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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63화 (63/166)

63화

“…이레의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 모양이더라. 다치고 고통받는 누군가를 낫게 해주는 일은, 그 애에게는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 물론 그전까진 너무 어렸으니까, 이레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도 다들 몰랐던 거야. 아마 이레의 어머니는 아셨을 지도 모르지.”

석규가 무릎에 앉아 손장난을 치는 이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잔히 웃었다. 누구누구 씨가 아니라 꼭 저 사람이 아빠 같다고, 영서와 친구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사장님도 무척 놀라셨었어. 아직 어린 데다, 공부를 하거나 훈련을 해서 도술을 익힐 필요도 없이 자연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재능. 게다가 그 효과도 매우 뛰어났고, 이레가 한 살씩 나이를 먹을수록 힘은 더 강해졌고.”

치유.

그 작고 작은, 혼혈의 새끼 구미호가 지니고 태어난 선천적인 능력.

이레의 능력은, 아니 정확히 말해 이레의 ‘구슬’이 가진 능력은 거의 모든 상처와 상태 이상을 치료하는 능력이었다.

특히나 외상에 잘 드는 특효약이라며 석규가 자랑했을 때는, 과격한 방식으로 애가 보는 앞에서 칼을 휘둘러 피를 낸 하나의 성질머리를 상상한 영서가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진짜 위험한 여자였다. 일단 적이 아니니까 다행인 정도랄까. 내가 뭐랬어, 그 누나 눈빛부터가 쎄하다니까.

“그리고 하나 웃긴 사실은, 하나 누님의 능력은 이레의 능력으로 상쇄된다는 점이었지. 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누님의 표정을 사진이라도 찍어뒀어야 하는데. 진짜 웃겼거든. 누님의 독 한 방울이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맥을 못 추는데, 꼬맹이 한 명이 자신을 대적할 수 있게 된 거잖아. 우리들이 얼마나 놀리고 싶어서 참았는데.”

아마 그랬으면 석규는 제 명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영서와 친구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사장님의 능력과 사업 수완 말고도, 가외수입으로 제약 부문에도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어. 사실 말이 제약이지, 그냥 국내에서는 불법인 약물을 유통한다고 보면 되거든. 물론 여러 가지 독을 제조하는 것도.”

아, 그 독은 군사용으로 쏠쏠하게 잘 사용되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석규의 태도에 주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어린애들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들은 것을 잊을 수는 없고, 본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끼어든, 거대 조직의 더러운 일면을 마주한 것만 같아 주민은 입안이 썼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챈 것인지 영서가 화제를 돌렸다.

“그, 하나 누나라는 분의 능력은 뭔데요? 본체가 살모사인 건 아는데…”

“응? 말 안 했나? 당연히 맹독이지. 우리 영물들은 인간과는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지만, 이래 보여도 영물은 영물이라고. 평소에는 독니를 숨기고 계시지만 주기적으로 연구실에 오셔서 독을 제공해 주시거든. 특히 하나 누님의 독은 아주 강력하고 다양한 부가적인 성분까지 개발해낼 수 있어서, 여러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고 있어. 물론 그 성분들을 잘 이용하면 치료제가 되기도 하고. 신기하지?”

“그, 그렇군요… 그럼 이레의 능력으로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음, 아직 좀 더 실험해 봐야 할 것들이 남긴 했지만, 지금까지 연구한 바로는 그래. 그래서 누님이 처음에는 이레를 많이 싫어했어. 하여튼 성질머리하고는… 하지만 전부는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 누님의 독은 우리가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은 연구하고 새로 개발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에 이레의 구슬이 효과가 있는지는 미지수야. 하지만 독을 퍼뜨리는 일을 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치료제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석규는 가볍게 웃더니 손가락을 들어 해강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참고로, 해강 학생이 중독되었던 약 있지? 최음 효과가 섞인 마비제야. 한 방울만 마셔도 몇 시간 동안은 제대로 거동할 수가 없어. 구슬 도둑이라는 놈도, 알고 보니 우리 거래처 중 한 곳의 수하였던 모양이야. 성분을 조사해 보니 역시 하나 누님의 독에서 개발한 약이었거든.”

“그, 그런 걸 그렇게 유통 시켜도 되는 거예요?!”

“음… 너희 눈에는 우리가 무슨 엄청난 범죄조직같이 보일 수는 있는데,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독이라는 건 곧 약이 되기도 하는 거라서.”

