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래서, 그 선물이라는 게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보면 안다니까, 미리 말하면 기대감이 없잖냐, 임마.”
여 사장은 능글능글 웃으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수많은 버튼 중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한 버튼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자주 눌린 다른 버튼들에 비해, 그 버튼 하나만은 유독 새것으로 교체한 것 같이 반짝거릴 정도로 멀쩡했다. 영서는 찝찝한 기분에 여 사장에게 눈을 흘기며 엘리베이터의 숫자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숫자는 곧 지하에 도달했고, 사무실이 있던 지하 3층보다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더 깊은 지하에는 무슨 방들이 있는 걸까. 이상한 연구실이라든가… 영서는 도무지, 그 위험하다는 ‘방’이 대체 어떤 곳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까… 제 능력이, 지금 가는 방이랑 연관되어 있다고 하셨죠.”
“음… 따지자면 그렇겠지.”
“…혹시, 사장님도… 제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아세요?”
“….”
여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애매한 웃음만 싱글거리며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추측 정도는 하고 있긴 하지만…”
“…뭔데요?”
“글쎄다, 그쪽은 내가 관여하면 안 되는 분야라서 말이지.”
“예?”
대체 무슨 알다가도 모를 소리인지. 그 순간, 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일직선으로 난 짧은 복도의 끝에, 문이 하나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가…”
“으음, 아직은.”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문이었다.
그러나 손을 내저은 여 사장은 주머니에서 카드 키를 꺼내더니 문 옆에 달린 조그마한 패드에 갖다 대 잠금을 해제했다.
삐리릭-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잠금장치가 있네요…?”
“음, 아무래도 그렇지.”
이제 그 방인가…! 왠지 긴장되는 기분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 사장의 등 뒤로 숨은 영서가 침을 삼켰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엥?”
문이 열린 복도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영서를 맞이하고 있었다. 허탈한 소리를 내며 문을 바라보자, 여 사장이 턱짓을 했다.
“카드 키 같은 쉬운 잠금으로만 해 놓으면 누가 침입하기 딱 좋지. 당연히 이중 삼중으로 보호해놔야 한다구?”
“그렇군요…”
문은 조금 전의 평범한 문보다 좀 더 무겁고 굳세어 보이는 철로 된 문이었다. 똑같은 패드가 붙어 있는 문에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치는 여 사장을 보며, 영서는 내 앞에서 비밀번호를 보여줘도 되는 건가, 하는 아리송한 기분에 휩싸였다.
띠리릭-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조금 전의 기계음과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다. 특이하네. 영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 사장의 뒤로 따라 들어갔다.
“…사장님, 혹시…”
“엉?”
“…지금 저 데리고 장난치시는…?”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간 문 너머에는, 역시나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이 정도쯤 되니 영서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뭘 모른다고 장난을 치는 건 아니겠지?
“하하, 장난이라니, 고놈 참 속고만 살았나.”
먹을 거에 약 타서 사람 납치해 온 인간한테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까도 말했잖냐,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라 이렇게 다중으로 잠금장치를 해 둘 수밖에 없어. 이제는 정말 마지막 맞아.”
확실히 정말로, 이번에는… 아냐, 이래 놓고 또 마트료시카처럼 문이 더 나올지도…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을 흘겨보는 영서의 어깨동무를 한 여 사장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마지막 문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마지막 문은 이전 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도 크고, 단순히 손으로 밀어서 열 수 없게 생긴 기계식 문 같았다. 문의 높이를 올려다보며 방의 크기를 가늠해 본 영서는, 문 옆에 달린 패드의 버튼을 누르는 여 사장의 어깨너머를 건너다보았다.
삑-
-코드를 입력해 주십시오.
“오, 이건 진짜 사람 목소리 같네요.”
“코드 나인. 비밀번호는 F-1-n684.”
의미 모를 알파벳과 숫자의 나열을 대자,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잠시 꺼진 듯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사장님, 확인되셨습니다. 이제 잠금을 해제해 주십시오.
“에? 방금 게 끝 아니에요?”
“먼저 신원 확인을 거친 다음에, 내 생체 정보로 잠금을 푸는 거야.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조직원은 단 9명이지. 비밀번호는 각자만 아는 랜덤 숫자로 한 달에 한 번씩 정하고 있고, 이 위에 달린 카메라가 1차로 신원을 확인하고, 코드와 비밀번호로 2차 확인, 마지막으로 이 패드에 내 생체 정보를 입력해서 최종 잠금을 풀도록 되어 있어.”
