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영서와 친구들이 클럽으로 가기 몇 시간 전.
“사장님, 아까 말씀하신 거 가져왔습니다.”
“오, 그래. 엥,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네. 뭐 어쩔 수 없나.”
“어제 이레 아가씨가 다치셔서, 석규가 조금 쓴 모양입니다.”
“그래? 아까 재울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데.”
“살짝 까진 정도랍니다. 아가씨 엄살 아시잖습니까.”
“하여튼, 석규 그 녀석은 너무 애가 무르다니까.”
어느새 여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여 사장이, 투덜거리며 투명한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길쭉한 모양의 유리병은 끝부분이 동그란 것이 호리병을 닮아있기도 했다. 살짝 불투명한 재질의 유리 너머로, 입자가 고운 가루가 스스스 하고 여 사장이 흔드는 것을 따라 흐르고 움직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영서에게 씩 웃어 보인 여 사장이 책상 위에서 폴짝 내려와서는 주민에게 다가갔다.
“잘 봐둬라. 내 구슬을 꼭 찾아줘야 하는 이유니까.”
영문 모를 말을 내뱉은 여 사장은 주민의 팔을 잡더니 꽁꽁 묶어 놓은 지혈용 천을 끌러냈다. 핏물이 엉겨 붙은 천이 떨어지고 아직 상처가 빨긋하게 남은 흰 팔은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 파보였다. 주민도 천이 떨어지자 약하게 신음하며 목을 움츠렸으니 말이다.
“이제 괜찮아.”
낮게 다독이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이상하게 주민은 경직되었던 목 근육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여 사장이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자신의 팔에 정체 모를 가루를 뿌리는 것이 보였다. 약인 걸까. 비슷하게 생긴 소독용 가루약을 많이 봐왔던 주민인지라, 으레 따라올 고통에 대비라도 하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예상한 고통은 따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에 찬 수건을 대 주었을 때처럼, 시원하게 열과 고통을 식히는 감각이 팔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자, 놀란 주민을 보고 영서도 지레 놀라 여 사장과 주민을 번갈아 보았다. 여 사장은 씨익 웃으며 바로 유리병의 마개를 닫았다. 영서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가루를 주민의 상처에 뿌렸는데, 희게 달라붙던 가루들이 증발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붉은 주민의 상처 위로 점점 새살이 돋고 있었다. 눈으로 봤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우와아, 이게 뭐야, 뭐예요, 대체?”
해강이 눈을 빛내며 영서의 어깨너머로 끼어들자, 여 사장이 흐흥, 하고 웃으며 병을 잠옷 주머니 속에ㅡ그래, 남자는 아직도 예의 그 잠옷 차림이었던 것이다ㅡ넣었다.
“여우구슬은 상처와 병증을 치료하는데 특효지. 구미호에게 구슬이 생기게 되면 단순히 도술을 부리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원기를 회복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줘.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인간에게 구슬만 써주면,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어난다고도 해. 뭐 요즘 말로 사기템이라고 하더만?”
“사장님!”
하나가 주의를 주듯 언성을 높이자, 여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병은 꺼내 빛에 비춰보았다.
“…라는 건 오리지널 쪽의 얘기고, 지금 이건 그냥 모조품에 불과해. 진짜 여우구슬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쯤은 맞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걸 가루 내어 보관한 거야. 보통 가루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밀폐시켜서 보관하지 않으면 증발해버리는 귀한 물건이지. 진짜보다는 덜할지라도 이것도 꽤 귀한 거거든. 이 정도 상처라면 금방 나을 거다.”
“…그, 그게 진짜예요?”
“이런 걸로 거짓말할 만큼 한가하진 않아.”
“너무 많은 정보를 흘리시면 안 됩니다, 사장님.”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야, 우리는 지금 이 애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 따로 부탁할 인간도 없잖아.”
“그렇지만…”
“그렇게 귀한걸… 대체 어쩌다가 잃어버리신 거람…”
영서는 정말 몰랐다.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 물건은, 말 그대로 보물寶物이 아닌가. 그 구슬이라는 것만 있다면 어지간한 상처나 부상은 물론, 병에 걸린 사람까지 치료할 수 있다니. 단지 구슬을 몸에 지니는 것만으로. 모조품의 효과가 이 정도라면, 진짜 여우구슬의 능력은 아마 상상보다도 더 월등할 것이 분명했다.
