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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72화 (72/166)

72화

오래전, 문 씨氏 성을 가진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어려서부터 또래들과 달리 매우 총명하고 똑 부러진 데가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동물들마저 그녀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녀가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덧 자태는 사대문 안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희귀하고 아름다운 데가 있었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녀와 한 번 대화를 나누면 해가 저무는지도 모르고 즐겁고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명망 있는 집안, 고상하기로 소문난 부부, 그리고 그 밑에서 난 아름답고 똑똑한 딸. 그런 집안에 으레 뒤따르기 마련인 여러 집안의 혼사 자리가 점점 줄을 이었고, 그녀의 아비이자 오랫동안 궁 안에 출입하며 벼슬자리를 지낸 문 대감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고심 끝에 한 집안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딸이었던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정해졌던 것은 당연지사. 그 무렵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별다른 이름 없이 문씨 부인이라는 호칭 하나만 간신히 족적에 남길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세월의 속에 감춰진 채, 그렇게 잊혀질 인물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

문씨 부인은 비상한 재주와 신묘한 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남편이자 장군 벼슬을 받아 전쟁에서 이른 나이에 죽을 때까지 임금의 신하로 목숨을 바친 남자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을 테지만, 여기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간 아직 문씨 부인이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닌 문 아무개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있을 적에 그녀는 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문이 열리더니, 온갖 비단옷을 차려입은 선녀들이 내려와 음악을 곡조를 부르고 연주하더니 별안간 제게 새끼 백호를 한 마리 안겨주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녀의 말에 부모는, 그저 어린 딸이 자기 전에 하인들에게 옛날 얘기를 듣다가 그것이 꿈에 나온 모양이라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결혼이라도 했다면 마치 태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상서로운 꿈도, 그들에게는 그다지 큰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저 어린 딸이 자신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문씨 부인은 그 꿈을 계속 이상히 여겼고, 일곱 살쯤 되던 해 그녀는 저잣거리에서 괴이한 것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래, 그것의 이름은…

“할머니, 이건…”

“…나의 할머니, 그러니까 너의 고조할머니 되시는 분께서 남기신 편지다.”

영숙은 진지한 얼굴로 한 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는 편지 봉투라기엔 조금 더 컸고, 서류 봉투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원래는 미색의 봉투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낡고 손때 묻은 봉투였다. 혹시 찢어질까 싶어 영서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들이고 입구를 열어보았다.

의외로 안에서 나온 것은 장문의 편지지가 아닌, 손바닥 크기의 작은 메모지와 사진 두 장이었다. 메모지에는 흐리지만 분명한 글씨가 쓰여 있었고, 사진도 낡고 바래어진 흑백 사진이었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19세기 말에 태어나신 분이었다. 그때 치고도 꽤 개방적이고 호전적인 성품이신 여장부셨고, 남편인 할아버지와 결혼하게 되면서도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입지를 공고히 하신 분이셨지.”

한 장의 사진에는, 영서의 고조할머니로 추정되는 한 둥근 얼굴의 호리호리한 몸을 한 여성이 흰 한복을 곱게 갖춰 입고 한 남자와 나란히 서 있었다. 이상하게 소복이 연상되는 그 흰옷과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은 세월의 탓인지 심하게 바래져, 이목구비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불에 그슬리기라도 한 듯, 그녀의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데군데 색이 날아가거나 형상이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진 하나에는, 묘하게 익숙한 얼굴을 가진 앳된 소녀가 단발머리를 하고 어색한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열서너 살 쯤 되었을까, 작은 체구에 꼿꼿한 얼굴을 한 그 소녀를 한참 들여다보던 영서는 고개를 들어 영숙과 사진 속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아!”

“그래, 이 할미다. 얼굴이 고대로지?”

확실히 세월의 흔적을 그 얼굴에서 여러 겹 걷어내고 본다면 소녀의 얼굴과 영숙의 얼굴은 꽤 비슷해 보였다. 사진 속 소녀의 옆에는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어, 이 사람들…”

“아, 그 옆에. 그때는 그놈들도 어렸을 때지, 참.”

