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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49화 (49/166)

49화

이도는 방금 들은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드디어 미친 게 아닐까?

-…바, 방금 뭐라고 하신…?

“오늘부터 나도 자네들 일을 도와 잠시 이승에 머물고 영들을 보살피기로 했다~ 이 말일세!”

-그런… 아니… 잠시만요, 도령님. 상제님께서 허락은 하신 겁니까?

“그분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일인가? 뭐, 잠시 있다가 가는 건데 괜찮지?”

괜찮을 리가요….! 이도는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무례를 무릅쓰고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열서너 살쯤이나 됐을까 싶은 순한 인상의 소년이, 의자 위로 책상다리를 한 채 턱을 괴고 지긋이 웃어 보였다.

-선배, 선배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

“월직차사도 모르는 일이야. 왜냐하면 방금 오는 길에 정했거든!”

-도령님!!!

정말 넉살맞은 것도 유분수지, 소년은 이도의 다급한 부름에도 하하 웃어넘기며 손장난을 치고만 있었다.

강림도령.

월직차사와 일직차사의 직속 상사이면서, 이승의 떠도는 혼을 구제해 시왕十王들이 그들을 판결하고, 저승으로 알맞게 인도할 수 있도록 돕는, 저승차사들을 총괄해 다스리는 자.

본디 강림이라는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고, 도령이라는 직책도 도령이 가진 뜻의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본다면 적어도 ‘도령’이라는 이름에는 걸맞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진하고 앳된 얼굴을 한 소년이었기에, 이도는 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도, 아니 일직차사로서, 그리고 월직차사 또한 강림의 일이라면 입 다물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지 상명하복식의 계급장 문제여서가 아니라, 바로 강림이라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벌을 받은 것도,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도령님, 이도 말이 맞습니다. 아직 상제님은 도령님께서 무릉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원래는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시는 것도 금지된 일입니다.

“하지만 염라가 요즘 일도 많고 심심하다고 나를 부르던데? 강림 도령이 어찌 시왕들의 부탁을 거절하나?”

그놈의 영감탱이…!!

순간 일직차사와 월직차사는 동시에 이를 갈았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강림의 부하인 우리 둘이 이 짬에 이렇게 바쁘게 발로 뛰는 건데…!! 능글능글하게 웃는 그 유들유들한 상판대기를 생각하자면 월직과 일직은 자다가도 뒷목을 잡으며 깰 정도였다ㅡ물론 저승차사는 잠을 잘 수 없지만 말이다ㅡ

게다가 일이 많아서 심심하다니?? 이게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이도는 이를 뿌득 갈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찡그린 이마를 꾹꾹 눌러 편 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심심하다뇨, 요즘 저승 가는 삼도천에만 이름 없는 영혼들이 됫박으로 퍼도 모자랄 정도라고 합디다. 이름 없는 녀석들 이름 찾아주는 작업이 제일 오래 걸리고 거추장스러운 건 아시죠? 그대로 데려가면 그거 핑계로 빠꾸시키는 주제에, 염라대왕이 할 짓인지…

-이도, 말을 삼가라. 예의에 어긋나.

-참나, 저승 바닥에 있는 양반이 들으라면 들으라지, 뭘. 첫인상부터 아주 개판이었어요, 그 양반은! 아직도 도령님 일만 생각하면 그 낯짝으로 어떻게…

-이도!

주의를 주듯 월직차사가 목소리를 높이자, 도령이 손을 내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어어, 싸우지 말아들. 오랜만에 얼굴 봐놓고 또 투닥거리네 그래.”

이도는 더 이상 첨언하지 않고 잠자코 입을 닫았다. 정말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태여 말마따나 오랜만에 본 강림도령의 앞에서 과거의 기분 나쁜 일만 들추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록 그 일로 인해, 도령이 이렇게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모습까지 뺏겨가면서 머나먼 무릉의 구석에 처박혀버렸지만 말이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령은 개구지게 빙글대는 웃음을 띠며 다리를 접고 앉았다.

“그래, 그건 제쳐두고. 오늘 모이라고 한 건, 최근에 꽤 재미난 일이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도령의 눈이 순간 가늘어지더니 이도에게 날아가 꽂혔다.

“…이도, 무슨 속셈이지?”

-내가 뭘요, 또. 아주 선배부터 도령님까지 쌍으로 날 잡아먹으려 드시는구만.

역시 알고 올 줄 알았지.

이도는 태연한 척 다리를 꼬면서 속으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는 입으로 이도를 지켜보았다. 질문에 스스로 1부터 10까지 토해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하하, 역시… 이 양반 상대로는 재간도 못 부리겠다니까.

금방 들통날 것임을 알고 시작한 일이긴 했어도, 이도는 이렇게까지 빨리 덜미가 잡힐 줄은 몰랐기에 바짝바짝 타는 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자… 이제,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둘러댄다고 과연 이 양반들이 속아주기나 할는지.

