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영서는 고민에 빠졌다.
사방은 어두컴컴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일단 직감적으로 우리는 납치는 당했으며, 아마 놀이동산에서 누군가 우리 간식에 약을 탔을 확률이 높았다. 깨어나 보니 다행히 해강은 같은 방에 있었지만, 주민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아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리고 더욱더 영서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영서를 괴롭히던 귀신들의 귓속말과 그 모습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최근에 일직차사는 어째서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따금씩 꿈에서 그 남자를 보기는 보았으나, 역시나 단순히 그에 대해 생각을 너무 한 나머지 꿈에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꿈을 통해 영서를 보러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방학식 이후 혜리 또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분명 일직차사의 도움으로ㅡ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먼저 오고 갔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ㅡ혜리의 지박은 풀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학교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도 혜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곳이 역시 마음이 편했던 것인지, 혜리가 영서 없이 학교 외의 장소로 혼자 나가는 일은 없었다. 방학식이 가까워지면서 이런저런 일들로 정신이 없어 최근에 만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말았던 것이다. 권영서, 어쩜 이렇게 무관심하고 해이해질 수가 있는 거야. 영서는 스스로를 탓하며 후회했지만, 역시나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
영서는 일단 침착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해강아, 주변에 뭐가 보이는 게 있어?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해. 그리고 아마 주민이는 다른 곳으로 잡혀간 것 같아. 이 방 안에는 없어.”
“지금은… 주변에 별 건 안 보이지만… 그런데 여기… 방이 맞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해강의 미심쩍은 목소리와 함께 뭔가 맑은 소리를 내며 탕탕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으, 이게 뭐야. 무슨… 철로 된 통 같은데. 단단하네. 이런 통들이 일렬로 엄청 많이 서 있어. 뭐라고 적힌 거지?”
“나는 지금 팔이랑 다리가 묶여서 앉아있는 상태라 주변을 둘러볼 수가 없어. 혹시 발은 움직일 수 있어?”
“응, 잠시만… 으, 내 손도 풀리지가 않아. 무슨 이렇게 두꺼운 밧줄로 사람을 묶어놓는담.”
그 순간, 영서는 저 멀리서부터 기나긴 통로를 지나쳐오는 발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듯했다. 발소리는 규칙적으로 커졌고, 기나긴 통로는 복도가 되어, 좀 더 자세한 울림은 내며 이곳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게 맞을까?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러 오는 걸까? 아니면…
“쉿, 조용! 누가 온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부딪치느라 우당탕 소리를 내는 해강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영서는 귀를 세워 소리에 집중했다. 발소리는 구두 소리 하나, 묵직한 운동화 같은 게 바닥을 끌며 걷는 소리 하나, 그리고 휘청거리는 듯 엇박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 하나.
끼익-
철컹-
“…어머, 일어나 있었네.”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는가 싶더니, 육중한 소리를 내며 녹슨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밝은 빛이 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영서와 해강의 어두운 시야를 단숨에 밝혔다. 눈이 부셔 똑바로 보지는 못했으나, 분명 세 명의 인영을 보았다.
팟-
역광이 진 그림자 중 하나가, 벽 어딘가로 팔을 뻗어 더듬더니 어둡던 사위가 금세 환해졌다. 오랫동안 빛을 못 봐서인지 뻑뻑하고 부신 눈을 여러 번 깜빡인 영서가, 눈앞에 놓인 광경에 충격으로 입이 벌어졌다.
“…여긴…”
“소개가 늦었네. 안녕, 권영서.”
스위치를 누른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여자가, 미미한 웃음을 띤 얼굴로 영서를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덩치가 불곰만 한 어떤 험상궂은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의 손에는 창백한 얼굴의 주민이 붙들려 있었다.
“주민아!!!”
“얘 이름이 주민이야? 어쩐지, 거짓말을 너무 못하는 타입이더라고. 그래도 허탕 친 건 아니니까 됐어.”
밝아진 주변은 영서가 어둠 속에서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판이한 곳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버려진 폐공장같이 허름하고 낡은 기계들과 온갖 부품들이 이곳저곳 널려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
영서는 먼지가 굴러다니는 시멘트 바닥과 곳곳에 튀어나온 건물의 뼈대인 철 기둥 따위를 둘러보며, 대체 이렇게 넓고 인적조차 없는 장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으나, 일단 지금 그런 것에 대해 물을 상황은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곳까지, 자신들에게 약까지 먹여가며 납치해 묶어둔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였으니 말이다.