“뭐…아무래도 이런 장사를 하다 보면 온갖 인간들이 꼬이기 마련인데 말이지… 하도 적이 많다 보니까, 하하하.”
“사장님께서 클럽에서 만난 웬 이름도 모를 남자와 눈이 맞아서 뒹구시다가 뺏겼단다.”
“헉…”
“하나야!!”
“왜요, 얘네도 알 건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 사장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것처럼 영서와 주민, 해강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그런…”
“사장님, 보기보다 화끈하시네요.”
“주해강 바보야, 그게 할 소리냐?!”
“애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짜식이…하하, 얘, 얘들아, 그런 게 아니고 말이다, 그 비즈니스…파트너라고 알지? 응? 뭐 그런 거지, 술 한 잔 기울이고 뭐 그러다가, 응?”
“…어른들의 세계는…”
안 그래도 흰 얼굴이 더 희게 질린 주민이, 충격에 못 이겨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서 또한 멸시와 한심함이 가득 찬 얼굴로 여 사장을 쳐다보았다.
“앗, 아…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줘 얘들아…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사장님… 그 귀한걸… 그렇게 아무하고나 만나면서…”
“아니라니까… 야, 여하나! 죽고 싶냐, 진짜?!”
“사장님… 실망이에요.”
해강마저 실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자, 여 사장은 대단히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오직 하나만이 묘하게 시원한 얼굴로 빙긋 웃을 뿐이었다.
***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너무 무모한 방법 같은데…”
밤 12시, 이태원의 한 번화가 근처 골목길에 주차된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하나와 조수석에 앉은 여 사장이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즉, 미끼가 돼서 그 구슬 도둑을 다시 꼬여 내야 한다는 거군. 영서는 입술을 내밀며 무모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장님, 혹시, 혹시나 말인데요.”
“혹시?”
“만약에… 진짜 만약에? 저희가 그냥…도망가면? 어쩌다 보니? 구슬도 못 찾고? 그냥 가면…?”
하품을 하던 여 사장이 백미러를 통해 멀뚱멀뚱 영서를 쳐다보았다.
“내가 구미호라는 거 말 안 했던가?”
“했는데요…”
“…꼬맹아, 구미호가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
“…글쎄요…?”
여 사장은 말없이 영서를 건너다보았다. 영서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 젊은 놈일수록 간이 싱싱하긴 하더라고?”
“에?”
“…내가 왜 이런 사업을 굴리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었지.”
그리하여 영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여 사장의 옷 가방을 챙겨 클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영서야, 정신 차려, 영서야!”
“으…우욱…웁…”
눈앞이 핑핑 돌았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두통이 머리를 깨버릴 듯 온통 뒤흔들었고,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몸을 쾅쾅 울리는 어지러움에 위장이 절로 뒤집혔다. 영서는 힘이 풀리는 다리를 어찌할지 모르고 자신을 잡아오는 팔에 무작정 몸을 기대어버렸다. 누구지? 좋은 냄새가 났다. 향수 냄새를 싫어하는 영서일진대, 오히려 무겁고 텁텁한 향수가 아닌 기분 좋은 체취와 뒤섞인… 뭐라 할 수 없이 맑고 포근한 향기에 울렁거리는 속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제대로 안아주는 팔과 몸이 무척 안정적이고 다정해서, 영서는 굳이 몸을 세우려 노력하기보다 이대로 이 주인도 모르는 팔에 안겨있는 쪽을 선택해버리기로 했다.
“…영서야, 너 혹시 술 마셨어?”
“우…으…”
“…하하, 진짜… 사고뭉치네, 권영서.”
네가 취해버리면 어떡해. 낮게 웃으며 제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이, 그리고 편하게 다리를 펴게 해주는 다정한 배려와 기분 좋은 심장 소리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기댄 영서의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 목소리, 들어본 적 있는데. 하지만 너무 어지러워, 울렁거리고…피곤해…
“주민이가 호들갑 떨길래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이네.”
영서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이며 숨만 고르게 내쉬었다. 취한 몸을 덮친 피로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저 흔들리던 몸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자마자 속절없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훗날 영서는 그 순간을 생각하면 얼굴을 붉히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곤 했다. 정말 중요한 순간은 그다음이었음에도 말이다.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가.”
해강은 자신의 팔 안에 고개를 묻고 잠든 영서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