-…그 애는…

이도는 영서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뚱하고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따금씩 무방비하게 웃는 얼굴은 꼭 열여덟 그 자체의 얼굴을 하는 그 녀석을. 매일같이 녀석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해 장난을 치는 것도 여러 번이었으나, 이도는 사실 그 뚱한 얼굴이, 마치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 건방진 어린놈이, 한 번이라도 제 나이 다운 얼굴을 하길 바랐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죄책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꼬맹이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도는 굳이 정의하지 않았다. 오래 정을 주어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아니까. 오래 시간을 끌수록, 계속 권영서의 인생을 마주하다 보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영서 그 애에게도 못할 짓이 될 터였다.

순간, 이도는 수척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영서의 희멀건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다른 누군가의, 메마르고 지친 얼굴이…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안다. 하지만 내가 항상 말했었지.”

상념에 녹아드는 이도의 정신을 깨운 것은 강림도령의 또렷한 음성이었다. 이도는 황망한 눈으로 도령을 쳐다보았다. 그 불안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탓이라는 것을 도령 또한 알고 있었다. 참 딱한 혼이라. 누가 누구를 살리라고 너를 이 자리까지 앉혀놨는지 모르겠구나. 도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어. 그게 우주의 법칙이고 만물의 이치야.”

이도의 눈동자에 별안간 불꽃이 들끓는 듯했다.

월직차사는 순간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도는 바로 표정을 가라앉힌 채, 도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그걸 지금 몰라서 하는 거겠소. 도령님도 참.

“하하, 그렇지?”

-언제까지나 나를 그렇게 꼬마 부스러기 취급하는 눈으로 볼 거요? 거 참, 민망할 정도네.

반쯤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다시 돌아온 이도가, 고개를 내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령 또한 다시 헤벌쭉 웃으며 제 무릎을 끌어당겨 안았다.

“이도, 나는 은령이보다 꽤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야. 이해는 안 가지만, 일단 네가 하는 것을 두고는 보겠다. 너도 뭔가 잘못될 일은 하지 않을 녀석이니까.”

은령이라고 불린 월직차사는 희미하게 볼을 붉혔다. 이미 오래전에 버린 이름이었으나, 이따금씩 그것을 꼭꼭 기억해 주는 도령의 세심함과 다정함에 매번 감복하는 그녀였다. 나한테 이름 알려줄 때는 수십 년 동안 졸라도 절대 안 알려줬으면서. 이도는 몰래 은령의 기색을 훔쳐보고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러면 도령님, 그간 어디서 머무실 계획이십니까? 지금 도령님의 상태로는 힘을 온전히 쓰시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은 그렇게 안전한 장소가 못 됩니다.

“아, 그렇지 참! 안 그래도 그것도 겸사겸사 부탁하려고 왔는데. 이도야, 너네 집에 남는 방 있지?”

-아니, 이 양반이?! 집이 왜 필요합니까, 저승차사 씩이나 돼서?!

“하지만 무릉에서 도망쳐 나오느라 거진 힘을 다 써버려서 말이다~ 하하하~ 상제가 주신 이 몸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 내 기운이 모자라면 인간처럼 배도 고프고, 중력도 느껴지고 해서 말이지? 어린애의 몸은 아주 힘들어요? 응? 지금도 봐라, 오다가 고양이가 할퀴어서 상처까지 났단 말이지~”

농담이 아니라는 듯, 도령은 손바닥을 펼쳐 둘에게 작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 말은 즉, 이승의 것들과 물리적으로 접촉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아니, 대체…! 상제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어쩐지, 그러니까 무릉 같은 산골짜기에 도령님을 가둬놨지, 하긴 이 꼴로 이승을 돌아다니면 무슨 일이야 나기는 나겠네.

혀를 찬 이도가 손을 뻗어 도령의 상처 난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작은 빛이 스며 나오는가 싶더니, 이도의 거친 손이 떨어져 나가자 작은 손에 나 있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럴 때는 정말 편리하다니까. 아무튼 이런 연유로, 이승에 너희 거처가 있으면 좀 빌려야겠다. 응?”

-도령님, 그렇다면 저희 집으로…

“그렇지, 이도 네 집으로 가면 되겠다! 이도야, 너 어디 사냐?”

-저는 이승에서 인간처럼 지내는 취미는 없어서요.

-도령님, 저희 집으로…

“뭐? 저번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건물 하나 사서 두지 않았었나?”

-도령님…

-그게 몇 십 년 전 인지나 압니까? 요즘은 십 년이 뭐야, 거 일 년마다 강산이 바뀐다구요. 당연히 다 재개발해서 갈아엎었지. 하여튼 인간들은 온전히 산이 그 자리에 있는 꼴을 못 본다니까.

-도…도령…

필사적인 은령의 목소리는 가뿐히 무시한 채, 도령은 고민이라는 듯 까슬까슬한 뒤통수를 갸웃거렸다. 낙담한 채 풀이 죽은 은령을 보며, 이도는 사서 고생도 참 여러 가지로 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거, 저는 지금 당장 거처를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선배네 집에서 머무십쇼. 선배가 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아서, 거기에서 지내시면 적어도 산 것들 손은 못 탈 테니까.

“으응~그래? 은령이네 집이 어디였지?”

-네, 도령님. 북악산 바로 밑에 지은 곳입니다.

다시금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월직차사와,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기지개를 켜는 강림도령을 번갈아 본 이도는, 대체 이 작자들과는 언제까지 얼굴을 맞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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