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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64화 (64/166)

64화

“아- 참 재미있었다, 그치, 이레야? 아, 아무튼, 다음에도 꼭 놀러 올게. 정말로.”

“…진짜 진짜지? 진짜 진짜 진짜루?”

“그러엄, 진짜루.”

이레는 한껏 의심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해강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마냥 어리광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아는 나이였다. 그저 아쉬움이 남아 쭈뼛거리며 일어날 준비를 하는 해강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이레가 해강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또 놀러 오는 거다? 다음에 올 때는 저기 오빠들이랑도 같이 놀래.”

“그래, 알겠어. 오빠 친구들한테도 말해놓을게. 또 놀러 와서 다 같이 이레랑 놀자고.”

배시시 뺨을 붉히며 웃은 이레가 즐거운 듯 잡은 해강의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무리 넓고 좋은 집에서 돌봐주는 사람도 많다지만, 석규의 말마따나 아무래도 이런 지하 건물에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은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해진 보호자나 양육자가 없이 여럿이서 돌아가면서 이레를 돌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레를 전속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아마 이 어린아이는, 열두 해를 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것일까. 해강은 문득 정말 즐거운 얼굴로 열심히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던 이레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이 작은 아이가 이상하리만치 무섭고 가슴을 죄어 오는 듯한 공포감까지 불러왔는데, 한 시간 내내 같이 있자니 이제는 꽤 구석구석 아이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아이에게서 해강은 언젠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감정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넓은 건물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놀며 보냈을 이레를 생각하니 해강은 살짝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또 시작이네. 눈을 감아도, 눈꺼풀에 새겨진 듯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짜증 나. 얼른 이 애와 떨어지는 게 좋겠어. 신경질적으로 눈을 비빈 해강이, 다시 웃는 얼굴로 이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잘 있어. 오빠 다시 올게.”

“…잠깐만.”

우물쭈물하던 이레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해강을 붙잡았다. 마지막까지 어리광을 부리려나 싶어, 이제는 정말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을 하려는 찰나, 이레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언가를 자신의 손안에 쥐여주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냉장고에서 넣었다 빼온 것 같은, 시원한 구슬 같은 작은 구 모양의 물건이었다. 잠깐, 구슬?

“이게 뭐…어라?”

“…이거. 이레가 준 거 비밀이야. 이레 선물. 오늘 놀아주고 얘기도 들어줘서 고마워.”

놀이방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데도, 이레는 불안하게 계속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을 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손이 전해준 것은 정말, ‘구슬’이었다. 아무리 영기가 제로에 가까운 해강일지라도, 느낌 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치료해 주었던 것. 약에 취한 자신에게, 석규가 해독제에 섞어주었던 가루. 분명 티스푼 하나 정도로 소량을 섞어주었을 뿐인데 효과는 확실했었다. 구슬을… 곱게 빻아 가루를 낸 것이라고 했지. 그 말로만 듣던 여우구슬을 실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지라, 해강은 놀란 눈으로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나, 이거 잘 만든다? 그런데 많이는 못 만들구, 오빠랑 언니들이 부탁할 때만 만들어주고 그래. 혼자서는 막 만들면 안 된다고, 석규 오빠가 그랬어. 내 마음대로 만들면 혼나…석규 오빠가 다 가져가거든. 아빠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 좋을 거야. 내가 준 거 알면 하나 언니한테 혼날 거니까, 비밀이야, 알겠지?”

“응, 고마워. 그런데… 이런 걸 나한테 줘도 돼? 오빠는 이레한테 해준 게 없는데…”

“…누가 내 얘기를 이렇게 열심히 들어준 건 처음이거든. 억지 부려서 미안해. 무섭게 만들어서도… 미안하구.”

이레는 입술을 톡 내밀며 고개를 수그렸다. 부끄러운지 말꼬리를 흐리는 아이의 뒤통수가 작고 동글동글해서, 해강은 씩 웃으며 그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오빠가 다른 언니 오빠들한테, 이레랑 좀 더 놀아달라고 부탁해 볼게. 다들 일이 바빠서 그런 걸 거야. 그치?”

“응… 나도 알아. 아빠도 항상 바빠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못 노니까. 그래도 어른이 되면, 여기서 나가서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했어. 약속했거든.”

“어른? 여 사장님이 그러셨어?”

“응! 아직은 내가 도력이라는 게 부족해서, 밖에 나가면 위험하대. 날 노리는 나쁜 인간들이 무지하게 많아서, 나를 잡아갈 거래. 혼자서도 뭐든지 잘 해낼 수 있게 되면, 아빠만큼 강해지면 나도 바깥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했어!”

해강은 어설프게 웃었다. 그가 언제든 지을 수 있던 환한 미소가, 이상하게 이레의 앞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다.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해강은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혼자서도, 뭐든지 잘 해낼 수 있게 되면? 이런 지하에, 이렇게 어린 애를 가둬놓고?

