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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48화 (48/166)

48화

음…

왠지 귀가 간지러운데.

일직차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오른쪽 귀를 후비며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요즘 자주 귀가 간지럽단 말이지. 무슨 개미 새끼라도 들어간 것 마냥. 일직차사, 아니 이도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 무릎 위에 팔을 걸친 채 허리를 구부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거 참,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겁니까?

참을성 없는 목소리가 버럭 소리를 높이자, 다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서류를 넘겨보던 여자가 이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소에는 잘만 늦더니 자기가 기다리는 입장이 되니 그건 또 싫은 건가?

-이미 약속한 일몰이 되지 않았소? 참나, 오랜만에 소집해 놓고 본인이 제일 늦기 있나?

-이도, 정확히는 아직 일몰이 되지 않았어. 눈깔이 있다면 똑바로 뜨고 보도록 해.

-이런 썅…

눈 밑이 거뭇거뭇 한 이도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 푸석하고 피곤에 절어있었다. 답답한 한숨을 내쉰 채 마른 세수를 하며 의자에 푹 기대앉은 이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옆을 흘긋 보았다.

빈 의자가 하나, 여자와 이도의 의자와 삼각형을 그린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젠장, 일몰이라니. 언제나 칼 같은 시간을 고수하던 선배가 그렇게 애매한 시간대를 승낙한 것부터가 짜증 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참이나 앉아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ㅡ정확히는 이도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ㅡ기다리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약속했던 해는 점점 지평선 너머로 곰실곰실 몸을 숨기고 있었고, 길게 늘어진 땅거미는 더욱더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대체 ‘그분’이 말한 일몰이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자기보다도 더 예민한 시간감각을 가진 주제에 여자는 고요한 얼굴로 서류철을 빠르게 넘기며 그림처럼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요전번에 소집한 후로 시간이 꽤 흘렀지 않소? 원래 재깍재깍 시간을 지키는 게 선배 방식 아니었나?

-이번에도 다 때가 되었을 때 소집한 것뿐이야. 최근 일이 많이 바빠진 것도 있지만.

-흐응… 내가 알기론 선배 쪽 구역은 평소랑 다를 바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니면 그 바쁜 일이라는 게 도령님 쪽인가?

-말을 삼가라, 이도.

살짝 눈썹이 올라간 여자가 종잇장 너머로 이도를 흘겨보았다. 이도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의자에 껄렁하게 앉아 발 장난을 쳤다. 해의 뒷그림자는 점점 길어져, 남은 붉은 기마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어진 그림자 사이에서, 무언가 아른거린 것을 이도는 물론 알고 있었다.

-…이제야 행차하시는구만.

-도령님.

테이블 위에 보던 서류철을 내려놓은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어슴푸레하게 깔리는 저녁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인영은, 타박타박 걸어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둘 다.”

선배의 눈짓에 이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두 명의 정장 차림의 저승차사, 자신의 직속 부하들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강림 도령이었다.

“그간 평안들 하셨는가?”

앳된 얼굴이 허허실실 웃음을 띤 채 손짓으로 두 사람의 예를 물렸다. 언제 봐도 껄끄럽단 말이지. 이도는 눈썹을 한 번 찡긋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도의 키보다 머리통 두 개는 작아 보이는 얼굴이 살갑게 웃으며 빈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이 남자가, 아니, 남자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 보이는 이 소년이 바로, 저승차사들의 우두머리이자 일직과 월직의 직속 상사인 강림 도령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그럼 이번에 전달할 얘기는…”

***

“…우, 우윽…”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주민이, 뻑뻑한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또 어디지? 분명 마지막으로… 영서와 해강이랑 간식을 먹고… 그다음에… 주민은 번뜩 생각난 마지막 기억에 몸을 크게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영서는? 여기는 어디야?

“오, 일어났나 봐.”

“다른 놈들은 이미 일어난 것 같던데, 이 녀석은 깨는 게 늦네. 용량 조절을 잘못한 거 아닐까요?”

“석규가 그런 걸 틀릴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몸이 좀 약해 보이더라니. 귀신 본다는 놈들은 다 그렇다니까. 건강한 놈들을 본 적이 없어요~”

주민은 뜻밖의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선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은 이미 꽁꽁 묶여있었고, 손발은 오랫동안 눌려 있어서인지 쥐가 나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심지어 목까지 갈갈하고 눈도 뻐근한 것이, 머리통 전체가 윙윙 울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쓰러질 때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 듯싶었다. 주민의 앞에 선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여자와 남자였는데,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어른으로 이런 사람들과는 엮일 일이 없다는 것을 주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누구지? 영서랑 해강이는 어디 있어?

