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65화 (65/166)

65화

"너는 어째 애가 한 마디를 안 지냐?"

"제가 져 드리기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사장님도 갈 데까지 가셨군요."

"저, 저저 봐, 저 성질머리. 하여튼!"

하나와 투닥거리던 여 사장은 곧 밝은 얼굴로 영서와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말이지, 이번 일을 도와준 너희한테 보답을 해야겠단 말이야. 지금까지 기다려줘서 고맙네.”

“아하하, 아뇨, 별로 보답이랄 것까진…”

“맞아요, 저희는 그냥 이제 집에…”

“으음~ 안 돼, 안 돼. 아직 해도 뜨지 않았다고. 이런 새벽에 어린애들끼리 보낼 수야 없지. 일단 방을 내줄 테니 하룻밤 푹 쉬고 내일 밥까지 먹고 가라고. 또 선물도 줄 테니까. 알겠지?”

“예??!?”

“…왜, 싫어?”

여 사장이 싸늘하게 묻자, 영서와 친구들은 입을 합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감히 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잘못하다간 이 구미호 남자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 하직하는 수가 있는데… 필사적인 웃음을 짓는 아이들을 보며 여 사장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치? 그럼 자고 가는 거다? 석규야, 가서 손님 방 좀 준비해 줘라. 애들 입을 잠옷도 주고."

"네."

얼떨결에 기에 눌린 나머지 자고 가는 것까지 동의해버린 아이들은, 그저 진땀을 흘리며 석규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여 사장님, 잠옷에 뭔가… 독특한 철학이 있으신 걸까."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보통 이렇게까지… 잠옷을 많이 준비해놓는 사람이 있나 해서."

주민의 질문에 단추를 잠그던 영서가 심각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하긴 그렇지. 조금 전, 석규를 따라 방과 욕실을 소개받은 영서와 친구들은, 석규의 제안으로 입고 있던 옷을 세탁하기 위해 갈아입을 새 잠옷을 받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석규가 연 옷장 안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옷장 전체가 잠옷으로 꽉 차 있었는데, 그 종류는 가히 잠옷 백화점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디자인은 물론 사이즈와 재질, 무늬와 색에 따라서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뜨악한 표정의 아이들과는 달리 석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웃으며 새 잠옷들을 꺼내주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들만 득실득실한 소굴이구나… 대체 왜 그렇게까지 잠옷에 집착하는 건지.

“그런데 영서야, 아직도 안 보여?”

“응?”

“그 왜, 우리 처음에 여기 잡혀왔을 때 귀신들이 안 보인다고 그랬잖아. 아직도 그러나 해서.”

여 사장의 배려로 영서와 친구들은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한 넓은 방을 배정받았다. 최상층이라고 해 봤자 내내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가야만 하고,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데다 7층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영서는 답답하고 눅눅했던 지하를 벗어나 상층으로 올라오니 살 것만 같았다. 왠지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의 야경을 따라, 공기까지 탁 트인 것 같은 느낌. 방은 침대와 빈 옷장 하나, 카펫 하나만이 깔려있는, 별다른 주요한 가구들은 없이 휑하니 넓기만 한 방이었으나, 그래도 먼지 하나 없이 잘 관리되고 있는지 은은한 아늑함과 사람의 손길이 곳곳에 닿은 티가 나는 곳이었다. 게다가 방 한 면은 전부 통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바깥의 풍경이 보인다는 점이 영서는 좋았다. 예상한 대로 이 이상한 건물은 산속에라도 지어진 건지, 시내의 불빛은 멀고 그 대신 어슴푸레한 산과 나무들만 빼곡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욕실에서 차례로 몸을 씻고 나오자, 석규가 마침 커다란 침구를 켜켜이 쌓아 든 채 방문을 두드렸다. 침대가 하나라서 그냥 바닥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네. 미안, 지금 비어있는 손님용 방이 여기 하나뿐이라서. 대체 왜 이런 곳에 다른 손님 방들이 공실이 아닌지 의아했지만, 영서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아…!

그런대로 바닥에는 훈기가 감돌았고, 깨끗한 바닥에 푹신하고 두터운 토퍼와 이불을 깔자 꽤 포근한 잠자리가 완성되었다. 셋이서 나란히 자리에 누우니 영서는 그간 일어난 일이 고작 이틀 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 누적된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물가물 천장의 무늬를 세며 눈을 끔벅이는 영서의 옆에서, 주민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직도 보이지 않느냐’고.

