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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58화 (58/166)

58화

주민과 남자가 바로 뒤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은 것인지, 술에 취한 영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일이면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해강은 그걸 알면서도, 그리고 이미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나가 영서를 마주할 정도로 몸에 힘이 돌아왔으면서도, 그저 잠자코 앉아있었다.

“주해강이 대체 누굽니까? 당신, 이름이 뭐예요?”

“아저씨는 빠져!! 있어, 나 좋아하는 애!”

“영, 영서야…!!”

주민이 차라리 울고 싶다는 얼굴로 영서와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결심한 듯한 얼굴로 주머니에 뭔가를 꺼내들었다. 주민의 휴대폰이었다.

“뭡니까, 그걸 왜…”

꺼내시는 거죠,라고 남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는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스치듯 읽었다. 여 사장님,이라고 표시된 글자 밑으로, 발신 표시가 뜨더니 동시에 전화를 받은 듯 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했다, 주민아.’

잘했다니, 그리고 주민? 모르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설마…

당황한 남자가 뒤를 돌아 물러서기도 전에, 가볍고 날렵한 발걸음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어라 단말마를 내뱉기도 전에 남자의 목에 가느다란 주삿바늘이 단숨에 꽂혔다.

“큭…!!”

“어딜 내빼려고?”

비웃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혀뿌리부터 뻣뻣하게 퍼져오는 약의 감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컥…커헉…윽…”

“약에 관해서는 나만 한 전문가가 없거든. 안심해, 바로 죽는 건 아니니까. 너한테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게 꽤 많아서 말이야.”

바르작거리며 바닥에서 몸을 뒤트는 남자의 목을 발로 누른 하나가, 주민과 영서를 돌아보며 손에 든 주사기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눈짓으로 아이들을 안심시킨 그녀가 주머니에서 작은 무전기를 꺼내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사장님, 끝났습니다. 두식이 이쪽으로 보내서 수거해가시고, 아이들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래, 딱 마침 주민이가 연락을 잘했네. 그대로 차에 타서 토끼면 잡기도 힘들 뻔했는데 말이지.’

“하, 하나 누나?! 어떻게…?”

“당연히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지. 정말로 너희만 어떻게 보내니? 근처에 사장님도 계셔.”

하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튀어나온 덤불을 가리켰다. 풀과 덤불이 우거져 사람 하나쯤 숨어도 이상할 것 없는 으슥한 곳이긴 했으나, 주민은 벌어진 입을 아직도 다물지 못한 채 하나와 그녀의 발밑에 깔린 남자를 번갈아보았다.

“약을 쓰는 놈인지는 몰랐는데, 그래도 덕분에 특정하기에는 쉬워졌네. 아마 미끼로 잡혀간 네 친구도 약에 당했을 거야. 사무실로 데려가서 치료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아, 네…”

“…그런데 권영서 쟤도 약 먹은 거니?”

하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영서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영서는 어느새 침을 흘리며 보닛 위에 엎어진 채 잠들어 있었다. 주민은 영서와 하나를 번갈아보다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냥…영서가…”

자초지종을 들은 하나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주민은 그녀가 한껏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잭 콕이 술과 콜라를 섞은 술의 한 종류였다는 것을… 그리고 뭣도 모르고 당당하게 그걸 시켜 두 잔이나 원샷 한 결과가 바로 저것이라는 것을… 주민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맞다, 해강아!”

주민이 허겁지겁 조수석의 문을 열자, 안색이 희게 질린 해강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머, 꽤 상태가 안 좋은가 봐.”

“헉, 해강아, 괜찮아?! 너도 술 마셔서 그래?!”

“아냐, 난 괜찮아… 아마 약 때문에 그럴 거야…”

“쯧, 최근에 이 근방에서 정체 모를 약을 파는 놈들이 돌아다닌다고는 들었는데. 아마 싸구려 약에 불순물을 섞어서 뒤끝이 안 좋긴 할 거야. 그래도 사무실로 가면 석규가 해독제를 만들어 놨을 테니까, 얼른 가자고.”

조금 전의 소란으로, 주변 번화가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웅성거리며 주차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을 의식했는지 기절한 남자를 일으켜 세워 마치 일행인 것처럼 부축했다.

“해강아, 괜찮아? 설 수 있어?”

“응, 영서 덕분에 깜짝 놀라서 약이 깬 걸지도? 하하하.”

“이런 때에도 농담은… 그런데 영서는 어쩌지? 너무 힘이 세서 내가 들 수가…”

“내가 같이 부축해 줄게.”

“으…주해강…우…”

“그래, 나 여기 있어.”