“눈알 굴리지 말고, 다 보이니까. 그래, 먼저 우리 소개부터 할까. 우리가 왜 너희를, 아니 권영서를 데려왔는지부터.”
여자가 턱짓하자 덩치 큰 남자가 주민의 등을 밀어 넘어트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영서와 똑같이 팔이 뒤로 묶인 채 바닥에 쓰러진 주민이 큰 기침을 하며 신음 소리를 흘렸다.
“주민아! 정신 차려!!! 괜찮아?!”
“아직 멀쩡하니까 걱정하지는 마. 어차피 우리가 필요한 건 영서 너였는데, 얘가 글쎄 거짓말을 하지 뭐니? 버르장머리 없이.”
“당신들… 대체 누구야? 왜 우리를…”
“…보이니?”
뭐?
영서는 귀를 의심했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낡은 의자를 하나 질질 끌어다가 영서와 쓰러진 주민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갑자기 보이냐,라고 묻다니.
대체 뭘…?
“…네?”
“보이냐고.”
여자는 한쪽 손을 들더니 검지를 뻗어 천장 부근을 가리켰다. 이미 군데군데 건물의 구조물과 깨진 유리, 철물 조각 따위가 나뒹구는 폐공장의 천장은, 구석에 낀 거미줄들과 의미 모를 새끼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대체 뭐가 보이냐는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 영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천장에 매달린 새끼줄들은 단순히 자신들을 묶고 있는 두꺼운 밧줄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단순히 어두운 조명의 문제가 아니라, 거무튀튀한 색깔과 부분씩 헤져있는 모습이 꽤나 오래되고 느슨해 보이는 끈이었다.
그리고 그 끈들에는, 길게 늘어진 끝부분에 동그란 모양을 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거기에서 목을 매달기라도 할 것처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 구조물들이었다. 영서는 자신들의 위쪽에 주렁주렁 매달린 밧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줄이요…?”
“……”
여자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미묘한 표정으로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얘가 권영서는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왜 갑자기 안 보일까? 얘, 너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지? 평소랑 달리,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지. 응?”
“……네.”
여자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서는 일단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자도, 영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해강의 당황한 얼굴과, 반쯤 짐작은 했으나 무슨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의 주민이 보였다. 영서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대체 목적이 뭡니까. 그리고 제가 귀신을 본다는 것, 아니 더한 것도 이미 알고 있으신가 본데, 질질 끌지 말고 말해주세요.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할 테니까.”
“눈치는 빨라서 다행이네. 그런데 말이지, 우리가 필요했던 건 ‘볼 수 있는 권영서’였지, 더 이상 ‘볼 수 없는 권영서’가 아니거든.”
무감각한 여자의 얼굴을 노려보며 영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짜고짜 사람을 잡아와 놓고, 그럼 이제 쓸모가 없으니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영서를 무시하고 가만히 해강 쪽을 지켜보던 여자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너, 나 알지?”
“저요?”
“그래, 잘생긴 애. 너 말이야.”
여자가 턱짓으로 해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강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영서와 눈빛을 교환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 분명 본 적이 있는데. 난 잘생긴 애들은 한 번 보면 안 까먹거든.”
“큼, 큼. 누님.”
“두식아, 너는 쟤 기억 안 나니?”
“글쎄요, 저는 잘…”
덩치 큰 남자가 주의를 주듯 헛기침 소리를 냈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뭐. 네가 걔였으면 여 사장님이 진즉에 귀띔해 주셨겠네. 내가 착각했나 봐.”
“누님, 그러면 이제 어찌할까요? 분명 사장님이 데려오라고 한 건 이놈이 맞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쓸모가 없어서야. 됐어. 처리해.”
여자가 두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더욱더 험상궂게 웃으며 영서와 해강 쪽으로 다가왔다. 주먹과 목 관절에서 뚜둑거리는 소리는 내며 다가오는 곰 같은 사내의 위압감은 말문이 막히게 할 정도로 충분했다.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면…!! 영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누, 누니이이이이임!!!”
누…누님?
주민과 해강이 뜨악한 얼굴로 일제히 영서를 돌아보았다. 물론 살기등등하게 서 있던 남자와 여자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