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젠 정말 체력과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싶던 찰나, 영서의 시야에 낯익은 뒤통수가 들어왔다. 앗, 저 동그란 뒤통수는… 설마…!
“어!! 저, 저기! 저기!!”
“뭐? 왜, 왜 그래? 어디?!”
“야, 주민아! 우주민!”
살았다…!!!! 영서는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통수가 보이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래, 주민아, 네가 있으면 이 자식을 막을 수 있어!!!
“…어? 영서야! 오랜만이다, 여기서 다 만나네?”
“주민아아아아으으으아어아어엉~~~!!!”
“여, 영서야…?”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바로 고개를 돌린 그는, 역시나 다름 아닌 주민이었다. 흰 얼굴에 반가운 빛이 잠시 감도나 싶더니, 거의 울 듯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영서를 간신히 받아 안은 주민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오, 오랜만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주미으어아아으으으어어엉 나 좀 살려조으아아아아어어으으엉~~!!!”
“무슨 소린지 잘… 아하하…”
“영서야! 갑자기 뛰면 어떡해!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어? 너는?”
바로 뒤따라온 해강의 얼굴에도 일순간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주민은 자신의 목을 담뿍 감싸 안은 채 매달린 영서를 간신히 추스르고 나서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해강이도 안녕. 다들 놀러 온 거야?”
영서와 해강, 그리고 주민.
영서가 퇴원한 지 3주째 되던 주말에, 다시 만나게 되다.
그리고 멀리서, 인파 속에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
영서와 그의 친구들이 납치되기 몇 시간 전-
“…그래서 같이 놀러 오게 된 거야.”
“하하하, 그게 뭐야. 해강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막무가내인 부분이 있네.”
“하지만 영서는 그 정도로 안 하면 들어주지 않는다고.”
영서는 오랜만에 마주친 주민과 그간의 신변잡기에 대해 대략적으로 떠들며, 근처에 있던 솜사탕 가게 앞 벤치에 셋이서 나란히 앉아 다리를 쉬었다. 지친 몸을 쉬면서 주민을 붙잡고 잔뜩 하소연을 하던 영서는, 그제야 문득 생각난 듯 주민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넌 혼자 온 거야? 다른 친구나 일행은? 우리랑 이렇게 있어도 돼?”
“아, 오늘은 혼자 왔어. 사실 엄마랑 같이 오기로 미리 표까지 끊어두고 약속했던 건데…. 뭐, 알잖아. 오늘도 바쁘셔서 그냥 혼자라도 온 거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주민의 얼굴에는 익숙한 이해심과 약간의 쓸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영서는 굳이 주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대강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주희의 장례를 치른 후, 영서와 주민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희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잊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직까지 그 화제를 자유롭게 얘기하기에는, 주민이나 영서나 그다지 담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두 소년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 자주 연락했으나, 사는 동네가 다른 데다 학교도 달라 시간을 내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영서가 퇴원하고 나서는 처음 본 것이었기에, 영서는 왠지 병원이나 장례식장 같은 곳이 아닌 이런 밝고 시끌시끌한 곳에서 주민을 만나다니, 왠지 약간 기분이 들뜨는 것만 같았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주민이 습관적으로 표를 두 장씩 구매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뒤라 아직 씁쓸한 맛이 감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영서는 잠시, 그 남아버린 한 장의 표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주민의 집에, 이제는 비어버린 하나의 방에 대해서도.
“나도 어렸을 때나 왔었지, 크고 나서는 거의 와 본 적이 없어서 그냥 둘러보면서 산책만 했어. 그래도 이런 데서 너희를 다 만나고, 운이 좋았네. 오길 잘 했다.”
“그래? 그럼 우리랑 같이 다닐래? 우리랑 같이 기구도 타고 하면 되지. 그치, 주해강?”
“응? 그래도 돼?”
주민의 순한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해강과 영서를 번갈아 보았다. 정확히는 해강을 먼저 올려다보았지만. 영서는 아까부터 별다른 말이 없는 해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괜찮다고 해, 얼른!
“…그래, 뭐. 같이 다니면 좋지.”
“야, 왜 입이 댓발 나와 있냐? 안 집어넣어?”
“……”
해강은 누가 봐도 단단히 토라진 표정이었다.
