀린 얼굴로 해강을 돌아보았다. 이거 왠지 데자뷔 같은데. 영서는 머리를 굴리며 대답을 골랐다.
“어디?”
“어쩌다 보니 놀이동산 표가 공짜로 생겨서. 같이 안 갈래?”
“너 친구 많잖아. 걔네랑 가.”
“걔네랑 영서 너랑 똑같아?”
“뭐가 다른데.”
“아~~~~~가자, 응? 가자아~ 가자 가자 가자!!! 영서야! 가자! 어~~~?”
또 시작이네. 영서는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할 말이 없으면 괜히 억지 부리는 게 무슨 초딩도 아니고. 이렇게 유치하고 막무가내인 걸 얘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여자애들한테 다 소문 내든가 해야 하는데. 영서는 해강을 무시하고 교과서를 꺼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해강은 개의치 않고 영서의 자리까지 따라와 앉았다.
“거기 내 짝 자리거든?! 니네 반으로 가. 종 쳤잖아.”
“가자아아아아아~~~!!! 간다고 할 때까지 안 갈 거임! 영서야 가자아아아~~~!! 응? 응?!”
“아, 주해강 시끄러워!”
“야 쌤 온다! 주해강 빨리 가!”
이놈 목청은 또 왜 이리 큰지. 와글와글하던 교실도 뚫고 나갈 만큼 대놓고 억지를 부리는 해강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구르며 징징거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복도 창문으로 얼핏 화학 담당의 교사가 앞문으로 향하는 걸 본 영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 자식이 진짜 사람 황당하게 하는 데에 뭐 있다니까…!
“조용, 조용! 종 친지가 언제인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엉? 해강이 너, 이 반 아니지 않냐? 왜 여기 있어?”
“야, 빨리 가! 선생님 오셨잖아!”
영서는 급한 마음에 제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해강에게 작게 속삭였지만, 해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선생님! 영서가 제 부탁을 안 들어줍니다!”
“뭐 임마?”
“야, 주해강 너…!”
“권영서가 부탁 들어준다고 하면 갈게요!”
영서는 어이가 나가다 못해 영혼까지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남들 눈에 띄기 싫어하고, 게다가 소란 피우는 것까지 싫어하는 영서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전학 이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반 학생들은 흥미롭다는 표정 반, 어이없다는 표정 반으로 그들을 지켜보았고, 성미가 급한 화학 교사는 금방이라도 호통을 칠 것처럼 인상이 사나워지고 있었다. 급기야 궁지에 몰린 기분에 눌려버린 영서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아, 알았어!!! 가주면 되잖아 가 주면!!!”
“진짜지! 그럼 이따 수업 끝나고 학원 가면서 시간이랑 정하자, 알겠지?! 나 갈게!”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이 쏜살같이 뒷문으로 빠져나갈 동안, 영서는 방금 자신이 참다못해 큰 소리를 낸 것도, 교사와 학급 친구들 앞에서 이런 못 볼 꼴을 보였다는 것도 전부 믿을 수가 없었다. 아… 내 팔자는 정말…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키득거리며 영서를 훔쳐보는 학생들은 대놓고 웃지는 못했으나 저마다 영서와 해강에 대해 얘기하며 속살거리고 있었다. 교사는 방금 전의 어이없는 사단에 대해 뭐라 할 말도 찾지 못한 채, 그저 해강이 나가고 사태는 조용해졌으니 긴 한숨을 내쉬고는 그저 책 펴라, 라고만 할 뿐이었다. 빨개진 얼굴로 교과서를 편 영서는, 더욱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며 방과 후 해강을 어떻게 족칠지 수업 내내 생각하느라, 이날 화학 수업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
대충 그렇게 억지와 반 협박으로 영서와의 데이트ㅡ저 혼자 신나서 하는 말이었지만 영서는 구태여 정정할 기력도 없었다ㅡ를 따낸 해강은 마침내 당일이 되자 매우 신난 얼굴이었다. 그날 안 그래도 껄끄러운 시선들을 견뎌내며 수업을 마치고 어떻게 학원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학원에서 마주친 해강을 보자마자 멱살을 잡느라 옆에 지나가던 민석과 다른 학원생들이 말려줬다는 것뿐. 멱살이 잡히면서도 해강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영서는 침은 물론 저 얄미운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차마 얼굴은 때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정강이를 한 대 세게 차 줬을 뿐이다. 금방 다시 바보같이 웃는 얼굴이 되어 짜증 났지만 말이다.
“그래서, 놀이동산 와 줬으니까 됐지? 소원 풀었지? 난 간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아, 또 옷 잡지 말라고!! 늘어나!!!”
애초에 같이 ‘가 달라’고만했지, 여기서 뭔가 하자고 정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여름 방학이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맞는 주말. 즉, 평일마다 나가야 하는 빡빡하기 그지없는 학원 종일반에 나가지 않고 맘껏 쉬는 날이다 이거야. 영서는 이 날씨도 좋은 황금 같은 휴일에, 왜 자신이, 그것도 주해강 이 자식과 둘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롯x월드까지 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권영서는 집돌이였다.
