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러고 보니, 이도는 어딜 간 거야?”
도령이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모과 차를 마시며 물었다.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든 은령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직 별다른 연락은 없어서…”
“아무래도 그놈 뭔가 수상쩍단 말이지, 나야 그동안 출타하느라 그렇다 쳐도, 너도 모르게 그런 일을 꾸며 놓고 있었다니…”
도령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권영서인가 뭔가 하는 그 애, 은령이 너도 본 적 있어?”
“아니요. 하지만 올해 초에 일지에 적힌 걸 보니 분명 사고사死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지?”
“네. 물론 그동안의 데이터에 비추어 보자면 망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저도 최근 들어 이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수의 망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굳이 다시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한 고등학생이, 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병원에 입원한 후 다시 살아났단 말이지…”
“…하지만 이전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네 말대로 극소수의 확률로 아주 희박한 경우고, 게다가 망자를 잘못 인도한 경우는 보통 명부에 적힌 이름을 혼동해서 사자가 잘못 일 처리를 한 경우에 해당하는 거지. 예를 들면 이름 한 획을 잘못 봤다거나.”
도령의 눈가가 진지해지자, 은령은 입을 꼭 다물었다. 아아, 또다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은령은 이도는 물론, 현존하는 그 어느 저승사자들 위에 선 사자들의 대장, 차사 중의 차사였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저승의 시왕들이나 보살님들을 제외하고는 은령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은령도 성격상 그런 분들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이 있지 않은 이상 쉬이 고개를 조아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언제나 명확하고 빈틈없는 일 처리,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계획과 예상은, 항상 인간 세상에 떠도는 망자들을 구원하고 재판에 끌어다 놓는 일에 큰 도움이 되는 능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단 한 명, 그런 완벽한 은령을 마치 코흘리개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단 한 명의 남자.
바로 강림이었다.
“하지만 명부에는 분명히 권영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했지. 명부는 틀리지 않아. 웅대한 세계의 흐름과 이치에 맞게, 그리고 위대하신 그분, 우리의 어머니께서 그 흐름을 받아 모든 인간의 생을 태어날 때부터 정해 놓으시니까 말이야.”
어머니. 은령은 다시 가슴 속을 찌르고 들어오는 이름에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그분의 질책도 피해 갈 수 없는 걸까… 그분의 질책 어린 눈길을 받는다는 것은, 은령에게 있어 거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지. 명부는 틀릴 리가 없는데, 영서라는 애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리고 그 애가 있던 구역을 맡은 차사가 하급 사자들도 아닌 일직차사, 이도 본인이었다지?”
“…예…”
“애초부터 이상하단 것쯤은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놔둔 거지?”
“놔둔 게 아닙니다. 저는…”
도령의 눈이 흘긋 은령의 손끝으로 향했다. 모과 차에서 나는 연기만이 그녀의 손을 모락모락 데우고 있었을 뿐, 좀처럼 입에 대질 않았다. 은령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 도령은 고개를 툭툭 꺾고는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래, 너한테 계속 물어본들 알 턱이 있겠냐. 혼내는 건 아니다만, 적어도 후배한테 관심은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
“이도 그 녀석도… 이제는 다 잊은 줄 알았는데.”
“……”
“자그마치 600년이 지난 일이야. 아니면 원래 인간들이란 다 그런가?”
도령의 담담한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은령은 고개를 들어 그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잊을 수 없는 마음도… 있는 거니까요.”
“…하긴, 그 녀석은 애초에 차사가 될 그릇이 아니었는데. 역시 내가 치기 어린 억지를 부린 업보를 지금까지 받고 있는 걸까나…”
도령은 한숨을 푹 쉬고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은령을 마주 보았다. 분명 그의 머릿속에는, 수백 년도 더 지난 옛날, 언젠가 한 젊은 남자의 혼을 거두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을 것이라고, 은령은 생각했다. 그리고 난데없이 염라대왕님과 내기를 걸어, 마침내 이겼던 그 순간까지도.
“은령이 너도, 수백 년 전 일을 아직도 꽁해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은령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본 도령은, 그제야 한숨을 길게 내쉬며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른이 아닌 소년의 발걸음으로는, 아직 이 넓은 집이 익숙지가 않았다. 게다가 저승에 있을 때는 집이고 뭐고 없이 발 닿는 데가 전부 내 집이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야.
“차 고맙다. 나는 좀 더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우고.”
“예. 안녕히 주무세요.”
북악산 아래에 우뚝 선 어느 한옥 집.
그 집에는, 인간의 탈을 쓴 저승 차사들이 살고 있다.
***
“…업경대요?”
“그래. 처음 들어보는 게냐?”
“아, 네… 뭔가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고…”
“업경대는 염라대왕이 가진 보물 중 하나야.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되어 차사들의 인도에 따라 저승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시왕, 즉 열 명의 왕들의 재판을 거쳐 합당한 벌이나 처사를 받게 되는 게지.”
영숙은 느릿한 말투로 설명했다.
“염라대왕이 가진 업경대는 망자의 생전 기억이나 행실을 비춰주는 물건이란다. 망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좋은 일을 했는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CCTV 같은 물건이라고나 할까.”
CCTV라니… 영서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대충은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숙은 잠시 방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바로 그 거울이 업경대인 게지.”