아니 무슨 초딩도 아니고 왜 이래, 증말?!!!? 영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자식 비위 맞추러 온 것도 아니고 말야, 내가. 엉??? 갑자기 삐지긴 왜 삐져??!!
“…모처럼 영서랑 둘이서 데이트하고 있었는데…”
“어, 해강아 방금 뭐라고 했어?”
“으라아아아아아아~~~!!!! 주, 주민아 배고프지 않아? 아하하하하!!!!”
“배? 아, 아직은 괜찮은데…”
“…아무것도 아니야.”
오리처럼 입술을 주욱 내민 해강이, 허리를 숙여 무심하게 토라진 얼굴로 무릎에 팔을 괴고 툴툴거렸다. 영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주민이 고개를 내밀며 되묻자, 영서가 팔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둘 사이를 멀찍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까…깜짝이야…. 후…. 영서는 과장된 동작으로 오버하며 주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간식을 사러 가자며 벌떡 일어났다.
“여, 영서야 나 배 안 고픈데…”
“아냐!!! 고플걸??!!? 고프지??!! 저기 핫도그도 있네!! 주민아 핫도그 좋아해?? 하하하!! 내가 사줄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주해강, 같이 사러 갔다 오자!!!”
대답도 하기 전에 쏜살같이 해강의 팔을 붙들고 저 멀리 뛰어가는 영서를 보며, 주민은 의아한 얼굴로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보았다. 점심을 먹은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헉…헉…. 야, 주해강, 너 자꾸 그럴래?”
“내가 뭐.”
“그 입술 안 집어넣어? 너 주민이 앞에서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 다른 애들은 몰라도, 주민이한테는 그러는 거 나 못 참는다. 알겠어?”
어린애들이 텃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영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영서는 주민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희의 마지막을 지킨 것은 주민이나 그들의 부모도 아닌, 영서였다. 주희를 마지막으로 보내주면서 그녀가 영서에게 마지막으로 한 부탁이, 영서에게는 가슴에 아로새긴 듯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약속이 되었다. 그 탓일까. 영서는 왠지 주민을 보면 겹쳐 보이는 그 똑 닮은 얼굴이,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희를 만나고 싶어 했을 장본인인 주민이 이제는 그런 일은 전부 잊어버린 듯 맑게 웃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영서는 속절없이 마음이 쓰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친구가 되자는 것은 어떤 핑계나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주민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영서에게는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독특한 감각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서는 해강의 표정이 살며시 어두워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그의 팔을 잡아끌고는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주민이 좋아할 만한 간식이 있는지 고민할 뿐이었다.
“너도 좀 배고프지 않아? 평소에 급식도 남들 두 배는 먹는 놈이. 핫도그 먹을래?”
“…응.”
“보자, 음… 나는… 그냥 아이스크림 먹어야지. 여기 주문이요~”
놀이동산 안이라면 어디든 놓여있는 가판대일진대, 이상하게 판매대를 지키고 있는 직원은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영서는 솜사탕 기계와 슬러쉬 기계가 음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판매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두리번거렸다.
“저기요?”
이상하다. 아까 멀리서 봤을 때에는 보통 가판대처럼 손님도 있고, 직원도 있었는데. 영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해강도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동시에 영서를 마주 보았다.
“….”
“….”
“…역시 이상하지?”
“응.”
“하지만 별다른 이상한 기운은 없는데.”
벙찐 표정의 두 소년이 나란히 가판대 앞에 멀뚱멀뚱 서있자, 과연 누군가 급한 발걸음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선한 인상의 남직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딘가 급하게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라고 생각한 영서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문을 했다. 허둥거리는 기색이 역력하던 직원은 몇 번이나 아이고, 이런, 어쩌나, 같은 말을 연달아 하더니, 한참 기다린 후에야 간신히 주문한 음식을 내밀었다. 비록 아이스크림의 모양은 찌그러져있고, 솜사탕은 옆이 푹 꺼져 있으며, 핫도그는 소스 통이 폭발이라도 한 건지 소스가 너무 많이 발라져 있었지만. 영서는 껄끄러운 얼굴로 음식을 받아 들었다. 음…. 뭐…. 모양은 이래도 맛은 괜찮겠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직원은 아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서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애써 웃어 보인 뒤, 똑같이 표정이 썩어버린 해강의 팔을 잡아끌며 가판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