집 밖으로 지하철 세 정거장 이상은 외국으로 취급하는 성격의 영서였기에, 지하철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롯x월드는 어릴 때 가족끼리 나들이나 아니면 학교에서 단체로 가야 하는 소풍이 아닌 이상 제 의사로 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귀엽지도 않은 동물 캐릭터들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화장하고 춤추는 것도 징그럽다고. 영서는 퉁퉁거리는 얼굴로 놀이동산 입구에 서서 괜히 어깃장만 놓고 싶었다.
칙칙한 영서의 표정과는 다르게 해강은 그 어떤 날보다도 밝고 환한 얼굴이었다. 날씨까지 좋아서인지 여름의 화창하고도 쨍한 햇살은 해강의 밝은 머리 색을 더 밝아 보이게 했고, 부드럽게 웃는 눈과 코, 뺨에 내려앉은 햇빛은 투명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저 가벼운 반팔 티와 반바지에 흰색 야구 모자를 썼을 뿐인데, 마치 마네킹에 누군가 코디해놓은 옷이라도 되는 듯 해강의 몸에 딱 맞아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대충 입어도 태가 난다 이건가. 재수 없는 자식. 영서는 더욱 툴툴거리며 괜히 벤치에 앉아 느릿느릿 손장난을 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응? 이왕 온 거 재미있게 놀면 되지. 우리 매일 학원만 가느라 몸도 찌뿌둥하지 않아?”
“그건 맨날 쏘다니는 너야 그렇겠지. 난 이런 곳보다 집에서 조용히 쉬는 게 더 좋아.”
“또 그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줬으면서.”
그거야 네가 그런 약속을 반 협박으로 했었으니까…! 영서는 울컥하는 기분을 간신히 누르고 대답했다.
“날도 더운데 잘도 돌아다니겠다.”
“여기 실내 놀이 기구도 많아. 더우면 내가 아이스크림도 사 줄게, 응? 아, 영서야아아~ 가자~~ 응? 응?”
계속되는 해강의 조름에,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녀석이 계속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영서는 왠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붉어져 자리에서 팍 일어서곤 해강의 팔을 잡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피했다.
“알겠으니까 조용히 해! 놀면 될 거 아냐, 놀면!”
“야호~ 영서 최고~!”
싱글벙글 웃는 해강의 얼굴이 기분 좋게 주변을 둘러보며 영서와 걸음을 맞춰 따라왔다. 기대감과 즐거움이 가득 찬 눈이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이런 데가 그렇게 좋나. 영서는 이미 놀러 온 거, 차라리 하루 정도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마음껏 놀이 기구도 타고 놀다가 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하루 정도야 멀리 외출해도 별일 없겠지, 뭐.
***
정확히 3시간 후, 영서는 탈진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회전목마 앞 벤치에 몸을 털썩 누였다. 어, 어떻게 된 체력이… 이 자식은… 대체 지치지도 않는 거냐고…
바이킹 세 번, 롤러코스터 네 번, 자이로드롭 두 번, 그리고 틈틈이 호러 하우스와 다람쥐 통, 온갖 어드벤처 기구들까지. 줄이 길어 몇 번 타지 못하고 집에 갈 것이라고 가볍게 예상했던 처음과 달리, 이상하게도 해강이 타자고 이끄는 기구는 10분도 걸리지 않고 바로바로 직원들이 탑승을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대체 이건 뭐냐고, 이 빡쎄다 못해 해병대 캠프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극기훈련은…!!!
영서는 자이로드롭을 타면서, 또는 바이킹을 타면서 내질렀던 비명을 다 합쳐도 자신이 평생 지를 비명보다도 더 많이 토해낸 것만 같았다. 목이 벌써 따갑게 아파왔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다람쥐 통에 탈 때는 거의 토할 뻔했었지, 후후후…후후…하하… 영서는 이제 완전히 K.O 상태를 자청하며 벤치에 눕듯이 기대앉았다. 그런 영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해강이 영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괜찮아? 너무 내가 타고 싶은 것만 타서 그런가? 영서 네가 이렇게 겁이 많은 줄 알았으면 회전목마 같은 것도 탈걸.”
뭐시라?
영서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이 내가… 겁이 많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을 봉인하고, 퇴마하고, 온갖 죽은 것들의 모습을 보고, 게다가 몇 번이나 죽다 살아난 내가…?!
겁이…
많다니……
“하…하하… 아냐, 완전, 괜찮아… 콜록, 콜록, 큼. 잠깐 피곤해서 그랬던 거지, 전혀 겁나지 않아. 하나도. 정말. 절대로.”
“그래? 그럼 우리 자이로드롭 한 번만 더 타자.”
싫어어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