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어머?”
“뭐, 뭐야?”
“누님, 누님!!! 제발 살려주십쇼!!!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영서는 최대한 불쌍하고 울망울망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어이없다는 표정과 달리 여자는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그럴까? 살려줄까?”
“누님!”
“어차피 처리하기 전에 잠깐 노는 건데 뭐. 나는 이렇게 어린애들이 살려달라고 비는 게 그렇게 재미있더라. 얘, 너 이름이 뭐랬지?”
여자는 타박타박 걸어 해강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머리채를 잡아 젖혔다. 윽, 하고 짧은 신음을 내며 고개가 들린 해강이 적대적인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어린 데다가 잘생기기까지 하면 제일 좋고.”
여자가 뱀 같은 얼굴로 웃었다. 지금까지 지었던 웃음은 웃는 듯 마는 듯 하게 미묘한 얼굴들뿐이었으나, 현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덩치에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의 웃음에, 무언가 더한 위압감이라도 느낀 듯이 한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영서 또한 뭔가 수상한 기운이 기분 나쁘게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굳이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여자, 적어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만큼 끈덕지고, 음습하며 수상한 귀기가 풀풀 풍기는 사람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아마 자신의 몸에 무언가 들러붙은 것을 영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살기를 과연 느낀 것인지 해강의 표정도 미묘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영서는 필사적인 눈으로 해강을 바라보았다. 제발… 주해강….!
목숨을 걸고 아양을 피워라…!!!!!!!
뜨거운 영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해강이 슬쩍 영서 쪽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광선이라도 내뿜을 기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영서의 심오한 뜻을 눈치챈 건지 아닌지, 해강의 표정은 어느새 당황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런…”
“왜, 싫니? 그럼 어쩔 수 없고. 두식아?”
“넵!!”
여자가 손짓하자, 남자가 우렁찬 소리로 대답하며 작업복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어두침침한 조명 빛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커다랗고 새파란 식칼이었다.
“아, 아저씨 그거, 칼이에요?! 아니죠?!”
“네가 제대로 된 놈이기만 했어도 이런 시간 낭비는 안 했을 텐데. 어쩌겠니. 그래도 어린놈들이라 값은 잘 받겠다.”
“가, 값이라뇨?!”
“뭐 어차피 너희는 죽을 거니까 알려줄게. 우리는 우리 상사가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돈 장사건, 사람 장사건 말이야.”
마치 독사의 혀가 날름거리듯 여자는 웃었다. 영서는 귀를 의심했다. 사람 장사라니, 그럼… 이 사람들은 정말로…
“누님, 작업하기 전에 거래처 윤 사장님께 준비하고 오시라고 연락부터 드려야 하지 않나? 거 있잖소, 지난번에 제일 먼저 연락 주면 넉넉히 쳐주겠다고 한 인간 있잖아요.”
“그 인간은 싫은데. 너무 뒤처리가 깔끔치가 못해서 우리까지 곧 꼬리가 밟힐걸. 안 그래도 손절하려던 참이야.”
“뭐, 누가 됐든 상관없소, 나는. 맞아, 아이스박스 좀 꺼내올 테니까 잠시만 보고 계셔 주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살려주세요!!!!!”
“어우, 시끄러워. 쪼그만 게 목청도 좋네.”
“누님!!!!!!! 살려주세요오오오오옥!!!!!!!!!”
여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이판사판이었다. 여차하면 주변에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라도 제발 이 소리가 닿길 바라며, 영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음에 약한지 여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영서의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 목 따 버리기 전에 조용히 안 해, 이 새끼야?!”
“영서야!!!”
“아이고 사람 죽는다아아아아아!!!!!! 살려주세요!!!!!!!!!!!!!!!!”
놀란 해강이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지르자, 남자가 질린다는 듯 영서의 입을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턱 막아버렸다.
“…악!!”
남자가 자신의 손을 후다닥 떼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있는 힘껏 깨물어 버린 영서가 침을 퉤퉤 뱉고는 굴하지 않고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살려주세요오오오오오오!!!!!!”
“살려주세요!!!”
“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여자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영서가 찔끔 놀라 눈을 감은 순간,
“오밤중에 웬 소란이야?”
