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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57화 (57/166)

57화

조금 전.

“앗, 잠… 읍…”

꽤나 급한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실 둘만 남으면 되게 진도가 빠른 타입이구나. 해강은 조금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묘령의 남자는 분명 여 사장이 말해준 대로 심상치 않아 보였고, 과연 그의 말대로 앞에서는 젠틀한 척을 하더니 뒤로는 구린 짓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 해강은 분명히 눈치챌 수 있었다.

웃으며 대화를 하는 도중, 자신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술잔에 무언가를 타 넣는 모습을 말이다. 해강은 헤프게 웃음을 흘리면서도 분명히 캐치해낼 수 있었다. 약을 탄 걸까? 그래서 여 사장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상태로 꼬여 넘어가 구슬을 뺏길 거겠지. 해강은 입꼬리를 올린 채 이걸 어떡하나, 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길에 그저 술잔에 담긴 것을 입안에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술 따위는 해강에게 별로 큰 약점이 되지 못했다. 아마 여 사장도 그랬을 것이다. 묘하게 도수가 세고 뒤끝이 안 좋은 술 위주로 자꾸 추천하며 사주는 것부터 알아봤었지만, 이 아저씨 진짜 구리게 노는 타입이네. 정말 구슬 도둑이 아니라면 먼저 경찰에 약물 강간죄 같은 걸로 집어넣든가 해야지. 약기운이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며 해강은 생각했다. 기침이 계속 튀어나오고, 아무리 심호흡을 하려 애썼지만 단순 숙취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차라리 술만 계속 마시는 거였으면 자신 있는데 말이지. 잇새로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해강은 자신을 부축하는 남자가 가는 방향을 가늠해 보려 애썼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약을 먹은 적 있었는데.

해강은 뜬금없이 어지러운 시야를 뚫고, 흐린 기억 속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한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 생각나고 지랄이야…

해강은 끙,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흩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눈꺼풀에 깊게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른아른 맴돌며 웃고 있었다.

임재희.

그 이름을 썼다고 벌이라도 주러 온 건지. 해강은 실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재희 씨? 괜찮아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해강이 걱정되기라도 한 건지, 정장 차림의 남자는 해강을 부축하다 말고 멈춰 서서 해강의 얼굴을 확인했다. 반쯤 감긴 눈의 동공이 풀려있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힘들죠? 제 차가 주변에 있어요. 조금만 참아요.”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해강은 이미 혀까지 뻣뻣하게 굳어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이 아저씨 진짜 취향 더럽네. 사람 약 먹여서 마음대로 하고 그러는 거, 그거 범죄예요 아저씨-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저 마음뿐이었다.

“영차, 다 왔다. 여기 타요, 재희 씨.”

남자는 차의 문을 열고 조수석에 해강을 집어넣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을 혼자 부축해 여기까지 끌고 나오다니, 보기보다 힘이 장난 아닌 놈 같아서 해강은 흐려지는 머리로 열심히 계산했다. 키는 나보다 작은 것 같은데, 부축할 때 닿은 몸이 꽤 단단하게 느껴지긴 했었다. 아마 보통의 상태가 아닌 지금의 힘으로 저항하고 도망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었다. 그럼 어쩐다. 주민이나 여 사장 쪽으로 연락을 취하기에는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꺼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는 조수석의 문을 닫아준 후 운전석에 올라탔다.

“…읍….!”

아니나 다를까, 해강에게 상체를 기울인 남자가 손을 들어 해강의 턱을 잡고 별안간 입을 맞췄다. 기울인 상체에 힘을 줘 몸으로 누르자 해강은 속수무책으로 조수석에 깔려 누울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더럽다 못해 온갖 욕설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약을 먹여서 사람을 납치한 후에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 족속들에 대해 해강은 잘 알고 있었다. 운이 나쁘면 더한 짓도 당하게 될지 몰랐지만, 일단 눈앞의 남자는 당장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급급해 보일 뿐, 해강이 걱정하는 더 나쁜 수단을 쓰는 부류의 인간 같지는 않았다. 그래, 먼저 구슬을 되찾아야 한다.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이딴 짓을 해가면서 온 거니까. 해강은 거칠게 파고들어오는 입술을 인상 하나 구기지 않고 받아주었다. 남자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자, 남자는 해강이 허락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더욱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정장 상의를 벗어들었다. 해강은 여 사장이 일러준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방식으로 도둑한테 접근한다고 해도 구슬을 어떻게 되찾아요?’

‘아마 그놈은 혼자서 움직이는 놈은 아닐 거야. 몇 번이나 다시 접근하려고 했지만 우리 애들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지 번번이 실패했거든. 구슬을 노린 놈들은 그동안 많이 봤지만…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니, 최근에 고용된 놈이든, 아니면 단순히 심부름꾼으로 돈만 받고 그런 짓을 전문으로 하는 놈인지…’

‘그럼 본인이 구슬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렇게 귀한 거면 다른 곳에 이미 빼놓고 온 거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어. 여우구슬은 인간의 몸에 한 번 들어가면 맘대로 빼낼 수 없으니까.’