게다가 귀신을 본다니, 무슨…?

“저, 저기… 콜록 콜록…”

“다행히 말은 할 수 있네. 이 봐, 아가야, 몸은 좀 어떠니?”

“누…누구세요? 왜 이렇게…읍, 콜록… 제 친구들은…”

“깨어나는 거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임마. 야, 네 친구들은 알 거 없고, 네가 권영서 맞지? 우릴 좀 도와줘야겠다.”

영서라니? 내가? 주민은 당황한 눈을 깜빡거리며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남자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큰 거구의 사내였다. 작업복같이 생긴 옷을 빠짐없이 입고 있지만, 분명 살보다 근육이 더 많이 자리 잡은 근육질의 체형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인상까지 도저히 선해 보인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 턱에 난 큰 흉터 하며, 빡빡 깎은 머리와 큰 광대뼈가 더욱 남자의 얼굴을 험상궂어 보이게 했다.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선 여자는 흰 셔츠에 정장 같은 슬랙스 차림으로 남자에 비해 꽤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오히려 여자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아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보면 남자보다도 여자 쪽이 더 기억에 강하게 박힐만한 타입이었다. 긴 생머리를 비녀로 틀어 올린 여자는 희끄무레한 얼굴에 선하고 유순한 얼굴이었으나, 이상하게 어딘가 싸늘한 느낌을 주는 미녀였다. 남자는 주먹 근육을 뚜둑거리며 물었다.

“누님, 이놈이 권영서 맞죠? 같이 잡아온 나머지 놈들은 어떻게 할깝쇼?”

“일단은 그대로 묶어 둬. 사장님의 직접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살려둬야지.”

살려둬? 묶어 뒀다고? 주민은 급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그… 저, 저는… 왜 납치하신 거죠?”

납치범에게 자신을 납치한 이유를 물어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나 싶었으나, 주민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란다. 우리도 사장님의 지시대로 따르는 거라, 정확히는 모르거든. 그래도 네 목숨이 위험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음, 그렇지. 그러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정말로 귀신을 보니?”

“거 참, 누님, 사장님이 뭣하러 이런 애새끼들을 잡아오라고 한 거겠어요? 당연히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라고 시킨 거겠죠.”

“너는 그냥 조용히 있어. 이번 건은 평소 같은 그런 게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네가 책임질래?”

“…제, 제가 뭘… 하면 돼요?”

주민은 용기를 내 여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웃음기 없는 여자의 건조한 얼굴인데도, 미묘하게 웃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상황이, 재미있는 걸까? 주민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제가… 권영서, 맞아요.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해 드릴 테니까… 친구들은 그냥 풀어주세요.”

별안간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분명 웃는 모습인데도, 여자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주민은 은연중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뭐지? 그리고 저 남자도? 그 사장이라는 사람은, 우리를 왜 데려오라고 한 거지?

“어머나, 눈물 나는 우정이네. 그럼 네가 우리에게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하면, 네 친구들은 지금 당장 풀어줄게. 어때?”

“좋아요. 협력할게요.”

“…한 가지 약속할까?”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주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은 이 남자 쪽은 가망이 전혀 없고, 여자 쪽은 자신이 몸싸움으로 빠져나갈 정도는 되어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자가 사실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지 않은 이상 말이다. 먼저 이들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잘 구슬려서 애들을 내보내고 나도 상황을 봐서 도망치는 거야. 그리고 나가면 당장 경찰에 신고를…

“첫 번째, 절대 거짓말은 하지 말기.”

주민은 등골을 타고 내리는 싸늘함에 숨을 멈췄다. 내가…영서가 아닌 걸 벌써 알아 챈 건가?

“어때? 쉬운 약속이지 않니?”

“…네.”

“그래?”

여자는 눈까지 접어가며 활짝 웃어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와 주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춰 앉은 여자가 돌연 주민의 머리채를 틀어잡고는 고개를 휙 젖혔다.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자, 여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민의 눈을 똑바로 꿰뚫어보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면 못 쓰지.”

주민은 대답할 의지를 잃고 흔들리는 눈으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목에 차가운 것이 닿는 감각이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너, 권영서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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