석규가 애매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해강이 비틀거리며 그 남자에게 업혀가던 모습이 떠올라버린 영서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석규를 노려보았다. 해강은 멋쩍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이제 괜찮다고 영서를 말렸으나, 영서는 적대감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 이해가 안 간다는 건 알아.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원래 그런 약물을 팔 생각은 없었어. 정확히 말하면 재료는 우리 쪽에서 유통된 게 맞지만, 제조법이 새는 바람에 다른 어중이떠중이 조직에서 베껴 만든 거니까. 그런 불법 강간 약물로 돌아다닐 줄은 우리도 몰랐어. 모든 약의 제조법은 사장님과 나만 아는 거니까.”

“…그러면, 해강이를 해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나 누님의 능력 덕인가요?”

“글쎄다, 이번 약은 너무 조악한 방법으로 제조된 터라 불순물도 많았고, 부작용도 있었을 거야. 원래 우리 쪽에서 만들어진 약이라면 누님의 독에서 만들어낸 거니까, 해독약도 물론 있어. 그런데 변수가 워낙 많아야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레의 구슬을 섞어 해독제를 만들었더니,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야. 이렇게 금방 깨어나고 말이야.”

“아… 이레의 구슬도 넣은 거군요. 어쩐지 평소보다 완전 컨디션이 더 좋은 기분…?”

“그거, 중독되면 안 된다. 자양강장 같은 거라 나쁘지는 않지만 중독되면 답도 없어.”

“윽…”

해강이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웃자, 석규가 농담이라며 킬킬 웃었다.

“어쨌든, 이레의 구슬이 없었다면 완전히 회복될지도 미지수였을 거야. 고마운 줄 알라고.”

“그래, 고마운 줄 알라구!”

석규의 말을 따라 외친 이레가, 석규의 무릎에서 폴짝 내려와 해강의 손을 덥석 잡고 끌어당겼다.

“어, 이, 이레야, 왜 그래?”

“그러니까 나랑 놀자!”

“아, 이레한테 단단히 찍혔네. 뭐, 어쩔 수 없나. 약값 치른다 생각하고 대충 놀아줘.”

“그, 그치만 저는 얘가 무서운데요…”

“석규 형, 왜 이레가 저렇게 해강이한테 집착하는 거예요? 그리고 해강이가 저렇게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주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석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직 몰랐구나. 이레는 보는 눈이 정확해서 말이지.”

“보는 눈이요?”

“응, 이레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해.”

“에엑--??!!!??!”

어린애가 벌써부터 너무 속물적인 거 아닙니까…?!? 황당한 대답에 입을 벌리자, 석규는 다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아, 그래도 지금까지 이레한테 제일 잘생긴 오빠는 나였는데. 이제 그 자리도 뺏겨버렸네. 하하하-”

“웃, 웃음이 나오세요?!”

“그럼 울까?”

정말이지, 족제비답게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얼굴이었다.

***

“…그래서, 여기서 왕자가 공주한테 청혼을 하는데…”

“응… 그래…”

“갑자기 공룡이 나와서 왕자를 물어가 버려! 그래서, 응, 공주님은 아빠인 왕한테 가서…”

열심히 인형을 들고 손을 움직이며 설명하는 아이의 콧잔등은 진지함으로 약간 찌푸려져 있었다. 근본도, 이렇다 할 설정도 없는 이상한 인형놀이에 참가해 얌전히 설명을 듣던 해강은 그저 중간중간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우와, 대단하다… 누가 봐도 영혼 없는 반응의 극치였으나, 어린 이레는 자신의 세계관에 심취해 그 정도는 눈치채지 못했다. 해강은 최대한 이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연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저어, 그런데 이레야, 오빠 이제 친구들한테 가 봐야…”

“안 돼!!”

“흑…제발… 오빠 이제 집에 가고 싶어… 나중에 다시 놀러 올게, 응?”

“…약속?”

“응? 그럼 그럼, 약속.”

잠자코 이레의 장단의 맞춰 놀아준 지도 벌써 1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자꾸 해강의 손을 잡아끌며 놀아달라고 칭얼대는 아이의 성화에, 석규의 사람 좋은 부탁에 못 이겨 이레의 놀이방까지 따라와 놀아주는 해강이었다. 사실 놀아줄 만한 것도 아닌 것이, 이레는 보기보다 무척 말이 많고 스스로 인형 놀이의 모든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해강으로서는 그저 반응 좋은 관객이 되어, 이레가 하는 그 이상한 공룡과 공주와 왕자와 악당이 나오는 역할극에 박수만 짝짝 치면 되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스토리의 인형극이었다. 공룡에게 잡혀간 왕자를 구하기 위해 악당과 손을 잡는 공주의 이야기라니. 사실 은근 흥미로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해강은 어느새 시계의 큰 바늘이 한 칸이나 지나갔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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