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한 구미호가 살고 있었다.
구미호는 누구보다도 약삭빨랐고, 잔머리가 좋았으며, 이치에 밝아 무슨 내기든지 지는 법이 없었다. 한낱 미물이었던 과거는 잊은 지 오래였으며, 오랫동안 전국 팔도를 다니며 세상을 깨우치고 모든 것을 공부하고 배웠다. 스승보다도 신통력을 더 일찍 얻을 수 있었고, 그는 자신의 지혜와 신통한 도술을 자랑하며 수백 년을 한 영산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런 잘난 삶에도 염증이 생기고 말았다.
구미호는 어느 날 궁금해졌다.
산 밖에는 인간들이 터를 짓고 모여 살고 있다는데. 이 땅과 이 산의 주인인 내가 그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만나 그들의 말과 생활을 배우고 나의 영향권을 넓히는 것이 옳지 않은가.
구미호는 어느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 몰래 훔쳐두었던 갓과 도포를 챙기고는 신묘한 도술을 부려 재주를 9번 넘었다더라.
그리고 그 자리에는, 털투성이의 집채만 한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불꽃의 색을 닮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손발을 가진 채 서 있었다더라.
***
“여우구슬이요?”
“그래, 여우구슬.”
영서는 하마터면 보리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릴 뻔해 기침을 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그, 그게 뭔데요.”
“여우구슬이 여우구슬이지 뭐야, 임마.”
“사장님, 영서라는 애를 빼면 나머지 둘은 일반인입니다. 그리고 저 아이도 볼 수 있게 된 것은 후천적인 사고로 인한 것이라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 하긴 요즘에는 아는 인간들은 다 나이 들어 상 치르는 마당에 어린애들이 알 리가 없겠군.”
“저기… 대체 무슨 소리 신지 잘…”
영문 모를 대화를 하는 하나와 여 사장의 사이에 영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대체 이 인간들ㅡ아니 애초에 인간이 맞는 지나 모르겠지만ㅡ은 왜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는 쏙 빼고…!
남자는 턱을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먼저 내 소개부터 제대로 하는 게 맞겠군. 내 이름은 여선호. 사장님이건 아저씨건 그냥 너희 편할 대로 부르면 된다. 그리고 이쪽은 하나, 저기 저 덩치는 두식이. 뭐 이건 알겠고.”
“아, 네…”
남자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해 보듯 눈이 가늘어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할 말을 고르는 사람 특유의 표정으로 음, 하고 목을 울린 여 사장은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인간이 아니야.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는 게 빠르겠군.”
느슨한 남자의 말이 흐려지기가 무섭게, 몸을 접고 책상 위에 올라앉아있던 남자의 몸을 스산한 빛이 한 바퀴 감쌌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에 희미한 빛이 스친 남자의 몸은, 어두운 연기 덩어리가 한번 감싸고 이내 흩어져 버렸다. 눈이 부실 만큼의 빛이나 어떠한 효과음, 그 외의 만화 같은 연출들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당연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 검은 대리석 책상 위에 있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바로, 불꽃을 닮은 갈색의 색 바랜 털이 북슬북슬하게 오른 여우 한 마리였다.
그 모습을 목격한 영서와 주민, 해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거, 거짓말…”
“….이게 무슨…?”
“…”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주민, 해강과는 달리, 영서는 어느 정도 예상한 듯 입을 다물고 침착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동안 마르고 닳도록 봐온 게 영서의 일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귀신같은 거나 익숙해지도록 봤지, 이렇게 수인, 아니 정확히 말해 ‘영물靈物’을 목격한 것은 처음인지라. 영서도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책상 위에 얌전히 발을 모으고 앉은 커다란 여우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여우의 꼬리는, 한 개가 아니었다.
몸만큼이나 북슬북슬한 붉은빛의 꼬리는, 모두 아홉 개였다.
해강이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구, 구미호?!”
“그래. 구미호.”
여우의 뾰족한 주둥이가 살짝 벌어지더니, 마치 여우 탈이라도 쓴 여 사장이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욱더 신기한 광경에 주민과 해강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호기심 어린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장님, 털 날리십니다.”