‘네?’

‘인간의 기와 정신이 제일 흐트러져 있을 때, 그리고 그 상태에 침투해 있을 때만이 구슬을 뺏어올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흠흠, 그렇게 정신없을 때 뺏긴 거고.’

‘그러면 구슬을 찾으려면…?’

‘…그래. 똑같이 그놈의 혼을 쏙 빼놔야 그 틈을 타 뺏어올 수 있는 거지.’

해강은 인상을 찡그렸다. 하여튼 그 여우 자식, 말만 번듯하게 하지 결국 몸으로 때우라 이거였잖아. 대충 눈치는 챈 해강이었지만, 굳이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부러 눈치 없는 척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영서의 얼굴이 빨개진 건 꽤 귀여워서 봐줄 만했지만 말이다.

그래, 영서. 애초에 그 애를 보낸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물론 적어도 나보다는 그 애가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만.

해강은 영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 영서를 대입해 보았다.

절대로 이런 짓은 시킬 수 없어.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으며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하자, 남자는 더욱 해강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몸을 비벼왔다. 역겨웠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아직,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이런 것쯤은 별거 아니니까. 해강은 영서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그의 얼굴에 다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임재희.

재희 형.

‘해강아.’

언제일지는 몰라도, 아마 곧, 형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

‘주해강.’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강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문득, 영서가 보고 싶었다.

우당탕-

쾅쾅쾅-!!!

“야아아아아악-!!!! 야!! 주해강 나와아아아!!!!!”

“영서야!! 왜 그래! 그만해!”

“야 주해가아아아앙~!!!”

해강의 눈이 가물가물해짐과 동시에, 갑자기 큰 충돌 음과 함께 자동차를 쿵쿵 울리는 진동에 해강은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약기운에 침잠하던 정신이 반짝 깰 정도로 큰 소리였다. 당황한 남자가 몸을 일으켜 앞 유리를 쳐다보자, 해강에게는 익숙한 두 인영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바로 권영서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자동차 보닛 위에 엎드려 마구 차를 두들기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욕을 중얼거리며 옷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영서야! 제발 조용히 좀….!!”

“크아아아아아아악 이거 안 놔아아아-?!!!?! 야 주해강 나오라고 해!!! 야 임마!!!”

“이봐요,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당신들 누구예요?!”

“당신은 무어야…우씨… 아저씨가 몬데 이래라저래라 해요!!! 비켜어어어!!!”

“영서야….”

미친놈은 원래 힘이 세다고 했던가. 누가 봐도 술에 진탕 취한 것처럼 보이는 영서가 마구 팔을 휘저으며 차의 보닛과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며 주사를 부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그런 영서를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민의 사색이 된 얼굴이 보였다. 차 유리는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인지, 조수석에 앉은 해강의 상태가 둘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해강은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목소리를 틔워내려 노력했다. 아까보다는 몸에 힘이 조금씩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봐요, 누군데 남의 차에 대고 행패입니까? 그쪽 친구예요? 친구 간수 좀 똑바로 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영서야, 차 좀 그만 때려…!”

“에에에엥? 이 아저씨 뭐야, 우씨, 아까 그 뻔지르르한 아저씨 아냐? 주해강 어딨어요? 에?”

“주해강…? 이 누굽니까? 술 마셨으면 곱게 집에 들어갈 것이지… 어라, 뭔가 이상한데… 당신들, 성인 맞아요? 여기 바에서 마신 겁니까?”

“아, 주해강 나오라고오오~!!!! 주해강 이 새끼 어디갔어~~~!!!!”

말리는 주민과 남자의 손을 마구 뿌리친 영서가, 이제는 아예 차 앞 보닛에 대놓고 몸을 엎드려 버렸다. 마치 유치원생이 떼를 쓰는 것처럼 팔을 버둥거리며 행패를 부리던 영서가, 문득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파의 앞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강의 모습이 보인 걸까, 아니면 단지 힘이 들어서 멈춘 건지. 해강은 끙, 소리를 내며 몸에 힘을 줘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두운 유리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뜬 영서의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분명 밖에서는 이 안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꼭,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이, 그렇게 영서는 해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해강의 얼굴 쪽을 보고 있던 거겠지만.

해강이 잠시 멍한 얼굴로 그런 영서와 눈을 마주하고 있자, 영서 또한 반쯤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해강, 너 나 좋아한다며.”

"뭐? 무슨 소리야, 갑자기? 이봐요, 경찰 부르기 전에 어서…!"

…영서야…

너는…정말이지.

해강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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