앳된 얼굴의 영숙의 옆에는,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능글맞고 가벼워 보이는 양장복 차림의 여 사장과, 그의 허리 정도에나 올 법한 작은 키의 하나가 나란히 카메라를 보고 서 있었다. 겉으로 보면 영숙보다 어려 보일 만한 나이대의 어린 하나의 모습을 보니, 영서는 이상하게 신기하면서도 하나는 어릴 때도 이렇게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을 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왠지 오한이 드는데…

“하나가 막 인간처럼 둔갑할 수 있을 때쯤이었지. 그때 내가 아마 열일곱쯤 되었을 게다. 안 그래도 귀찮은 여우 놈이 어느 날부터는 웬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들락거리는데, 내 귀찮아 죽는 줄 알았다.”

“하나 씨한테도 어릴 때가 있었군요… 왠지 신기하네요…”

“본디 살아있는 것들은 다 한 번씩은 거치는 시기지 않니.”

그렇긴 하죠. 영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두 장의 추억 사진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두고, 꼬깃하게 접혀있던 편지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한자와 한글이 섞인 데다 사투리인지 아니면 옛 방언인지 모를 말들까지, 영서는 분명 한국어인데도 이해가 가지 않는 느낌에 영숙에게 물었다.

“글자가 너무 어려워서 읽기가 힘들어요, 할머니. 무슨 말인지 알려 주시면 안 되나요?”

“그래? 보자… 음, 사실 그렇게 긴 내용은 아니고,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숙의 조모가 남긴 편지의 내용은, 손녀인 영숙에게 자신이 평생 동안 보고 들으며 살아온, 그리고 자신이 지켜온 것들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 손녀에게, 그것도 다른 자식들도 아닌 영숙에게만 은밀하게 남긴 그 편지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영서도 포함되는 주제기도 했다.

“…네 고조할머니는, 무당이셨다.”

영서는 눈을 크게 떴다. 기이하게도 어느 순간, 저 멀리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방울이 떨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문씨 부인은 신묘하고도 강력한 능력을 가져, 세간에서는 그녀에게 신이 씌었다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마냥 거짓은 아니었으니.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삶을 갖고 태어난 문씨 부인은, 푸른 물망초가 봉우리를 틔우던 어느 날,

자신의 집 뒷마당 감나무 가지에 목을 매 죽었다.

***

업경대業鏡臺

염라대왕이 망자를 심판할 때 망자의 생전 기억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는 거울.

보통 저승 입구 어귀에 놓여있다고도 하며, 죽은 자가 생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려주는 물건이라고 한다.

북악산 밑 어느 기와집.

한 소년이 제 품보다 조금 큰 잠옷을 입고 기지개를 켜며 거실의 커튼을 젖힌다.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온 이른 아침의 햇살에 소년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채광 좋네, 늙은이 같은 대사를 치며 허리를 두드리던 그의 뒤에서 은령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왔다.

“도령님, 모과 차 드시지요.”

“아, 고마워. 그런데 이 몸은 당최, 자도 자도 기운이 나질 않는 것 같아. 더 자야 하나?”

“잔다고만 해서 능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검사 결과가 어제 나왔는데, 도령님은 현재 인간 나이로 13-14세 정도의 나이라고 합니다.”

“흐음, 그렇구만. 이왕 인간의 몸으로 좌천시킬 거면 어른으로나 해 주던가.”

“인간들은 겉으로 보이는 나이로 상대방을 판단하기 마련이니까요. 성인 남성보다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는 게 남들의 의심이나 적대감을 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쉽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너무 불편하단 말이야. 금방 지치고 금방 배가 고파져. 잠도 많아지고. 이래서는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잖아.”

“13살의 나이라면 원래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은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소파에 살짝 앉았다. 은령, 아니 월직차사는 거실 창가에 선 도령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모습인가. 비록 원래 모습보다 어려진 얼굴로 돌아오셨을 때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을 정도였지만, 월직차사에게 강림 도령의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령님을 잘 보필하고, 징계가 끝날 때까지 최대한 위험한 일에서 떼어 놓아야 해.

은령은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모과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수면에 떠오른 자신의 얼굴을 평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이런 때에 그 애는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이도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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