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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54화 (54/166)

54화

몇 시간 전.

여 사장은 영서와 친구들에게 영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던 이유의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즉, 여 사장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구미호였으며, 그의 수하인 하나와 두식 또한 영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구미호들은 ‘여우구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99년 이상을 살고 999번 이상 재주를 넘으면 몸 안에 이 구슬이 맺히게 된다고 한다. 그 구슬은 구미호들에게 몸의 일부와도 같으며 여러 가지 도술과 능력을 쓸 수도 있게 해준다는 보물이었다. 옛날에는 산에 구미호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점점 그들의 구슬을 탐낸 인간들이 여우 사냥을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구미호들은 맥이 전부 끊겼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여우들도 많이 죽어나갔으니, 새로운 구미호가 등장할 가능성 또한 극히 낮아지게 된 것이었다.

여 사장은 그런 피비린내 나는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구미호였다. 유달리 날쌔고 똑똑했던 여 사장은 산속에 은둔하며 어떤 도사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세상의 환란이 잠들 때까지 그의 스승은 그를 거두어 도술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세상에 나온 그는 그의 능력을 사용해 인간들 속에 숨어 마음껏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었다.

영서는 다 마신 종이컵의 가장자리를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구슬을 왜 저한테…”

“말했잖냐, 잃어버렸다고.”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귀한 걸 왜 잃어버리셨냐고요!”

영서가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을 결국 외치자,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사장님께 버르장머리 없이…”

“냅둬, 냅둬. 18살이면 아까 태어난 애들인데, 뭘 알기나 알겠냐.”

“으…”

영서가 애꿎은 종이컵을 마구 물어뜯으며 답답해하는 동안, 잠잠하던 주민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그 구슬은 구미호의 몸속에서 생겨나는 거라고 하셨죠? 조개 속의 진주랑 비슷한 건가 싶은데… 잃어버리셨다는 건, 몸에서 빼낼 수도 있는 건가요?”

“그렇지. 한 요만한 구슬인데, 약간 푸른빛이 돌고 진주랑 비슷하게 생겼어.”

“그 구슬이 있어야 여러 가지 도술과 힘을 부릴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 구슬이 없으면 사장님… 지금… 그런 도술들을 쓸 수 없다는 뜻인가요…?”

“오오~ 그렇지, 그렇지. 말귀를 잘 알아듣네, 너는.”

“그렇게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요!!!!”

영서가 울화통을 터뜨리자, 여유로운 표정의 여 사장이 손을 내저었다.

“뭐,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지만, 거의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볼 수 있지. 아무튼 그런 고로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서 사업을 굴리는 데도 차질이 생겼다, 이 말이야. 그래서 너희들이 내 구슬을 대신 좀 찾아와 주면 좋겠다~ 하는 거지. 음.”

“왜 본인이 직접 찾으러 가시지 않고…”

영서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하나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영서를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기에 눌린 영서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여 사장이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나야 여러 번 시도해 봤지, 아무렴. 우리 애들도 계속 보내보고, 더 밑에 애들도 보내보고. 그런데 우리는 안 돼.”

“그러니까 왜요?”

“얼굴이 알려졌거든.”

얼굴이 알려져?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영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이번에는 해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일단… 그 구슬을 누가 뺏어갔는지는 알고 계신단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그놈 말고는 다른 놈이 없어.”

그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는 놈은 말이지. 거대한 여우 모습을 한 여 사장이 혀를 날름대며 말했다.

“사장님, 알려주셔도 됩니까?”

“그렇지만 얘네가 찾아와야 하는데 안 알려주는 것도 웃기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하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해강을 훑어보았다. 그나마 영서처럼 볼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정말로 평범한 인간 소년일 뿐이었다. 조금 잘생긴.

“…어쩌면 이 애가 지금으로선 더 쓸모가 있을 지도…?”

“내 생각도 그래.”

“저… 어쩌다가 잃어버리신 건가요?”

해강은 자신에게 집요하게 쏠리는 그들의 시선을 어색하게 견디며 웃어 보였다. 나름대로 무해한 모습을 보이려 활짝 웃었지만 더욱 빤히 쳐다보는 두 얼굴이 부담스러워 옆에 앉은 영서에게 바싹 다가가 앉는 해강이었다. 주민이 묻자 여 사장은 앞발을 핥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

“클럽에서 잃어버렸다니, 말이 되냐?!?!!”

“쉿, 조용, 조용! 영서야, 여기서 들키면 우리 큰일 나!”

“아, 들키라지~!!!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고!!”

영서는 분한 듯 굴러다니던 양철 쓰레기통을 뻥 차고는 씩씩거렸다. 발이 작아 끈을 꽉 조여 묶은 로퍼의 앞코가 반짝거렸다. 분명 이것도 여 사장의 비싼 애장품 중 하나리라. 어울리지도 않는 짙은 보랏빛의 드레스 셔츠와, 편리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짙은 회색의 정장 바지를 장장 3시간째 입고 있으려니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영서는 더욱 분한 마음에 스프레이로 넘겨 고정한 머리를 마구 헝클며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 내가 미끼가 되는 거냐고!!!”

