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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52화 (52/166)

52화

“저기… 제 친구가 다쳤어요. 먼저 치료부터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짜식이, 그거 조금 긁혔다고 엄살이냐?”

“엄살이 아니라 많이 다친 거잖아요! 아직도 피가 나는데, 아저씨가 때린 건 아니죠?!”

“뭐? 내가 무슨…!”

“또 싸운다, 또. 두식이 너는 한참 어린 것들이랑 그렇게 왁왁 대면서 싸우고 싶냐? 거기 너, 주민이라고 했지. 이리 와라.”

여 사장이 피곤하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덩치 큰 남자를 진정시킨 뒤, 주민에게 손짓했다. 우물쭈물하며 영서와 그를 번갈아 보던 주민이 주춤 주춤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잠옷으로 보이는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있던 여 사장은 주민의 팔을 휙 뒤집어 보더니 혀를 찼다.

“아이고, 아예 갈았구만, 갈았어. 하나야.”

“네.”

“지금 내가 갖고 온 게 없어서 그러는데, 이레 방에 가서 좀 가져와라. 일주일 전에 하나 가루 내서 보관한 거 있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여자가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더니 어두운 복도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복도를 지나면 어딘가에 그 이레라는 사람의 방이 있는 걸까? 대체 그는 누구인지, 그리고 뭘 가져오라는 건지 영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여 사장이라는 남자가 그나마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것과, 저 뱀 같은 여자와 곰 같은 남자가 유일하게 고분고분 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현재로선 제일 다행인 점이었다. 주민의 팔도 어떻게든 해 줄 것 같고 말이다.

“이따가 하나가 돌아오면 치료해 주마. 지금은 일단 응급처치로 이거라도.”

남자는 헐렁한 잠옷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크림색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느슨한 잠옷 차림과 방금까지 자다 깬 사람의 행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꽤 고급스러운 손수건이었다. 주민이 의아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주민의 팔을 잡아 끈 여 사장이 능숙한 손길로 피가 흐르는 팔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대강 상처를 닦아낸 그는 손수건을 펼쳐 깨끗한 부분을 상처에 대고 칭칭 감았다. 매듭까지 단단히 묶어내자 상처투성이였던 팔이 그나마 봐줄 만하게 바뀌었다. 이 정도면 지혈은 되겠지. 남자는 낮게 중얼거린 후 주민의 얼굴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겁에 질렸던 얼굴이 약간 풀어지는 것을 보면서, 남자는 잠시간 주민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뭐, 대충 사과의 의미로 받아주면 좋겠군.”

주민이 머뭇거리며 자신의 팔에 감긴 손수건을 만지작거리자, 영서가 다가와 주민의 팔을 들여다보고는 안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서와 그의 친구들이 길고 긴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지하의 어떤 사무실이었다.

사실 말만 사무실이지, 내부는 불을 켜도 전등 하나가 나간 듯 어두침침했고, 낡아서 먼지가 낀 소파와 낮은 테이블, 역시나 낡은 가재도구와 캐비닛 몇 개가 굴러다닐 뿐이었다. 한 가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사장의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이었는데, 크기는 어디 대기업의 명망 있으신 분이나 쓸 법하게 검은 윤기가 도는 세련된 책상과 크고 푹신한 의자였다. 자주 그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지 책상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고, 의자는 사람의 모양대로 들어간 자국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종이 두어 장이 놓여있었으나 낙서 같아 보이는 의미 모를 문자들만 써져 있을 뿐, 중요한 내용은 없어 보였다.

“거기들 앉아. 두식이는 가서 차 같은 것 좀 내와라. 명색에 손님들이신데.”

“엑, 소, 손님이라굽쇼?!”

“탕비실 가면 석규가 사다 놓은 차 있을 거다. 보자… 너희 뭐 가리는 건 없지? 커피, 는 미성년자니까 안 되고, 그래, 보리차나 마셔라 그냥.”

혼자 중얼거린 남자는 뒷머리를 긁으며 두식에게 손짓했다. 눈에 띄게 느슨해진 남자의 태도에 조용히 눈치만 보던 영서와 해강, 주민은 남자가 시킨 대로 소파에 조르륵 열을 맞춰 앉았다. 영서는 큰 소파 쪽에 앉고 싶었으나 왠지 그쪽은 사장의 자리 같아 얌전히 긴 소파에 친구들과 낑겨 앉았다. 상석에 있는 하나 짜리 소파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남자는 검은빛의 책상으로 다가가 양반다리를 하고 올라앉았다.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괸 남자는, 가만히 영서와 친구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두식이라고 불린 곰 같은 남자는 툴툴거리며 차마 무어라 따지지도 못한 채 탕비실로 들어갔다.