참으로 복잡한 설계였다.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비효율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영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여 사장이 이번에는 자신을 또 골탕 먹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패드에 불빛이 들어오자, 점선으로 손바닥 모양이 희미하게 새겨졌다. 여 사장이 그 위에 손바닥을 올리자, 패드의 불빛이 반짝거리며 손바닥을 스캔하는 것이 보였다.
-확인되었습니다. 입장을 허가합니다.
“네, 네~ 수고가 많아요, 항상~”
“이 목소리, 진짜 사람이 녹음한 거죠?”
-저는 녹음이 아닙니다, 영서 님.
“으아아아락??!?”
“응? 녹음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야. 상층에 정보부 실이 있거든. 거기 있는 애들 목소리지.”
실시간으로 감시 중이거든. 하하 웃으며 패드에서 손바닥을 뗀 여 사장이 말하자, 스피커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분명하게 기계는 아닌 듯 했다.
“사빈아, 우리 들어가고 나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다시 잠금 복구시켜라.”
-네, 사장님.
“혹시 누가 동시에 들어오면 곤란하거든. 물론 나 말고 이딴 곳에 들락거릴 애들은 없지만.”
스피커 너머의 대답과 함께, 육중한 기계식 문이 땅을 울리는 소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지진이라도 나는 것 같네. 이런 걸 위해서 사장님은, 본거지를 지하까지 파 놓으신 걸까. 영서는 사장을 따라 들어가며 생각했다.
문 안은 캄캄했다.
그러나 제일 안쪽에 밝혀진 하나의 조명을 따라 어렵지 않게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뒤로 닫히는 문의 소리는 열릴 때보다 더욱 무겁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영서는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하나의 조명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단 하나의 조명이 비춘 유리관을 보았다.
가로 세로 1미터도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관은, 수십 명의 사람이 들어가도 될 만큼 커 보이는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방의 주인공이었다. 투명한 유리관은 마치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보석을 보관하고 있는 전시대라도 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고, 영서는 마치 홀린 듯 조금씩 다가갔다. 여 사장은 문 안에 들어온 후부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기분이… 이상했다.
이 기분을… 어디에선가, 언젠가 분명 느껴 본 적이 있는데.
언제였지?
천천히, 유리관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영서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비명 비슷한 것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이건… 분명히…
어두운 조명 속, 유리관 안에는…
창백하게 빛나는 진주알이 장식된, 작은 거울이 들어있었다. 손거울보다 좀 더 큰 크기의 거울. 그래, 마치 옛날 귀부인들이 쓸 법한 경대鏡臺였다. 흰빛을 은은히 쏘아내는 진주알과 자개 장식이 돋보이는, 예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흐르는 보물 같은 생김새의 특이한 거울이었다.
“거울…”
“….”
이렇게 큰 방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잠금장치를 해 놓고 지키고 있는 게, 고작 이 거울 하나라고?
영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았다.
본능적인 직감으로 알 수 있어.
여 사장은, 내 비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걸.
***
“그래서, 이런 인형극을 보여준 이유가, 우리 할머니랑 사장님이 과거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랬다는 거예요?”
“딩동댕~”
“참 나… 할 짓이 없어도 유분수지…”
“우와, 사장님 지뢰도 밟아봤어요? 대박이다.”
“그럼 그럼, 안 그래도 그때 입은 흉터가 남아있는데, 볼래?”
“이레도! 이레도 볼래!”
허술한 인형극을 빙자한 여 사장의 과거 이야기가 끝난 후, 관객들ㅡ이자 그저 영서와 친구들, 그리고 여 사장 패거리 정도 뿐이었지만ㅡ은 와글대며 저마다 하고 싶은 얘기만 해대기 바빴다. 이레는 간만에 본 인형극에 흥분했는지 방방 뛰면서 즐거워했고, 주민과 해강마저도 마치 재미있는 옛날 얘기라도 들었다는 듯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오직 한 명, 영서는 갑자기 머릿속으로 몰아치는 수많은 정보들에 입을 다물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보여준 그 거울.
여 사장이… 우리 고모할머니와 아는 사이란 말이지.
이상할 것도 없는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그렇구나, 하고 납득만 할 수는 없었다. 영서는 그 사고 이후로 언제나 혼란스러웠고 명확한 대답을 원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영서에게 확실한 대답을 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 그 망할 저승사자도 말이다. 여기서 또 왜 그 인간, 아니 그 저승사자 생각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서는 입을 내밀고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언젠가, 일직차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해야 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모두를 믿지 마.
영서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