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61화 (61/166)

61화

“…에? 여기서 끝?”

“엥? 그, 그래서요? 이레의 엄마가 누구라고요…?”

이야기가 끊어지자 맥이 빠진 듯 영서와 주민이 되물었다. 무슨 과거 얘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난리야…!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든 영서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석규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다… 아무래도 그분에 관한 얘기는… 우리가 함부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 상황 봐서 사장님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다. 그 정도는 얘기해주실 거야.”

“치… 김 빠지게…”

“…저… 저기…”

영서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해강이, 창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래서… 얘는 저한테 왜 이러는지 누가 설명 좀…”

“나랑 놀아!”

“히익…”

“안 놀면 우왁!!하고 잡아먹어 버릴 거야!”

긴 곱슬머리를 등까지 풀어헤친 채로, 여전히 잠옷 바람에 장난기가 얼굴 곳곳에 스민 어린아이가 양손을 들며 크아악, 하는 소리를 냈다. 새끼 여우 주제에 호랑이 흉내를 내는 건가… 하지만 누가 봐도 호랑이라기보다 고양이에 더 가까운 모습에, 영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린아이 쪽을 흘금 쳐다보자, 아프지도 않은 손톱을 세워 바바박 해강의 등을 긁던 이레가 눈을 세우고 영서의 시선을 받 쳤다.

“뭘 봐!”

“뭐, 뭘 봐…? 이, 이 쪼그만 게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흥! 지는 어른이면서도 쪼그만 주제에! 말 걸지 마! 아빠가 모르는 남자랑 말하지 말랬어!”

“아빠면, 혹시 여 사장님?”

“뭐야, 우리 아빠 알아?”

콧잔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 이레가, 온몸으로 경계심을 내세우며 해강의 등 뒤로 숨었다. 예나 지금이나 큰 어른 뒤에 숨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영서는 쪼그만 게,라는 아이의 호칭에 충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연장자의 여유를 되찾고 심호흡을 했다. 하하, 권영서, 이렇게 어린애한테 휘둘리면 못쓰지, 그럼 그럼…

“아하하, 이레야, 이분들은 손님이셔. 예의 바르게 굴어야지.”

“소온님?”

“응, 손님. 아빠를 도와주러 오신 분들이야. 그러니까 잘 대해드려야겠지?”

“…아빠 일이라면… 그거?”

“그거라니?”

석규가 이레를 달래는 동안, 해강은 진저리를 치며 영서 쪽으로 꿈질 꿈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얘가 왜 이래? 싶은 눈으로 쳐다보자, 해강이 답지 않게 우는소리를 내며 엉겨들었다.

“영서야아… 얘, 얘 어린애 같지 않게 엄청 무서워… 흑.”

“뭐? 무슨 소리야? 이런 꼬맹이가 무슨… 네 덩치의 반의반 밖에 안 되는구만.”

“정말이야! 나 죽는 줄 알았다구… 왠지 기 빨려…”

석규의 말대로 해강은 해독 치료를 받고 있던 모양인지,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의 한쪽 팔 부분은 그의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주삿바늘 자국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팔 안쪽에 흰 거즈와 반창고가 붙어있었고, 그것을 보니 영서는 왠지 조금 전의 상황이 그대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분명 술에 취해 천지분간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상태였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 나 좋아한다며.’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여, 영서야, 갑자기 왜 그래??!!”

“시, 시끄러! 왜 자꾸 붙는 거야, 진짜, 저, 저리 좀 떨어져 앉아!”

얼굴이 온통, 목부터 배 안쪽까지 전부 화끈화끈해지는 감각이었다. 영서는 되레 화를 내며 해강을 옆구리를 낑낑대며 밀었지만, 불쌍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 해강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글쎄, 저기 형이 잠깐 자라고 해서 나도 자려고 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다시 열리길래, 난 형인 줄 알고… 무슨 일이냐고 다시 일어났는데…”

“아, 이레가 또 방에서 멋대로 나왔었군요. 제 뒤를 따라와서 들어갔나 봅니다. 미안해요, 해강 학생.”

“그, 그런데 얘… 왜 자꾸 저한테 달려드는 건가요… 좀 무서워서…”

“무섭긴, 넌 열 살짜리가 뭐가 무서워?”

짐짓 태연한 척 영서가 핀잔을 주자, 해강은 우물쭈물 한 얼굴로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등에 찰싹 업히는 이레에 히익 소리를 내며 몸을 피했다.

