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70화 (70/166)

70화

잠시 후, 소반 위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향긋한 차가 올려졌다.

여전히 웃음이 서린 푸근한 입매를 가진 일향이, 절제된 동작으로 찻주전자를 들어 두어 번 흔든 뒤 각자의 잔에 따라주었다.

“여 사장님이 지난번에 선물로 보내주신 것들 중에 있던 차입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거라지요? 저희 주지스님이 매우 좋아하셔요. 감사합니다.”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당연하죠. 사장님이 주신 리스트를 대폭 수정해서 선물을 보낸 건 저였으니까요.”

하나가 한심하다는 듯 말하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차를 마셨다. 우아한 그녀의 동작에 일향이 어머, 하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그녀 쪽으로 다시 건넸다.

“그, 그랬던가? 내가 보낸 것도 같고…?”

“아니요. 사장님은 사교에 영 소질이 없으셔서. 대체 스님께 고기를 보내라니, 한우 사골을 보내라니 하는 건 어디서 배우신 예절이랍니까? 영숙 씨 보기 부끄러워서, 원…”

하나가 혀를 차며 남은 차를 마시자, 여 사장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다 장난이지 장난~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대는 여 사장의 얼굴에 어린 장난기는 마치 이레가 장난을 칠 때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일향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과연, 일향의 말대로 하나가 골라 사장 대신 선물한 찻잎은, 향부터가 예사롭지 않고 한 모금 입에 담는 순간 깨끗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전해주었다. 맛있다, 작게 감탄 어린 말을 중얼거린 영서가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홀짝였다. 짙은 갈색의 나무 소반 위에는 흰 접시에 담긴 쌀 과자와 한 입 크기로 자른 수박, 참외, 복숭아 같은 제철 과일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작은 포크에 수박을 찍어 이레의 손에 들려주는 여 사장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영서가 물었다.

“저… 사장님, 저희 할머니하고는 60년 전쯤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하셨죠?”

“한 그쯤 됐지. 왜?”

참외를 와작 와작 씹으며 여 사장이 되물었다. 영서는 뜸을 들이다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지하에서 말씀하셨던 거… 할머니의 손자가 남자인 제가 아닌 여자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얘기 말이에요.”

“아, 그거.”

순간 하나와 석규, 두식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지하의 ‘그 방’에 관련한 말이 나오자 평안했던 그들의 심기가 조금 불안해진 걸 눈치챈 영서가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아무렇지 않게 침묵 속에서 와작와작 참외를 씹어 삼킨 여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치?”

“아, 네…”

하지만 영서는 알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이 가득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게다가 자신과 관련된 일이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에서 일어나고만 있는 것 같은 감각은, 아주 들쩍지근하면서도 기분 나쁜 일이었기에. 그러나 여 사장은 어딘가 의뭉스럽고 능글거리는 구석이 있어 묻는 말에 제대로 전부 알려줄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짓말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영서는 주변에 둘러앉은 여 사장네 일행들과 주민, 해강의 눈치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뭔가 조금이라도 아는 눈치인 여 사장 쪽 사람들과 달리, 주민과 해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아는 건 고작 일부에 불과하고, 그런 내가 말해주는 것보다는 네 할미한테 물어보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이 말이야. 일부러 안 알려주는 건 아니고. 또 엄연히 남의 집안일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말이다.”

“네…”

“그래서 이곳까지 데려와 준 거잖냐? 영숙이도 손님 맞아놓고 어디서 무얼 하는 거람, 야, 일향아! 영숙이는 어디서 뭐하고 있어?”

여 사장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외치자, 마당에서 나뭇잎을 쓸고 있던 일향이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사장님. 안 그래도 주지 스님께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셔서요. 조금 이따가 손자 분만 따로 안내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에잉, 또 영서만 쏙 데려가서 말해주려고. 아마 얘기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우리는 그동안 뭘 한다?”

“사장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곳에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그럴까?”

“아직 찬바람이 불기 전이라 이른 것 같은데…”

그곳? 영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나가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영숙 씨가 보자고 한 건 손자였으니까, 친구들은 우리랑 같이 다녀오는 게 어때? 절은 한산하기도 하고, 애들이 놀 건 없으니까.”