어린애를 달래듯 대답한 해강이 비틀대며 일어나 영서에게 다가갔다. 기운이 잔뜩 빠진 상태임에도 해강의 얼굴에는, 여느 때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발로 단단히 딛고 서서, 영서의 상체를 일으켜 제대로 부축해 안는 해강의 눈빛을 멀리서나마 지켜본 주민은, 왠지 자신이 보면 안 될 것 같은 순간을 본 것 같아 급히 시선을 돌렸다.

영서는 잠시 눈을 뜨는가 싶더니, 멍한 눈으로 해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해강 또한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제 품 안에 안긴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무어라 해강의 입이 달싹이고, 그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영서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해강도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그저 푹 웃으며 영서를 추슬러 안아줄 뿐이었다. 귓가에 스치는 밤바람이 꽤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게 다가왔다.

영서 너를, 내가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강의 머리 위로, 작은 별빛 하나가 부서질 듯 쏟아지는 밤이었다.

***

구슬 도둑을 되찾은 후, 사건의 해결은 영서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갔다.

어른들의 사정이란 으레 그런 것인지, 기절한 남자를 데리고 간 하나는 사무실에서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여 사장도 중간중간 자리를 비우면서 영서와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례를 하겠다며 넉살 좋게 웃은 여 사장은 아직 해줄 얘기가 남았으니 일단 해강의 몸을 치료하고 쉬다 가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식은 순식간에 애 보기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며 못마땅해 했지만, 그래도 영서와 친구들이 사장의 구슬을 되찾아 오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영서는 아직도 숙취에 절어 삶은 콩나물마냥 낡은 소파 위에 드러누워 있었고, 맞은편 작은 소파에 앉은 주민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허여멀건한 인상의 남자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석규.”

“아, 형님.”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두식이 손을 들어 보이자 석규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아는 척을 했다. 조금 전, 사무실로 돌아온 아이들을 곤란한 표정으로 훑어본 석규가 일단 영서에게 마시게 하라며 한 물병을 주민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직 몸을 비틀거리는 해강을 부축한 채 ‘이 친구는 옆에 있는 처치실에서 치료를 할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여전히 헤롱거리며 소파에 늘어져있는 영서의 이마를 슬쩍 짚어본 석규가 입을 열었다.

“토하고 싶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니?”

“으… 네… 그냥 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정도…”

석규가 셔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여러 개의 약봉지 중 하나를 골라내 영서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혹시 위경련이 올 수도 있으니까 이 약을 먹어둬. 그리고 계속 누워서 휴식을 취하면 나아질 거야.”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너는 애가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니? 이 정도로 취해서 온 거 보면 술집의 술을 네가 다 마신 것 같은데.”

주민과 영서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잭콕의 뜻을 몰라서 그저 콜라인 줄 알고 마셔버렸다는 걸 어디 가서 말하겠는가.

그것도 두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말이다.

영서는 눈물을 삼키며 빙빙 도는 머리로, 어른이 되어도 다시는 술 따윈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했다.

“저… 아저씨, 해강이는요?”

“해강이? 아, 아까 네 친구 말이구나. 그 애도 지금 해독제 맞고 누워서 쉬고 있어. 피곤해 보이길래 잠깐 눈 좀 붙이라고 했으니까 자고 있을 텐데.”

영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챈 주민이 석규에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 사장님이랑 하나 누나는 어디 가셨어요?”

“누님이랑 사장님은 1층 창고에 계실 거야. 너희가 처음 붙잡혀 온 곳 있지? 구슬 도둑을 거기에 묶어뒀거든.”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기에는 아주 쓸모 있고 좋은 공간이거든. 석규가 웃으며 말하자 주민과 영서는 어깨를 떨며 그 창고를 떠올렸다. 이 인간들, 역시 처음부터 우리를 곱게 데려올 생각은 아니었구만…!! 영서는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일어나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음… 다시 구슬을 뱉어내라고 해야겠지?”

“어떻게요?”

“그… 그건…으음… 너희들이 알기에는 조금…”

석규가 애매하다는 웃음으로 대충 대답을 피하자, 영서와 주민은 어렴풋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란 것은 역시…알아서는 안 될 영역의 문제 같았다.

“그럼 구슬을 뺏고 난 후에는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경찰? 아하하, 너 농담도 잘 한다.”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 석규가 웃음을 터뜨리자, 문가에 서있던 두식도 역시나 웃음을 참는 듯 헛기침을 했다. 영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냐는 듯 석규가 놀란 눈으로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어… 그러니까… 농담이 아니었니?”

“아닌데요…”

“…”

잠시 그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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