“그, 그치만… 진짜 날 잡아먹을 것 같은… 생명의 위협이…”

“에에에엥?? 무슨 소리야, 진짜. 야, 덩칫값 좀 해라.”

“맞아, 해강아, 아직 약이 덜 깬 거 아냐? 좀 활발하긴 해도… 그냥 평범한 어린 애인 걸.”

“몰라, 나를 보자마자 자기랑 놀자고 자꾸… 내보내려고 했는데 힘이 너무 세. 내 머리카락도 막 잡아당겼다구.”

“나랑 놀자구!!”

볼을 뿌우 부풀린 이레가, 머리를 흔들며 해강의 어깨에 양 팔을 걸치고 낑낑대며 그의 등을 타고 기어올랐다. 대체 이렇게 어리광만 잔뜩 부리는 꼬맹이가 뭐가 무섭다는 건지? 영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강은 정말 뭐라도 본 사람인 양, 몸을 덜덜 떨며 영서의 팔을 잡았다.

“얘, 얘… 진짜로… 사람 맞아?”

잔뜩 겁을 먹은 해강의 목을 안고 대롱대롱 매달린 이레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

이레가 온 지 2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두식과 석규는 평소대로 개인 임무를 제외하고는 본부에 주둔해 이레를 돌보거나 자원 업무를 뛰었으며, 하나와 여 사장도 그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손수 임무에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여 사장은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하나는 자신의 하나뿐인 상사가 제 발로 현장에 나서 손을 더럽히는 일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 사장은 약 10년 전부터 대외적으로 사업 현장에 얼굴을 들이밀 때만 나서기로 하고 실질적인 일들은 하나와 그 밑의 부하들이 도맡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봐.”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글쎄다, 너도 한 오백 년 넘게 살면 느껴지려나. 몸이 예전 같지 않고, 확실히 힘이나 기운이 덜해지고 있어. 아직 너희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는 제일 잘 알 수가 있는 부분이거든”

“…하지만 아직 사장님은 물러나실 때가 아닙니다. 좀 더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

“글쎄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와 너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요즘 들어 생각한 거지만, 보안을 더 강화해야겠어.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 이런 피라미들까지 내 구슬을 훔치겠다고 무작정 달려드니 말이야.”

침입자에 목에 손수 밧줄을 묶으며 한숨을 쉰 여 사장은, 피우던 담뱃재를 그 머리통 위에 톡톡 털었다. 하나의 눈에는 여전히 그의 모습이 단단하고 고요해 보였지만,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실제로 그를 노리는 자들의 침입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물론 ‘구슬’이라는 것이 정말로 구슬의 형태를 지녔다기보다는, 여 사장 본인의 몸에 스며있는 정기精氣의 결정체 같은 것이었으므로, 모두 도둑질에 실패하고 이렇게 그에게 손수 처형당하곤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가 은퇴의 의사를 내비친 것이 몇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굴러들어온 어린애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무리를 하시고 현장까지 뛰시다니. 하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석규의 말이 맞아. 처음에 저지하지 못하고 그냥 넘겨드린 내 잘못이다. 아직 아이는 많이 어리고, 작고, 약했다. 아무리 사장의 자식이라지만, 하나에게, 그리고 조직에게 있어 고작 그 아이 한 명과 보스의 안전을 저울질할 만큼 하나는 무르지 않았다. 역시 내가 손을 쓰는 수밖에 없나…

와당탕-!!!

쿵쾅쿵쾅!!

“…이게 무슨 소란이야?!”

갑작스럽게 터진 소음에, 예민해진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방 건너편에 있던 석규의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죄송해요, 누님! 이레가 자꾸 뛰어서…!”

“아하하하! 오빠, 이레 잡아봐라!”

“조용히 좀 시켜!”

“꺄아아-!!!"

"앗, 이레야, 잠시만…!"

쾅!

와르르-

…방금, 분명 책장 같은 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석규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린아이의 비명까지 겹쳐 들렸다. 건넛방은 분명 석규와 이레가 쓰는 이레의 놀이방이었다. 아직 한창 뛰어다닐 때인지라, 석규는 이레의 안전을 위해 뾰족하거나 위험한 물건은 모두 치워둔 상태였다. 그나마 말랑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장난감들과 많은 양의 책, 퍼즐 정도만 갖다 놓은 방이었다. 방금 난 소음도, 이레가 까르르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난 소음과 석규가 따라다니면서 낸 소리였을 텐데. 갑자기 무언가, 큰 것이 무너지면서 난 소리 이후, 시끄럽게 울리던 두 명의 목소리가 단숨에 멎었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석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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