해강이 필사적으로 영서를 달래고 진정시키는 동안, 주민은 휴대폰으로 여 사장의 연락처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찾은 것 같아요.”

-그래? 어떤 놈이디?

“어, 그게… 키는 한 183? 정도 되어 보이고, 얼굴이 좀 각진 타입이에요. 머리는 넘겼고, 나이는 본인 입으로는 25살이라는데 솔직히 30살은 넘어 보여요. 시계는 은색 롤렉스에 외제차 차 키 은근히 자랑하는 타입. 맞아요?”

-그랬던가… 음…뭔가 이상한데.

전화 너머의 여 사장이 이상하다는 투로 대답하자, 주민은 눈을 굴려 술집 입구를 쳐다보았다. 아직 그 남자는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클럽에서 만난 게 맞아요? 사람도 너무 많고, 알려주신 뒷문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지금은 일단 옆에 딸린 바로 데리고 나와서 영서가 간 보는 중이에요.”

-조금 더 간 좀 보라고 해봐. 아직까지는 확실하지가 않아.

“이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요? 또 들어가서 물색해야 하나…?”

“야, 나 이 짓 더 이상은 못한다고 해!!!”

전화 내용을 어떻게 들었는지, 어두운 골목에 늘어선 애꿎은 쓰레기통들을 차며 화를 내던 영서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냥 클럽에 들어가서 그놈만 찾아다 구슬을 뺏어오라고만 했지, 대체 그 클럽이 이런 클럽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못하겠으면 너나 다른 애 시켜. 그 왜, 잘생긴 놈 있잖아.

“해강아, 사장님이 너 부르신다…”

“에엑?! 나?! 내가??!!”

-권영서 걔는 딱 봐도 어려 보여서 안 될 것 같았어. 차로 다시 돌아가라. 석규가 건널목에 주차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차 번호판은 가87 1547.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차례를 토스한 주민이 웃는 얼굴로 절규하는 친구들의 양 팔을 끌고 길을 건넜다. 더는 못한다고 절규하는 영서와, 왜 나냐며 울부짖는 해강을 양손으로 팔을 끌어안은 채 길을 건너 다가오는 주민을 보면서, 차 안에서 대기 중이던 석규는 뜨악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조그맣고 마른 놈이 힘은 제일 센 거야, 뭐야?! 나만 아니면 돼,라고 써져 있기라도 한 듯한 개운한 얼굴로 주민이 뒷문을 열며 인사하자, 석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억지로 딸려온 영서와 해강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은 주민이 조수석 문을 열고 가뿐하게 탑승했다.

“시간 없어, 얘들아. 빨리빨리 갈아입어!”

석규는 자신의 옆에 앉은 무해한 덩치의 흰 얼굴을 한 소년이, 의외로 강적인 구석이 있다고 무심결에 생각하며 운전대를 꼭 잡았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진토닉 한 잔이요. 레몬 넣어서.”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바텐더가 능숙한 몸짓으로 잔을 꺼냈다. 투명하게 닦인 글라스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해강은 부드럽게 웃었다. 매력적인 보조개가 쏙 들어가며 씩 올라가는 입꼬리와 휘어지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바 안에 손님들이 한 번씩 흘끔거리며 지나갈 정도로 말이다. 곱슬거리는 머리는 깔끔하게 넘겨 안 그래도 잘난 얼굴이 더 훤칠해 보였고, 은은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며 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까닥거리는 해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전혀 18살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과하게 꾸미지 않은 흰 셔츠에 검은 진 차림의 편안한 복장이 더욱더 여유 있어 보이게까지 했다.

“와, 해강이 되게 어른 같다… 그치 영서야.”

“…봐 줄 만은 하네.”

“생각보다 이목이 훨씬 더 잘 끌리는데? 오히려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냐?”

그런 해강의 반대쪽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던 주민과 영서가 속닥거렸다. 불편한 옷과 구두는 벗어버리고 원래의 편한 운동화와 후드티를 뒤집어쓴 영서와, 똑같이 자세를 낮춘 주민이 해강을 감시하고 있었다. 앞에는 콜라 두 잔을 놓고 말이다. 영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앞에 놓인 콜라에 앙증맞게 꽂아진 빨대를 물고 단숨에 쭙쭙 빨아 마셨다. 얼음만 남아 쪼로록 소리가 날 때까지 음료를 빨아 마신 영서가 잔을 탁 내려놓고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안 잡히면 어쩌지? 여기가 아예 아닌 거 아냐?”

“그치만 여 사장님이 분명 이 바라고 하셨단 말이야. 이제 와서 다른 술집을 뒤지기도 애매한걸…”

“하여튼 그 여우 같은 인간,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서도 자기 물건 간수도 하나 못하고 말이야. 보기보다 아주 방탕하단 말이지.”

“…사장님한테 들키면 혼난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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