공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보람이 있었는지, 어떤 남자가 잔뜩 귀찮다는 얼굴로 나타났다.
***
영서는 미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우요?”
“그래, 여우.”
“……”
“……”
“….살려주세요!!!!!!!!! 아아아아아아아악!!!!!”
“아, 진짜래도!!! 그리고 그만 소리 질러 새끼야!”
딱-
결국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영서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남자를 흘겨보았다.
“살다 살다 별… 내 나이 600이 넘었는데 이렇게 목청 큰 놈은 또 오랜만일세. 기차 화통을 궤짝으로 삶아먹었나.”
“…그래요, 그래요, 여우 아저씨. 그렇다고 칩시다. 네? 아무튼, 아저씨가 여기 대장 맞죠?”
“그렇지?”
“……”
“…또 소리 지르면 죽여 버릴 줄 알아라.”
소리 안 질러도 살려줄 거니까. 남자는 지친다는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 소리에 영서의 귀가 반짝 뜨였다. 사, 살려준다고…?!
“…진짜죠?”
“그래.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애들이 뭔가 착각한 모양이지. 하나야, 두식아.”
“네!”
“네.”
“내가 잡아오라고 한 건 맞는데, 쓸모없다고 바로 그렇게 작업해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하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남자의 말에 하나와 두식이라고 불린 두 명은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가…확실히 여기서 제일 대장은 맞는 것 같았다. 영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마터면 이레가 깰 뻔했잖아. 간신히 재웠단 말이다.”
“…! 그런…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눈에 띄게 송구스러워진 기색을 보고 영서는 눈치를 살폈다. 이레? 사람 이름인가? 누구지? 깨우면 안 되는 사람?
“그리고 두식이는 내가 항상 말했지. 이렇게 비위생적인 곳에서 작업하면 감염 위험 때문에 오히려 상품 가치만 없어진다고. 그리고 그런 녹슨 칼로는 한 번에 잘리지도 않아서 고기 맛도 떨어져.”
고, 고고고고고고고,
고기~~~~?!!!!!!!?!!!
영서와 해강, 주민은 동시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 남자…
대체….
정체가 뭐지…?!
***
그는 보기보다는 꽤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하나와 두식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헐렁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여우라고 밝힌 건 좀…이상해 보이지만 말이다.
여 사장,이라고 불린 그는 영서와 친구들을 데리고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단순한 폐공장으로 생각했는데 문밖으로 이렇게 번듯한 구조물과 더 큰 공간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영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계속 흘깃거리며 따라갔다. 오랫동안 묶여 있어서인지 저린 팔과 손을 주무르던 해강이 앞서가는 여 사장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 영서에게 귓속말을 했다.
“있잖아, 영서야, 우리 이렇게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게다가 저 사람들에 비해서 그나마 여 사장이라는 남자가 말이 통할 것 같아.”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일단 우리를 왜 데려왔는지부터… 음… 그리고 최대한 기회를 봐서 나가야지.”
지금으로선 얌전히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영서가 작게 중얼거리자 해강 또한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아, 괜찮아?”
“…어? 응…괜찮아, 팔 부분이 조금 까지긴 했는데, 영서 너는 다친 곳 없어?”
“난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너만 다른 곳으로 잡혀가서 얼마나 놀랐는데.”
“하하, 나를 너로 착각한 것 같더라고. 거짓말로 어떻게 속여 보려다가 들통났지 뭐야.”
“…! 주민아, 팔에서 아직도 피가 나는데… 너 혹시 맞은 곳은 없어?”
“아, 괜찮…”
“거기, 뒤에 안 따라오고 뭐 하지?”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그들을 재촉했다. 주민이 혼자 잡혀있을 때 저들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뭔가 폭력적인 상황이었을 거라고 영서는 짐작했다. 반팔을 입어 드러난 주민의 맨 팔꿈치부터 손 밑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는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아파 보였다. 다리까지 저릿저릿한지 절뚝거리며 팔을 쥔 채 따라가는 주민은 간신히 신음을 참고 있는 듯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영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민의 팔을 잡고 들여다보다가, 결국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