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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69화 (69/166)

69화

영서의 의심스러운 표정에, 여 사장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으음,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네. 그런데 정말 내 거 아니야. 영숙이 부탁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보관해 주고 있는 건데, 너무해~”

“…갑자기 낯선 사람이 너희 가족과 아는 사이다~라고 하면 누가 믿어요?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니고. 저는 그런 걸 덥석 믿기엔 나이가 많거든요.”

“그래 봤자 18살 먹은 주제에. 그런데, 아직도 내가 낯선 사람인가? 이상하다, 분명 체감 상 우리가 만난 지 며칠 치고는 훨씬 오래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이 인간이 이제는 메타 발언까지…?!

“무슨 소리예요… 아무튼 그렇게 중요한 거면 지난번에 할머니가 저한테 먼저 말씀하셨겠죠. 한 번 뵈고 왔었는데, 그 거울에 대한 건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고요.”

영서가 툴툴대며 몸을 돌렸다. 이따위 기분 나쁜 방에서 얼른 나가버리는 게 상책일 듯했다. 그러나 여 사장은 예의 그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이상하네~ 혹시 그 뒤로 영숙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다시 한번 찾아오라고 하지 않던?”

“….”

“어? 진짜네? 반응 되게 알기 쉽다, 너.”

“…그,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나랑 같이 가면 되지.”

언제 소리도 없이 다가온 것인지, 여 사장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며 싱긋 웃었다. 영서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여 사장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톡톡거리며 뭔가를 입력하는 듯하더니,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영서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애들한테 차 대기시켜 놓으라고 했어. 나가면 바로 타고 갈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오랜만이네 정말~”

“저는 집에 갈…!!”

“안 되지, 안 돼. 내 ‘선물’은 받아주고 가든지 해야 할 것 아냐?”

“그치만…!”

이가 보이도록 씨익 웃는 여 사장의 얼굴은, 이상하게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주해강 같이 화려하게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건만, 사람의 시선을 계속 잡아 끄는 인상. 가로로 길게 난 눈매가 곱게 휘어지며 웃자, 영서는 왠지 반박할 힘이 쑥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하여튼 여우 같은 인간.

“가자, 영숙이한테!”

…정말, 제멋대로인 구미호다.

영서는 반쯤 포기한 채 여 사장에게 어깨를 붙잡힌 채 끌려가며 생각했다.

***

“…그래서, 영서 네 고모할머니하고 사장님하고 아는 사이였다는 거야?”

“으응… 나도 몰랐어… 그보다 진짜 아는 사이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와… 대박… 그럼 지금 영서 할머니 네로 가는 건가?”

작게 목소리를 낮춘 주민이 묻자, 영서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정 열 명도 싣고 달릴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봉고차 안.

운전석에 탄 두식과, 조수석에 탄 여 사장을 필두로 차의 뒷좌석에는, 불편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하도 이레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여 사장도 두 손 두 발 다 든 지라, 해강의 무릎에 앉은 이레가 손장난을 치며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중이었고, 그런 이레의 장단에 맞춰주며 굳이 따라나서겠다고ㅡ여 사장을 혼자 보내기엔 아직 위험하다는 것이 하나의 주장이었다.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ㅡ따라 탄 석규와 하나,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옆에 주민과 영서가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분명 넉넉한 봉고차가 이렇게 좁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하나의 따가운 눈초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영서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레는 소풍이라도 떠나는 줄 아는지 거의 방방 뛸 듯이 좋아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해강의 무릎에 앉아 석규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꼬마를 보니 영서는 괜히 심사가 뒤틀릴 것 같았다. 어린애들은 속 편해서 좋겠다, 아주… 주해강 저 새끼는 뭐가 좋다고 실실거려?

하, 됐다.

추해지지 말자, 권영서. 어린애한테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엥?

…질투?

순간 물기를 터는 강아지마냥 고개를 세차게 내저은 영서를 주민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괜찮냐고 묻는 주민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하, 나, 나도 참… 무슨…

…질투는 무슨. 진짜.

영서는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생각할 거리를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해강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 인간들하고 일만 해결되면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건데, 상관없었다. 주해강은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항상 보니까…

아, 왜 자꾸 이딴 생각만 하는 거냐고, 나는!!!

속으로 포효하며 영서가 머리칼을 쥐어뜯든 말든, 선글라스까지 멋지게 쓴 여 사장은 내비게이션을 보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얘들아, 밖에 풍경 좀 봐라, 멋지지?”

“이레도! 이레도 볼래!”

“우와악, 이레야, 오빠들 밟으면 안 돼!!”

