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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59화 (59/166)

59화

“음… 농담… 아니었구나.”

“……”

또다시 애매한 웃음을 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석규의 표정에, 영서는 어딘가 서늘한 감정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뇌리를 스친 그 예감이 차라리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남자는… 그럼…”

“일단 최대한 정보를 빼내봐야 하니까… 음…당장 처리하지는 않으실 거야. 하지만… 왜 그러니? 그 남자한테 볼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닌데요…”

“어느 조직에서 굴러먹던 어떤 놈일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배후가 더 있을 확률도 높고, 사장님께서는 아예 이참에 싹을 잘라버리고 싶어 하셔. 그러니까… 아마 당분간은 너희도 휘말리지 않는 게 좋겠다. 그게 우리가 너희한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야.”

석규가 건조한 말투로 설명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복잡한 영서의 표정을 읽은 주민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석규와 영서를 번갈아 보았다.

“사장님은… 구슬을 되찾으셔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음… 그렇지. 아무래도 지난 몇 달간 아주 고생을 하셨거든. 구슬을 잃은 구미호는 도력을 뺏길 뿐만 아니라 점점 기운을 잃게 돼. 그래서 평소처럼 일을 하시지도 못하고 뒤로 빠져 계시다 보니까 사업이 비틀거리게 돼서 우리 쪽도 타격이 컸거든. 이제 다시 회복하겠지만, 그래도 구슬 뺏긴 사장님을 계속 보는 건 괴로웠으니까.”

담담한 석규의 말투에 두식이 눈가를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는 그의 태도로, 너무 많은 얘기를 한다는 무언의 주의인 것을 알았으나 석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도 대충 얘기는 들었겠지만, 사장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거든. 하나 누님은 어릴 때 엄마를 잃고 겨울에 혼자 돌산에서 얼어 죽을 뻔한 걸 사장님이 업어오셨고, 그 후에 두식이 형님도 사냥꾼들 덫에 걸려 죽어가던 걸 사장님이 구해주신 거고. 그리고 나도 목숨을 빚졌으니까.”

작게 웃으며 말하는 석규의 얼굴에는, 과거를 회상하듯 미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에는 식구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고 사장에 대한 존경과 경애가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영서와 주민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사장님이랑 함께 일하게 되신 거예요?”

주민이 조심스럽게 묻자, 석규가 주민을 보며 대답했다.

“나는 지금은 철거된 옛 동물원에서 태어났어. 내 엄마는 자연에서 태어나 밀렵꾼들한테 잡혀서 그 동물원에 들어오게 됐고, 얼마 후에 나와 내 형제들을 낳았지. 하지만 알다시피 동물원은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잖아. 엄마는 우리를 낳자마자 병들어 죽었고, 우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인간들에게 구경거리가 돼서 따로따로 떨어져서 크게 됐어.”

생각보다 깊고 어두운 과거에 영서는 어깨를 움츠렸다. 마냥 실실대고 흰 얼굴에 있는 듯 없는 듯 돌아다니던 석규가, 태생부터 갇혀 살게 된 생명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 형제들도 인간의 손을 타서 하나둘씩 병들어 죽고, 남은 흰 족제비는 나뿐이었어. 유일하게 남은 족제비 무리의 막내였던 나는 동물원 중앙으로 옮겨져 하루에도 수천 명의 인간들이 내가 먹고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소리치고, 먹이나 쓰레기를 던지고, 내 털이나 꼬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걸 참아내야 했어. 한마디로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는 곳이었지. 그래서 어느 날은 죽을 것 같아서 벽에 머리를 박았더니, 어떤 여자애가 귀엽다며 웃는 거 있지? 그때쯤부터 아, 정말로 죽어야 끝나겠구나, 죽어야 이 생활에서 벗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어.”

담담한 석규의 과거 이야기에, 두식은 아직도 화가 난다는 듯 씨근대며 외쳤다.

“인간이란 것들은 그래! 천연기념물이니 보호종이니 지랄을 하면서, 막상 신기하다고 마음대로 데려가거나 잡아버리지! 나도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이미 온갖 장기가 털려서 대가리만 잘린 채 장식품으로나 박제됐을 거다!”

