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66화 (66/166)

66화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힘이 세고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한 멋진 구미호가 살았습니다.”

“…저기….”

“집중해라.”

“아, 넵.”

“다시, 흠흠. 아무튼, 그 구미호는 못하는 게 없었답니다. 도술이면 도술, 지혜면 지혜, 게다가 재치와 센스, 미모까지??! 600년 넘게 산 연륜과 더불어, 백두산부터 한라산 할 것 없이 그의 이름만 들으면 모든 동물들이 다 고개를 조아릴 정도였죠.”

“…영서야, 이거 언제까지 들어야 해?”

“쉿…!”

“그러던 어느 날…!! 바람 잘날 없던 이 작은 땅덩어리 위에서, 또 전쟁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동안 구미호는 인간들 틈에 숨어들어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곤 했지만, 이번에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구미호조차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구미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산속으로 숨어버리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한 삼십 년 정도 잠이나 쿨쿨 자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구미호가 무슨 겨울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영서와 친구들은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어깃장을 놓아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므로 일단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뿔싸! 구미호는 너무 자버린 나머지, 생각보다 늦게 잠에서 깨고 말았어요. 잠잠해진 사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제 전쟁이 끝나서 인간이 다들 죽어버렸거나 아니면 평화롭게 다시 사는 거라 생각하고, 산에서 슬렁슬렁 내려와버렸죠. 그런데 그 순간!!!”

“그 순간?!?”

“이레야, 조용히 해야지…!”

“그 순간…!!! 아뿔싸, 웬 쇠로 된 동그란 부분을 누르자마자, 갑자기 펑!!! 하고, 폭탄이 터져 버린 겁니다!!!”

“이야~ 그때는 진짜 뒈지는 줄 알았지.”

“사장님, 이레가 듣습니다.”

“그래요, 지뢰였습니다! 인간들의 전쟁이 끝난 후, 아직 제거되지 못한 온갖 지뢰와 폭탄들이 산과 들 이곳저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겁니다! 구미호는 생각지도 못한 부상을 입고 말았어요. 원래의 그였다면, 그 정도 폭탄의 냄새는 이미 맡았을 테지만, 너무나 오래 자버린 탓에 감각이 약해져 버린 거죠. 그 후에 있는 지뢰들은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처음 맞아버린 폭발이 너무 컸던 지라, 구미호는 결국…”

“으아앙- 죽으면 안 돼, 구미호!”

“이, 이레야, 아빠 여기 살아 있는데요? 여기? 있어요? 응?”

“죽으면 안 돼-!!”

“…다행히, 목숨은 부지한 구미호는, 피를 흘리며 민가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갔습니다. 본 모습을 숨기고 그저 다친 인간인 척 변장하면, 누구든지 일단 치료해 줄 것이었으니까요. 다행히 멀지 않은 산어귀에 작은 절이 있었습니다.”

“…절이라면…”

“절의 이름은 정혜사. 구미호는 못 보던 절이 생긴 것을 알고, 부상당한 청년인 척 변장해 절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심한 부상을 입었으니 도와달라- 고 말이죠.”

정혜사.

익숙한 이름에 영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여 사장을 돌아보았다. 두식에게서 이레를 건네받아 무릎에 앉힌 여 사장이 영서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절의 문을 열고 나온 것은, 한 소녀였습니다. 어른은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구미호는 급한 대로 소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설마, 그 소녀라는 게…”

“소녀는 구미호를 치료해 주고, 며칠 절에서 묵게 해주며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병환으로 몸져누운 지 오래였기에, 소녀는 환자를 간병하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거든요. 아무튼 읍내에서 의원도 불러오고, 산에서 나는 온갖 좋은 약초도 달여 먹이고, 소녀의 극진한 간호로 구미호는 다시 몸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영서는 침을 삼켰다. 분명, 영서가 기억하는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지만,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 이야기는…

“완전히 몸을 회복한 구미호가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소녀여, 자네의 극진한 간호에 감동을 받았다네. 나는 사실 이 뒷산의 터주이자 영물인 구미호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 말해 보거라.’하고 말이죠.”

“와, 사장님 무슨 산신령 같네요.”

“흠, 흠.”

“그러자 소녀가 말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구미호님만이 들어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뭐지…?”

마치 인형극이라도 하듯 주거니 받거니 혼자 상황을 재연하던 석규는, 마이크를 붙잡은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짧고도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동안, 석규가 다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이 구미호 자식이, 조금 떼어주면 어디가 덧나냐!!!”

영숙, 16세.

“이 인간이 미쳤나, 진짜!!! 이거 안 놔?!?! 세상천지 어느 구미호가 제 간을 떼주겠냐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우리 주지 스님을 살리려면 네 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인간의 간은 그렇게도 떼먹더니, 네 간 조금 떼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더냐?!!?”

“아아니, 그러니까 보통은 조금이건 많이건 상관없이 간을 떼주면 죽는다니까?!?! 아아악, 꼬리 잡지 마!!!”

여 사장, ???세.