“이, 이레야, 얌전히 있자, 응?”

아빠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한 이레가 팔을 버둥대며 창가에 다가가려 애를 쓰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주민이 이레를 넘겨받아 안으며 진정시켰다. 창문을 내려 시원한 바람까지 맞도록 해주자, 이레는 고개가 떨어질 듯 열린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탄성을 질렀다.

“우오아아아아아!! 완전 멋있어!!!”

정혜사가 위치한 보명保命산이, 저 멀리서 보이고 있었다.

“이 육시럴 여우 놈, 여긴 뭣하러 온겨?”

“영숙이 오랜만이다~ 관절에 바람은 좀 덜 차고?”

“에라이, 이놈 자식이!”

“하하하~ 아직 기운도 쌩쌩하네~얘들아, 이쪽이다! 빨리 와!”

앞서간 여 사장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저 인간은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걸음이 왜 이리 빨라? 영서는 속으로 구시렁구시렁 욕을 하면서 낑낑대며 산길을 올라갔다. 이레를 안은 석규와 두식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척척 걸어가고, 그 뒤로 하나도 뒷짐을 진 채 가볍지만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주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때아닌 등산을 한 영서는 이럴 거면 아침을 먹지 말걸,이라고 생각하며 헥헥거리고 있었다. 해강은 안타까운 눈으로 영서의 안색을 살피며 굳이 발걸음을 맞춰주는 중이었다.

“영서야, 괜찮아?”

“괘, 괜찮지, 그럼…헉… 그런데 이 길… 지난번에는 못…봤던 길 같은데…”

“그러게. 그때는 이렇게 돌아오는 산길이 아니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절 입구로 바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 여우 놈이 일부러 이런 게 틀림없었다. 영서는 헉헉거리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저 위쪽에서 손을 흔들며 자신을 맞아주는 고모할머니를 보며 애써 활짝 웃어 보였다.

“영서 오빠, 완전 느려!”

“시끄러, 임마! 너는 업혀 가면서!”

“이레는 아직 어린이니까요~”

그치~ 빙글빙글 웃는 석규가 이레를 고쳐 업으며 고개를 까닥거리자, 이레도 그치, 하고 말을 맞추며 해맑은 웃음을 방싯거렸다. 이럴 때만큼은 자신도 열 살배기가 되고 싶은 영서였다.

“젊은 것들이 이렇게 굼떠서야 원, 어디다 써?”

“아이고, 우리 영서 아니야. 올라오느라 수고들 했다, 잘 왔어.”

짜증스러운 태도로 여 사장을 흘겨보던 노인이, 눈가의 주름살이 활짝 펴질 정도로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맞아주었다. 아침 바람부터 대뜸 연락 한 통 주고 찾아온 이들이 불편할 법도 한데, 단정한 법복을 입은 늙은 승려는 따스한 태도로 아이들을 맞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한참 전부터 문밖까지 나와 서성거리며 기다렸던 건지, 영숙의 손은 서늘한 아침 바람에 차가워져 있었다.

“주지 스님, 이제 그만 들어오시지요. 손님들은 저희들이 안내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래, 내 정신 좀 보거라. 일향아, 다과 좀 내와 주련? 아이들이 먹을 만한 거로다가.”

“예.”

영숙의 곁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또 다른 승려가 고개를 숙이고는, 잔잔한 웃음을 지은 얼굴로 모두를 안내했다. 지난번에도 온 적이 있었지만, 아침 일찍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정혜사의 아침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이름 모를 새가 뒷마당에서 지저귀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아직도 푸르름을 가진 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안쪽 방에서는 글줄을 외는 동자승들의 도란도란한 목소리가 창호지를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청명하고 맑은, 그야말로 정혜사의 알찬 기운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영서는 문득 어지럽던 머릿속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옆에서는 일행들이 와글대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고 있었으나, 그 풍경에 마음이 사로잡힌 탓일까.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에 귀와, 눈이 가려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영서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정혜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주민이 와서 영서의 손을 잡아 끌 때까지.

“영서야, 뭐가 있어?”

“응? 아, 아니야. 들어가자.”

귀신 한 마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정혜사는,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한두 마리씩 잡귀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이 풍경의 일부가 되기라도 한 듯, 전혀 조감을 망치는 느낌 없이 그저 멍한 얼굴로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거나, 아니면 장독대에 앉아 있거나 하는 등 이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우중충한 모습으로 떠도는 것들과는 왠지 다른 기운을 가진 것 같았다.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은 뒤,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마루 위에 올라서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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