"저…"

"응?"

“저는 보리차 보다 커피가 좋은데요.”

주해강 이 눈치코치도 없는 새꺄…!!!!

영서와 주민이 뜨악한 표정으로 해강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해맑은 표정의 해강이 자신이 뭔가 잘못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친구들을 마주 보았다. 남자가 인상이 험악해졌다.

“안 돼.”

“하하, 그래, 야 주해강 너는 무슨~ 하하하~ 그냥 보리차 마셔 임마~”

영서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해강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눈치를 주자, 남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애들이 커피 같은 걸 마시면 쓰나. 원래는 주스나 핫초코를 상비해 두고는 있는데, 마침 어제 이레가 다 먹어서 사 오는 걸 깜박했다. 커피는 안 돼. 보리차 마셔 보리차.”

어…어린애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영서는 왠지 씁쓸한 입맛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주민이 그나마 환하게 웃으며 붙임성 있게 말을 이었다.

“저, 사장님이라고 하셨죠? 방금 전에 팔 치료해 주신 건 감사해요. 그런데 저, 하실 말씀이란 게 뭔지… 그리고 저희보고 손님이라고 하셨는데… 처음에 저희를 데려오신 건 다른 이유 때문 아닌가요?”

조심스럽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내내 그 하나라는 여자와 두식이라는 남자에게 외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나마 상식적인 언행과 조금이나마 우호적인 태도를 가진 여 사장이라는 남자와 마주하고 있자니, 주민과 영서는 극도로 예민하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음, 그래. 그게 궁금하겠군. 얘기해 주기 전에 먼저, 아주 조금, 폭력적인 상황이 따랐던 것에 대해 사과하마. 애들이 나쁜 애들은 아니야. 내가 시킨 일이라서 그렇게 좀… 뭐라고 하냐, 음… 빡빡하게 굴었던 것뿐이지.”

그게 빡빡하게 구는 정도였냐고요….!!!!

하마터면 장기가 털릴 뻔했는데!!!

영서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채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하나는… 원래 애가 좀 그래. 좀 유별나지. 너희가 이해해라. 두식이도 애가 좀 단순하고 그런 데가 있어서 말이지. 시키는 말 그대로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몰라. 분명 나는 처음에 그냥 ‘권영서를 데려와라’라고 한 것뿐인데 말이지.”

“…저기… 사장님, 외람된 말이지만,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시는지…”

“나?”

남자의 게슴츠레하던 눈이 둥그레지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필살의 용기를 짜내어 물은 영서가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장님?”

“…그냥… 장사를 좀 하지.”

그러니까 무슨 장사요…!!!

영서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데없이 날 데려오라고 한 것도 모자라, 속셈이 일단 무엇이든지 간에 이 남자는 누가 봐도 나 위험한 일하고 있소- 하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밝은 갈색 머리는 탈색과 염색을 한 게 아닌지 생각될 정도로 밝은 갈색과 붉은빛이 섞여 있었고, 하나와 두식이 사장이라며 깍듯하게 모시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 젊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30대 중반이나 간신히 됐을까 싶은, 눈에 띄는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면 꽤나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가느다란 눈매와 입매가 매력적인 인상이었다. 키는 180이나 될까 싶은 데다 호리호리하고 어딘가 나른한 구석이 있는 체형과 얼굴은 한 번 보면 분명 기억에 남을 만한 사람이었다. 자다 나온 건지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연신 쓸어 올리고 있었던 지라 긴 앞머리가 이마를 가볍게 덮고 있었다.

그러나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일 뿐, 자신이 말한 대로 여우라느니 600살이 넘었다느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영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장사라고 하면…”

“……”

남자가 빤히 영서를 쳐다보았다. 책상 위에 올라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30대 아저씨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그 시선이 묘하게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영서는 굴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남자가 씨익 웃었다.

“왜, 내가 무섭냐?”

……

당신 같으면 안 무섭겠냐고….!!!

영서와 해강, 주민은 최대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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