“그러고 보니, 이 건물에 있는 동안은… 그랬던 것 같아. 사실 아까 도둑을 잡으러 클럽이랑 술집 골목에 갔을 때는, 정신도 없고 사람도 많아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보였던 것 같아.”

그랬다. 분명 영서의 기억대로라면, 술집 Black Cherry와 클럽 거리에는 빼곡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귀신으로 추정되는 영체들이 보였다. 하도 정신이 없고, 게다가 술까지 마신 뒤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다시 이 건물로 돌아온 후부터는 또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있지… 아까 두식이 아저씨가 석규 형이랑 얘기하는 걸 잠깐 들었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영서 네 능력이 이 건물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어,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뭐라고 하지, 꼭… 이 건물에 차단기 같은 게 있어서, 이 안에만 들어오면 능력이 팍, 하고 꺼지는 느낌?”

허공에 손을 흔들며 영서가 맞장구치자, 주민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불을 켰다.

“영서야, 우리 한 번 나가서 건물 좀 돌아볼래? 지하 층만 다녀봤지, 지상 층으로 올라온 건 처음이잖아. 그것도 내내 석규 형이 따라다니고. 뭔가 이상해.”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자. 그냥 자고 내일 아침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

어쩐 일인지, 조금 딱딱해진 말투로 해강이 영서보다 먼저 대답했다. 팔을 괸 채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해강이 피곤한 얼굴로 마른 세수를 하며 덧붙였다.

“있지…. 음, 솔직히 말하면 영서는 그 능력 때문에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고 이리저리 많이 휘둘려 왔잖아. 이 건물에서 나간다고 다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난 오히려 영서가 ‘안 보이게 된’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든.”

“뭐? 야, 그래도…”

“영서야, 너는 다시 보고 싶어? 다시 귀신들이 보여도 괜찮아?"

"나? 나는…"

때아닌 진지한 질문에, 영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안 그래도 피곤해서 느릿느릿 돌아가던 머리가, 순간적으로 과부하를 일으킨 듯 삐걱대고 있었다. 바보같이 어, 나? 같이 되묻기만 하며 멍하니 있자, 주민이 대신 대답했다.

“그건 영서가 결정할 일이지. 솔직히 난 영서랑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영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건 인정해. 그리고 영서가 항상 그런 일들 때문에 힘들다는 것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영서에게 주어진 능력이잖아. 힘들 수도 있지만, 분명 쓸모가 있는 거야. 볼 수 없는 사람에 비하면 볼 수 있는 쪽이 더 나은 건 당연하잖아.”

“귀신이니 뭐니 그런 것들 봐서 뭐 하게? 주민이 너야말로 그딴 것들을 계속 보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나 알아? 그건 능력이 아냐. 그리고 영서가 그만하고 싶다면 이대로 안 보면서 사는 게 맞아.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

“…”

해강의 단호한 대답에 주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딴 것들. 그래, 그딴 귀신들, 산 것들에게 하등 도움도 되지 않고, 봐 봤자 좋은 것 하나도 없는. 이상한 일에나 휘말리고, 괜히 귀찮게 남들 일에 얽히기나 하고. 영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딴 것들 봐서 뭐해? 안 볼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냐?

하지만 영서는 주민의 눈가에 고인 괴로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볼 수라도 있다면.

‘영서야!’

이상하게 그 순간, 왜 반갑게 웃던 주희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영서는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 아래, 더 깊은 곳 어딘가에서 꽉 막힌 감정이 우글우글하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영서는, 주민이 야속하리만치 주희와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인 줄은 알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영서는 입이 썼다.

"…."

"…."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영서의 목소리였다.

“…얘들아, 나 피곤하다. 일단 자자.”

“…응, 미안해. 내가 괜히…”

“아냐, 주민이 네 말이 맞아.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 건물에 대해 조사해 봐야겠어.”

“영서야.”

“주해강 네가 걱정하는 건 아는데, 네 말대로 나한테 일어난 일이야. 그리고 난 이 능력을 거저 받은 게 아니라, 한 가지 약속을 했어. 말하기는 좀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능력을 되찾아야만 해. 그래서 내일 여 사장님한테 직접 물어볼 생각이야. 분명 그 사람들이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거겠지.”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해강은 별다른 첨언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주민이 불을 끄자, 영서도 다시 푹신한 베개에 고개를 뉘었다.

영서는 그날 밤, 기억도 나지 않을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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