“아이고오, 주지 스님!!! 우리 주지 스님 불쌍혀서 어째, 아이고오~!!! 이 구미호 놈, 털이라도 몽땅 불에 그슬려야 말을 듣겠느냐!!!”

“악, 아아악!!! 꼬리 놓으라고!!! 이 새파랗게 어린 인간이 정말!!”

석규가 들려준 영웅담과는 조금 다른, 과거의 이야기.

***

이 괴상망측한 인형극을 보기 한 시간 전.

“모두 좋은 아침~”

“사장님, 오늘 오전 내내 먹구름이 낄 예정입니다.”

“그래? 뭐 그럼, 그저 그런 아침~”

…개그 하는 거야, 지금? 영서는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여 사장의 성격에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애초에 저런 사람이었다는 거잖아? 구슬을 되찾은 여 사장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 극과 극의 텐션인 인간이었다. 원래도 잘 웃고 시답잖은 장난을 잘 치기는 했어도, 뭔가 그쪽이 더 유순하고, 나른한 느낌… 확실히 그 구슬이라는 거, 없으면 기운이 빠진다는 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영서와 친구들은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한 뒤 두식의 손에 이끌려 아침까지 꼭꼭 챙겨 먹고 사무실에 앉아 여 사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그게 뭐지?”

여 사장은 한 팔로 이레를 안고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제일 상석에 위치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그의 물음에 영서와 주민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주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일이 다 끝나셨으니까 이제 하는 말인데요, 영서의 영안에 대해서 아는 게 있으신 거 같아서…”

“아, 맞다. 너 귀신 보는 놈이었지? 어때, 아직도 안 보이냐?”

“그게…. 네.”

“거참 이상하네, 우리도 딱히 짚이는 점은 없단 말이지. 애초에 너를 데려온 것도 우리가 못 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놈일 거라고 생각하고 데려온 거라서. 어찌 저찌 능력이 없는 상태로도 일을 잘 도와줘서 고맙긴 하지만, 우리도 갑자기 네 능력이 사라진 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게요, 분명 어제 클럽이랑 술집에 있었을 때는 분명… 다시 보였던 것 같아요. 사람도 워낙 많고 어두운 데다 저도 제정신이 아니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그런데 지금은 다시 안 보이고?”

“…네.”

정확히는, 이 건물에 들어오면 안 보이게 되는 것 같았지만. 왠지 영서는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렇다면 뭔가 차이점이 있을 텐데… 아.”

턱을 쓰다듬던 여 사장이 작은 탄성과 함께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어쩌면 말이다. 영서 네 능력은 사라진 게 아닐 수도 있어.”

“예? 그게 무슨?”

“음, 그러니까… 네가 ‘못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볼 수 있는 게 없는’상태가 된 거라는 말이지.”

“볼 수 있는 게 없다뇨? 무슨 뜻이에요?”

영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못 보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볼 수 있는 게 없는 것뿐이라니. 어디를 가던, 언제나 영서의 오감의 끝에 거슬리던 감각들이었다. 영혼을 볼 수 있게 된 후부터, 영서는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로 수많은 귀신과 영들을 보고, 그들의 흔적을 느끼고, 항상 곁에 존재함을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흔적을, 이렇게 쥐구멍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봉해놨다는 것인가?

…잠깐만.

봉해 놨다는 건….?

“…음, 내가 너희들에게 할 얘기랑 어느 정도 맞닿은 얘기이기도 할 테니, 일단 보여주고 설명해 주는 편이 더 낫겠다. 두식아, 이레 좀 방에 가서 재워. 나는 얘네 좀 데리고 그 방에 갔다가 올 테니까.”

“‘그 방’이라니요?”

“형님, 하지만 그분께서 당분간은 위험하다고…”

“그 손자가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손자라니.

설마…

영서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여 사장을 올려다보자, 영차, 하고 일어나 허리를 툭툭 치던 여 사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줄 선물이 있다고 했지?”

“…아, 네… 그치만…”

“내려가서 보면 알 거다. 친구들도 따라오려면 오고. 그런데 음… 너희들은 안 오는 게 좋을 지도.”

“사장님, 혹시 모르니 이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으니까요. 석규가 해강과 주민의 어깨를 양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차하면 저희라도 살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릴 두고 튀겠다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하하… 하지만 뭐… 산 사람은 사는 쪽이…”

“저, 저기요 사장님. 저희 지금 무슨 저승에라도 가는 건 아니죠?”

의미 모를 대화를 하는 여 사장과 석규를 번갈아 보던 영서가 급하게 묻자, 여 사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영서의 어깨를 단단하게 쥐었다.

“하하하, 저승은, 임마.”

그러나 순간, 여 사장의 눈에 얼핏 어두운 기색이 스친 것은, 영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위험한 곳이지.”

“…”

…이 인간들은 무슨…

지하에… 원자로라도 설치해놓은 건가….

영서가 할 말을 잃고 여 사장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서자, 주민과 해강은 안절부절 하지 못한 채 서로만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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