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으…윽…”
“으아아아아아앙- 흐아아아아아아아-”
방문을 열고 들어선 하나의 시야에 잡힌 모습은, 무너진 책장과 책 더미에 깔려 쓰러진 석규와 그 옆에 넘어진 채 울고 있는 이레의 모습이었다. 한 뼘 정도의 크기로 이레는 간신히 책장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었고, 자세와 상황으로 보아 석규가 대신 책장 밑에 깔려 쓰러진 모양이었다. 평소의 석규라면 책장이 무너진다고 그대로 깔릴 리가 없었다. 민첩하기로는 조직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이었다. 설마 이레를 감싸다가 잘못해서 자신이 대신 깔린 것일까. 하나는 석규가 이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 중 하나였다. 어쭙잖은 동정심이나 느슨한 태도로 어린 이레를 대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을 사고를 어째서… 입술을 깨문 하나는 재빨리 다가가 책장을 치운 뒤 석규를 일으켜 주었다.
“석규야, 왜 그런 짓을 했어?”
그런 짓. 어린아이를 대신해 사고를 몸으로 막은 그의 행동을, 하나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는 듯, 물었다.
“하…하하… 이레가 뛰어가다가, 책장에 부딪히는 바람에… 예전부터 저 책장, 밑 부분이 기우뚱거려서 뭔가로 받쳐놨는데, 그게 빠져서 무너졌나 봐요. 저는 괜찮아요.”
하나와 석규 중 그 누구도 석규의 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인간이라면 크게 다쳤을 만한 일도 가벼운 부상으로 끝나는 정도였다. 방금 전의 사고도, 오히려 다칠 때의 충격보다 무거운 책장에 계속 깔려 있는 압박감 정도가 오히려 석규에게 괴로웠으리라. 하지만 정말 그의 행동대로, 이레가 깔리는 것보다야 어른인 석규가 다치는 일이 훨씬 나은 편이기는 했다. 하나도 석규도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긴 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한편으로는 꽤 충격적인 광경이었으므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내, 내가아… 흑, 으아아아아아아앙- 잘못했어요-”
“아으, 정말, 시끄러워서 와 봤더니, 차라리 벽 하나라도 두고 있는 게 덜 시끄러웠겠네. 괜찮으면 일어나서 얘 좀 어떻게 해 봐! 시끄러워 죽겠네. 책장도 원래대로 해 두고.”
“네, 네. 자, 이레야, 뚝 하자, 응? 나는 괜찮아. 많이 놀랐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며 눈물을 닦아주는 석규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하나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석규야, 그 애…”
“오빠아… 다쳤어?”
“응? 아, 이거? 괜찮아. 금방 멎을 거야.”
쓰러지면서 책장 모서리에 부딪힌 것인지, 이레를 달래던 석규의 흰 셔츠의 어깨 부분이, 붉은 피로 점점 젖어 들고 있었다. 고통은 크지 않겠지만 피가 흐르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었다. 아무리 영물일지라도 피를 많이 흘리는 것은 보통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에 타격이 가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 정도의 무릎이 까진 것과 비슷한 정도로 다친 상처로는, 보통의 인간이라도 생명에는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는 물론 석규도 알고 있었다. 석규가 습관대로 피 묻은 옷을 세탁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생각하는 동안, 어린 이레의 생각은 달랐다. 놀라서 울음을 터뜨린 조금 전과는 다르게, 이레의 표정은 오히려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다섯 살배기가 할 법한 얼굴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나는 생각했다. 무언가 충격적인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좀 더 공포스러운 것을 본 얼굴이었다.
…하물며 일을 하다가 정말로 죽을 만큼 피가 난 적도 있는 석규였다.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피를 본 이레는, 온몸을 벌벌 떨며 공포에 질린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안 돼…안…”
“이, 이레야, 난 괜찮아, 정말로. 이 정도는 금방…”
“안 돼… 오빠도…”
그 순간, 하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애써 괜찮다며 이레를 달래던 석규의 어깨로 손을 뻗은 이레의 손에서, 익숙한 빛과 기운이 순식간에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 느낌과 기운은, 하나도, 석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움과 경악으로 얼룩진 하나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네가….
네가 어떻게 이 힘을….
이레의 몸에서 느껴진 기운은,
여 사장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똑같은 기운이었다.
***
“갑자기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진짜라구요, 저희 말을 못 믿으십니까?!”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얘는 다섯 살이라고. 그것도 인간 나이로.”