하나가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며 핀잔하듯 말하자, 여우는 킬킬대며 작게 웃더니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리자 공기를 따라 붉은 털들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참고로 하나의 정체는 뱀이다. 까치살무사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는 하나를 뜨악하게 바라본 영서와 친구들의 머릿속으로,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는 역시라고 말이다.
“저기 두식이는 반달곰. 저래 보여도 지리산 토종이야.”
꼬리로 문가에 선 덩치를 가리킨 여 사장은 앞발을 핥으며 말했다. 두식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거, 사장님,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애들 앞에서… 누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체면은 이제 와서 무슨 체면. 하나 녀석 처음에 데려올 때 그 송곳니에 물려서 내가 몇 달을 고생했는데. 그 성질머리며 맹독이며, 하여튼 새끼 살무사 주제에 감히 구미호를 물어?”
“사장님, 그건 제가 어릴 때잖습니까!”
“내가 영물이어서 망정이지 그냥 여우였으면 그대로 비명 횡사했어, 임마. 그러면 너도 그 한겨울에 그 산에서 그냥 얼어 죽었던 거고.”
“그 은혜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제가…”
하나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저 냉혈한 같은 여자가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는 일도 있구나… 영서와 친구들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협박하고 무자비하게 자신들의 목숨을 들었다 놨다 한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소름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석규가 왜 이렇게 늦냐. 아무튼 너희가 먹었던 간식에 약을 타서 준 그 알바생 있지? 아마 걔가 석규일 거다. 그런 음침한 짓 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러네.”
“혹시 눈치채고 도망칠 수도 있었으니까요. 뭐, 지금 상태로는 눈치도 못 챘겠지만.”
“석규라고 또 한 명이 있는데, 걔도 인간은 아니야. 흰 족제비거든. 생긴 것도 족제비같이 생겼지?”
여 사장이 수염을 씰룩대며 웃자, 하나와 두식이 헛기침을 하는 것이 보였다. 분명 웃음을 참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알바생, 어딘가 인상이 희미하게 남는다 싶더니… 곰곰하게 떠올려보니 정말 족제비와 닮은 인상 같기도 했다. 그 어리숙한 얼굴과 허둥거리는 몸짓이 족제비라기보다는 수달과에 더 비슷해 보였지만. 그러나 곧, 그런 평범한 어리숙함도 교묘하게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영서는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사장님네 패거리가 영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거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넷 말고는 전부 인간이야. 우리 말고 서로의 정체를 아는 부하도 없고.”
부하까지 있으셨구나… 하긴 네 명이서만 오순도순 모여서 이런 엄청난 사업을 이끌고 다니지는 않겠구나. 영서는 납득했다.
“그리고 권영서, 너를 데려온 이유는… 나의 여우구슬을 찾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영서와 친구들의 얼굴에는 당황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우구슬을 찾아달라니. 그렇게 귀한 보물이면서, 왜 우리한테…
***
“혼자 오셨어요?”
“아, 아니요…?”
“예? 아, 하하. 그러시구나. 그럼 친구들이랑? 몇 살?”
“저, 저 여…아, 아니 스물…하나요.”
“어리네. 그런데 생긴 건 더 어려 보이는데. 알아?”
능글능글한 남자의 웃음에 영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릎에 얹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 새끼는 나를 언제 봤다고 은근 반말이지…? 당장이라도 고딩의 주먹을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영서는 필사적으로 성질을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이런 곳에서… 찾는 게 맞나? 영서가 대충 대답을 흘리며 시선을 돌리자, 남자는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와 앉는 것이 느껴졌는데, 영서는 차라리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멀리 뒤쪽에 앉은 주민과 해강이 기대하는 눈으로 이쪽을 흘깃흘깃 건너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가 바로 옆에 앉는 바람에 해강의 얼굴이 가려지고, 이 어디서 한 대 얻어맞고 온 것 같이 생긴 남자의 얼굴만 시야에 가득 차고 있다는 것만 빼면, 영서는 아직까지는 참을 만했다. 이런 썅… 이왕 아무나 꼬일 거, 차라리 좀 잘생긴 놈이라도 꼬이면 어디가 덧나냐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그래, 아직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