“…그렇구나. 좋겠다. 이레가 어른이 되면, 오빠들도 축하해 주러 올게.”

“응! 그치만 다음 주에 또 놀러 오는 게 먼저야, 약속!”

“하하, 다음 주는 조금 힘들고…”

이레와 손가락을 걸며 약속한 해강이, 이레를 영차 안아 들고 방문을 나섰다. 응접실 겸 사무실이 있던 방향으로 걸어가며, 해강은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묘하게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이레가, 손을 들어 해강을 볼을 잡아당겼다.

“아, 아야, 이레야!”

“그런 얼굴 안 돼! 웃어야지!”

“하하, 그래, 그럼. 잠깐 오빠가 딴 생각을 했네.”

“…오빠, 이레가 준 구슬, 잘 갖고 있어야 돼?”

“응, 지금도 주머니에 잘 넣어 놨는걸.”

“그렇게 말구~! 아무도 못 훔쳐 가게, 나쁜 사람들이 모르게 꽁꽁 잘 숨겨놔, 알겠지?”

아이의 가벼운 어리광에 고개를 끄덕이며 해강은 저 앞쪽에 보이는 사무실로 다가갔다. 아마 사람들은 아직까지 여기에 있겠지. 여 사장님은 오셨나. 아직 인가. 그렇다면 영서와, 주민이가 있겠지… 한 시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다시 피곤한 것이 영서의 얼굴을 보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해강이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오빠, 이레가 준 구슬, 꼭 소중한 사람한테 써.”

“…응?”

“…나중에, 필요할 거야.”

해강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이레가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힘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상하게 힘이 빠진 것 같은 모습에 해강은 알았다며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소중한 사람.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르지.

오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러나 해강은 알고 있었다.

이 구슬을, 언젠가는 써야 할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영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의 해강이,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한 뒤 사무실의 문을 열며 활짝 웃었다.

***

“오랜만이구나, 이 되먹지 못한 여우 놈.”

“할망구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 거 보소. 작년 추석에 보낸 사골은 푹 고아 먹었나?”

“흥, 뒷마당에 백구한테 다 줘버렸다. 그게 어떤 돈으로 산 건지 내가 모를 줄 알고.”

“에이, 또 꼬장 부리기는. 그래도 이렇게 얼굴 비친 건 오랜만인데, 아직 정정하네, 그래?”

여 사장은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양반다리를 한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실실거렸다.

그리고 그와 마주하고 앉은 정혜사의 주지이자 영서의 고모할머니인 권영숙.

영숙과 여 사장은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오랜 친우이기도 했다.

여 사장이 영서와 친구들 앞에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해강과 이레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묘하게 개운한 얼굴로 가뿐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선 여 사장의 낯빛은 전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맑아 보였다.

“여- 다들 이쪽에 모여 있었네? 많이 기다렸나?”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겁니까, 사장님? 손님을 너무 붙잡아 두는 것도 실례라구요.”

“하하, 미안하네.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 그래도 이제는 완전히 구슬도 되찾았고, 몸 상태도 회복했으니까 걱정 마라.”

“몸 상태요?”

“아, 말 안 했었나? 구슬을 도둑맞고 지난 몇 달간, 나는 거의 반 좀비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냈다고 보면 되거든. 보통 상태가 100%의 힘을 낼 수 있다면, 구슬이 없어진 순간부터 이미 반절은 깎아먹고 시작한다고 보면 돼. 게다가 몸에 구슬이 오래 비어있으면 있을수록 더더욱 기운이 딸려. 거 참, 맨날 잠이 쏟아지고 힘도 약해져서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여 사장은 어제와 달리 어딘가 기운부터가 달라진 사람 같아 보였다. 분명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말투나 눈빛, 목소리의 세기 정도가 확연히 달라져, 정말로 원기라도 양껏 회복하고 온 사람 같았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달라진 여 사장을 올려다보던 주민이 물었다.

“그럼 잠옷 차림으로 계셨던 것도…”

“아, 어제? 그거야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이레를 재우려고 같이 부녀지간에 커플 잠옷도 입고, 오붓하게 책도 읽어주고 그랬던 거지. 이런, 아직까지 잠옷 바람이었구만, 나.”

“아빠가 먼저 잠들었잖아!”

“네가 늦게 잠든 거지.”

“사장님, 어제는 이레가 정말로 기대했었다구요? 오랜만에 아빠가 책을 읽어준다고, 그런데 책을 펼치시자마자 코를 골면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이레가 많이 삐졌잖습니까.”

“에잉, 좀 봐달라고. 구슬이 없어서 안 그래도 기운도 없는데, 그렇게 글자가 많은 걸 어떻게 읽어?”

“…동화책이었잖습니까.”

하나가 한심하다는 듯 덧붙이자, 여 사장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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