영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업, 업경대라고? 이게? 이…이 거울이?
“할머니, 그, 그러면 이 거울이…”
“그래, 우리 조상에게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가보. 그게 바로 업경대다.”
영서는 할 말을 잃은 채, 거울이 든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팔 안에 안긴 가방이,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빨리 좀 따라와라. 어린 것들이 체력이 그게 뭐야?”
“헉…허억… 조, 조금만 천천히…”
“사, 사장님… 어디까지… 가시는 거예요…!”
“이레야,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산이다, 산~! 다람쥐랑 청설모!”
여 사장이 혀를 쯧, 차며 커다란 바위 밑에서 휴식 시간을 갖자는 듯 작은 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를 선두로 두식과 하나, 석규가 큰 숨 하나 없이 산길을 따라 올랐고, 한참 뒤에야 녹초가 된 해강과 주민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해강까지 지칠 정도의 가파르고 비탈진 길이 많았던 지라, 주민은 몇 번이나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뻔하며 간신히 따라올 정도였다. 그마저도 해강과 석규의 부축이나 도움이 없었으면 도중에 낙오되어 이만 하산했을지도. 산속에서는 밝을 때라도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던데. 가쁜 숨을 이제야 돌리며 주민은 작은 바위 위에 지친 다리를 접고 앉을 수 있었다. 제 몸의 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이레는 지친 기색조차 없이, 이리저리 폴짝거리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보니 주민은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주민아, 괜찮아?”
“어,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그랬다. 나 완전 저질체력이지, 하하…”
“나도 힘들었는걸, 뭐… 아까 영서도 엄청 헥헥대면서 올라왔고. 그나저나 여긴 갈수록 더 산세가 험해지는 것 같아. 이런 길밖에 없나?”
해강이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거리자, 주민은 그저 헤헤 웃으며 턱에 흐른 땀을 닦을 뿐이었다. 확실히 맞는 길로 가는지 어쩐지 그들이 알 방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왕 여기까지 등산한 김에 여 사장의 ‘스승’이라던 분을 만나고 말겠다는 것이 해강과 주민의 목표였다. 사실 영서를 두고 온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절 안에 다른 스님들도 많아 보였고, 오히려 영서가 나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전투력으로는 제일 쓸모없는 게 내가 아닐까… 하며 주민은 약간 침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애초에 난 영서가 보는 걸 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겠지. 그건 해강도 마찬가지였다. 해강 역시 ‘볼 수 없는’사람이었고, 그 또한 영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어차피 짐이 될지도 모른다면 그저 옆에 비켜나서 응원이나 하는 쪽이 나을지도. 주민은 푹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괸 시선을 돌려 이레를 바라보았다. 간만에 나선 외출에 꽤 들뜬 모양인지, 이레는 커다란 나무들의 기둥도 척척 오르며 혼자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다. 오빠, 이것 좀 봐! 아침에 석규가 깔끔하게 묶어준 예쁜 머리는 이미 잔뜩 헝클어진 채로, 나뭇잎과 도깨비 풀을 잔뜩 단 얼굴로 이레가 불쑥 손에 쥔 매미를 들이밀었다.
“하하, 이레가 잡은 거야?”
“응! 저어기, 제일 커다란 나무에 이런 거 엄청 많아! 드글드글해!”
우엑…
주민과 해강의 낯빛이 동시에 새파래졌다. 애써 웃으며 이레의 장단을 맞춰주는 그들의 노고를 눈치챘는지, 석규가 이레의 손에서 매미를 풀어주며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 이레야, 벌레들은 마구 잡지 말라고 했지? 그냥 눈으로 보고 아이 이쁘다~ 해줘야 하는 거야.”
“응, 아이 이쁘다~”
이쁘긴…
저 시커멓고 시끌시끌한 매미들이…?!
주민과 해강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지는 것도 모르고, 새끼 여우와 흰 족제비는 희희낙락 나무에 매달린 벌레들을 구경했다. 바위 한 편에 앉아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시 깔끔히 올려 묶은 하나가, 꼰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 사장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아직입니까? 지난번에 뵈었던 곳에서 꽤 멀리 지나온 것 같은데요.”
“으응~ 그러니까, 내 말이. 분명 이 근처로 느껴졌는데 말이야.”
선글라스를 낀 여 사장이 눈썹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하나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다시 덧붙였다.
“혹시, 저 인간들을 데려와서 이번에는 모습을 안 보이시는 게 아닌가 하는데…”
“에이~ 그럴 리가. 그렇게 융통성 없는 양반은 아니지. 오히려 어린애들은 예뻐하시잖냐. 영숙이도 몇 번 뵈러 왔는데.”
“영숙 씨는 다르잖습니까.”
“내 눈에는 다아- 똑같은 인간이다~”
설렁설렁 대답을 하며 산속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여 사장이, 뒷짐을 풀고 어느 한 나무가 선 곳으로 다가갔다. 다른 크고 우람한 나무들에 비해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는, 평범한 활엽수 한 그루였다.
“…여기, 이거.”
갑작스레 목소리를 낮춘 여 사장이, 하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녀에게 손짓을 해 불렀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간 하나가, 여 사장의 시선이 멈춘 곳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나무 밑에는, 아주 길고 흰 털 한 올이 반짝거리며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