주민이 겁에 질린 얼굴로 영서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들이 누구의 소굴에 앉아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영서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정도 그렇게 시위하듯 누워 있었더니, 어느 날 한 남자가 내 우리 앞에 오랫동안 서 있는 걸 보게 됐어. 재주도 안 부리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금방 가겠지, 싶었는데, 어느 순간 그 남자가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거야.”

“그럼… 그게…”

“그래, 사장님이었어.”

푸스스 웃은 석규가 뒷머리를 긁으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꺼내주겠다고 했어. 애초에 인간이 나와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꺼내준다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이미 없었어. 난… 엄마가 태어났다던 곳에 가보는 게 꿈이었거든. 다시 날 이용한다고 해도, 일단 이 지옥 밖으로만 나가면 얼마든지 탈출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일단 알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뭔데요?”

“사흘 후에, 동물원이 망해버렸어. 정확히 말하면 다른 누군가가 동물원을 인수했다고 하더라고.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기존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잘리고, 당연히 동물원도 폐장됐고. 유명하던 동물원이 한순간에 문을 닫아버린 거지.”

주민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뭐라 물어야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리자, 석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사장님이 한 일이었지. 보기보다 사장님은 꽤 여러 분야에 영향력이 있는 분이야. 아마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분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동물원의 기사를 읽었고, 와서 한 번 둘러본 후 ‘작업’에 들어가신 거야. 동물원 따위들은 전부 다 망해버려야 한다, 고 말이야.”

“그럼 그 안에 있던 동물들은…”

“응, 전부 풀어주셨어. 그중 몇몇은 나처럼 사장님 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빌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고. 나이도 적고 도력도 거의 없는 족제비 한 마리의 직업치고는 꽤 거창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게 벌써 40년이나 지났네. 석규가 중얼거린 뜻밖의 말에 영서와 주민은 입이 벌어지는 걸 참아야 했다. 사, 사십…?!! 다들 영물이니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옛날의 일들이었구나 싶어, 영서는 여 사장과 석규의 나이를 더욱더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이레를 만났어.”

이레?

석규가 발음한 하나의 이름에, 영서는 문득 언젠가 이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레가 누구죠?”

“다른 분들도 얘기하셨던 것 같은데… 다른 조직원분인가?”

“아, 그렇지 참. 아직 이레를 만나지 못했구나.”

석규가 의외라는 듯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영서와 주민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석규가 애매한 얼굴로 턱을 긁으며 말했다.

“음… 그러고 보니 이미 일도 끝났겠다, 안 만나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는데…”

“네? 왜요?”

“좀… 무서운 애거든.”

무서운 애라니. 석규가 저렇게 진지하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어마무시한 사람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 영서였다. 듣기로는 꽤 젊은 사람인가 싶은데, 설마 하나보다도 더 무자비하고 독한 사람인 걸까…?

“호, 혹시… 사장님의 오른팔이라거나…”

“오른팔? 아아, 뭐, 글쎄다,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이지, 사장님한테는.”

“헉…”

석규의 대답에 영서와 주민은 숨을 삼켰다. 그 하나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인물이 있다니. 게다가 여 사장에게도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만큼 2인자라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역시 석규의 말대로 그 이레라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이대로 인연을 끊는 편이…

우당탕-

“방금 무슨 소리지?”

귀가 밝은 두식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음의 근원을 찾았다. 이 방이 아닌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침입자일까?! 하지만 이곳까지 간이 크게 침입할 놈이 있나? 영서는 이때, 문득 자신의 영안이 멀쩡했더라면 이런 상황에 미리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뛰는 발소리와 인기척이 무척 가까워진 순간, 두식이 그와 동시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우와아악!!!!”

“으갸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비명의 주인이 두 명이나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두식의 위로 넘어졌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영서와 주민은, 그 두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주해강?!”

“해, 해강이?!”

“영서야아으아아아아…!! 나 좀 살려줘어어어…!”

“나랑 놀자구!!! 어딜 도망가는 거야, 자꾸?!”

어린 애다.

그것도, 레이스가 잔뜩 달린 흰 잠옷을 입은, 산발머리를 한 어린 여자애.

개구지게 웃은 어린 여자애가 씩 웃으며, 엎어진 해강의 목마를 탄 채로 외쳤다.

“나랑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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