“하지만…”
이 애는 혼혈이잖습니까. 석규가 애써 삼킨 뒷말을 여 사장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혼혈. 어느 정도의 혐오감과 배척이 섞인 말. 그리고 그 배척의 감정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정도는 모두들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석규는 그들 중에서 가장 인간을 혐오했다. 물론 이레를 잘 돌보고는 있지만… 그가 일을 하는 도중, 평범한 인간들을 보고 가끔씩 짓는 표정을 여 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의 뜻을 아직까지는 이레가 이해할 수 없을 터였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의 앞에서 대놓고 말할 만큼 그들은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나누자면 영물인 여 사장과, 그와 다른 인간의 피가 섞인 변종인 이레는 성장 과정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여 사장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럼 지금 여기서 보여주던가. 안 그래도 바쁜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거야? 조금 있다가 A재단 유 이사랑 미팅 있어서 가 봐야 하니까, 5분 안에 끝내.”
“…석규야, 잠시만.”
“네? 갑자기, 으악!!!”
잠자코 이레와 석규 뒤에 서 있던 하나가 한 발자국 나서더니, 석규의 팔을 잡고는 소매를 걷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여 사장에게 열변을 토하던 석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나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윽…! 누, 누님…! 제발 미리 말 좀 하시고…!”
“자, 꼬맹아, 아까 그거. 다시 해.”
옅은 푸른색의 핏줄이 도드라진 흰 석규의 팔뚝 위로, 하나가 순식간에 그어버린 생채기 위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잭나이프를 다시 접어 뒷주머니에 넣은 하나가, 피가 흐르는 석규의 팔을 끌어다 이레의 눈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예리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 석규가 작게 항의했지만 하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아까 그 상황을, 이 작은 아이에게 당장 재현해 내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두 사람의 헛짓거리를 지켜보던 여 사장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 앞에서 못 하는 짓들이 없구만. 석규야, 아직도 하나한테 그렇게 당하고 사냐?”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여 사장이 비식비식 웃으며 반쯤 농담조로 석규를 놀리자, 민망함에 다시 얼굴이 붉어진 석규가 대답을 우물거렸다. 하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뒷걸음치는 이레의 얼굴 앞에 다시 피가 흐르는 팔을 내밀었다.
“으…우우…”
“얼른 다시 해봐. 꼬맹아.”
다시 할 수 없다면, 네 목숨은 앞으로 내가 보장할 수 없으니까. 하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너의 그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알량한 재주가 없다면, 너는…
“…오, 오빠…아파?”
“어? 아…으, 응… 아프지?”
울망한 얼굴로 물은 이레가 석규의 팔을 살며시 잡자, 석규는 하나와 여 사장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정도로는 별로 아픈 상처도 아니었다. 이보다 더한 부상도 수십 번은 입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아픈 시늉을 하며 엄살을 피우자, 이레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눈물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다시 한번, 이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잇새로 짧은 탄식을 내뱉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양손을 모아 석규의 상처 위를 감쌌다.
“…너…”
그 순간, 지루하다는 듯 반쯤 눈을 뜬 채로 턱을 괴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여 사장이, 충격에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한 대로 확실한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 만족스러웠던지, 하나는 석규의 팔을 놓고 당당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자신의 상사를 건너다보았다. 작은 아이의 몸에서 미약한 빛이 스며드는가 싶더니, 작은 손끝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구체의 빛이 떠올랐다. 처음 보았던 빛보다 좀 더 커진 것 같았다. 석규가 그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하자마자, 따끔거리던 상처의 열감과 고통이, 시원한 감각과 함께 진정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래, 이건 아까와 똑같은…
“허, 참나…”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여 사장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시 그대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는 뚜벅뚜벅 걸어 이레에게 다가갔다. 분명 자신의 딸,이라고 했지만, 이레를 데려온 날부터 여 사장은 아이와 별다른 접촉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석규나 두식이 돌보는 것을 보면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통상적으로 ‘아버지’에게 요구되는 애정 어린 행동들이나 보살핌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직 내에 그 누구도 그런 그를 문제 삼을 깜냥은 없었으므로, 이레는 오로지 자신의 '아버지'라는 여 사장의 눈치를 보며 석규의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붙어 다닐 뿐이었다.
그런 여 사장이, 처음으로 이레에게 다가가더니 아직도 눈물을 그치지 못한 아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번쩍 안아 들었다. 공중에 들린 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레를 이리저리 물건 감정하듯 돌려본 여 사장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생각보다 쓸모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