“어디 가는 건데요?”

“글쎄다, 지금 간다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여 사장님의 스승님 뵈러 가는 건데, 너희도 같이 갈래?”

“예??!?!!?”

밝은 얼굴로 제안한 석규와 달리, 여 사장은 뭔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끄응, 소리를 냈다.

“하지만 하나 말처럼 아직 날도 더워서…”

“꼭 추워질 때만 만나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운이 좋으면 계실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저… 그런데 그 스승님이라는 분은… 인간이 아닌가요?”

“뭐, 그렇지. 옛날에는 원래 인간으로 태어나신 분이긴 하지만,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도인으로 다시 살고 계시는 분이야. 그냥 알기 쉽게 말하면 신선이라고나 할까나.”

신… 신선??!!

주민과 해강이 놀라움에 입을 벌리자, 묘하게 신난 눈치의 하나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분을 뵌다고 하루 만에 백 년이 흐른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어.”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기뻐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고민하던 주민과 해강은, 영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그러마, 하고 그들과 합류하기로 한다.

영숙이 다시 그들이 있는 방으로 찾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나머지 일행들의 계획에 대해서 들은 영숙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웃을 뿐이었다. 묘하게 하나가 지었던 웃음처럼, 약간의 장난기와 신남이 어린 웃음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툴툴거리며 여 사장이 먼저 방을 나서자, 그의 부하들과 해강, 주민도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영숙에게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신발을 신었다. 영숙과 영서는 그들을 문밖 오솔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당분간은 조용하겠구나.”

“…아, 네.”

“영서야, 퇴원하고 나서는 몸이 좀 어떠니? 어디 다시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니?”

다시 절의 안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뒷짐을 진 고모할머니가 살갑게 묻자 영서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정말. 혹시 아빠나 엄마가 연락하신 건…”

“아, 안 그래도 여 사장에게 이야기는 미리 다 전해 듣고 있었단다. 친구들이랑 놀이동산을 갔다가 납치당했다며? 하여튼 그 여우 자식, 속이 시꺼메서 처음부터 제 패는 절대로 먼저 보여주지도 않는 놈이지. 어린 것들이 휘둘려 다니느라 고생했다. 어멈하고 아범한테는 내가 아는 분 댁에서 며칠 지내고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해두었으니, 너무 염려치 말아라.”

역시 부모님이 연락을 했었구나. 당연히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고, 하루 이틀 집에 돌아가지 않은 게 아니라 영서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해 꽤 걱정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퇴원하고 나서 얌전히 학교도 잘 다니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멀리까지 외출을 하는 날에는 두 분 다 전전긍긍하며 꼭 자주 연락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런데 가타부타 말없이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앞뒤 다 자르고 밖에서 외박을 하고 갈 테니 너무 걱정 말라는 문자.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지 저절로 마음이 답답해지는 영서였다. 시무룩해진 조카 손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영숙이 웃는 얼굴로 그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너무 걱정 말래도. 내가 다 설명해두었으니 괜찮을 거다. 게다가 오늘은 여기에 온다고 또 말해줬더니, 확실히 안심하는 눈치 더구나. 그냥 너는 집에 가서 놀이동산에서 늦게 나오는 바람에 근처에 사는 내 지인 댁에서 자고 왔다고 하면 된다.”

“네에…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건 그렇고, 여 사장이 말해주지 않던?”

“어떤…?”

다정하게 올라가 있던 영숙의 입가가 조금 굳어졌다. 영서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구태여 자신이 말하기 싫었던 탓도 있었던 지라,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갖고 왔구나, 그 거울.”

언제부터 눈치채신 건지. 아니면 이 절에 들어설 때부터 알고 계셨던 건지도. 영서는 역시 고모할머니는 못 당해내겠다고 생각하면서,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영숙이 가장 안쪽에 자리한, 지난번 부적을 받고 충고를 들었던 작은방으로 영서를 데려갔다. 마루에 올라서자 그때처럼 발끝이 왠지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둔 뒤 영숙을 따라 들어간 영서는 등 뒤로 방문을 닫았다. 얇은 창호지 문 하나로 바깥세상과 이쪽이 완전히 금을 갈라 분리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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