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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74화 (74/166)

74화

눈을 가늘게 뜬 여 사장이,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동안은 보고받은 게 없는데.”

적어도 이 주변 지역에서는. 털 한 가닥을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어 올린 여 사장이, 햇빛에 은빛의 털을 비춰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쪽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하나 또한 목소리를 죽이고, 저쪽을 한 번 확인한 뒤 대답했다.

“…이 지역은 아니지만, 이 부근과 맞닿은 다른 지역에서 지난 10년간 두어 차례 보고가 들어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실한 목격도 아니었고, 횟수도 워낙 적었던 지라…”

“…거주지를 옮겼다는 소리인가?”

“그놈의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지요. 먹이가 바닥나면 얼마든지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 사장이 들어 올린 털을 노려보았다. 짐승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투명하게 빛나는 백색의 한 가닥. 보통의 긴 머리 여성의 머리카락 정도의 길이의 그 털을, 여 사장은 잠자코 주머니에 넣었다.

“…아마, 스승님이 자취를 숨기신 까닭은 이놈 때문인 것 같구만.”

하여튼 지독한 놈이지. 여 사장은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길게 내뱉은 한숨은 뿌연 담배연기가 되어 하나의 시야를 어른거리게 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울창한 나무들이 만든 그림자가 시원하고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졌구만.

입안으로 중얼거린 여 사장의 옆모습을, 하나는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사장님.”

“엉?”

“…산속에서는 금연입니다.”

치익-

여 사장의 입 끝에 매달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지져 끈 하나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꽁초를 뺏어 들었다.

“…으응, 미안…”

저 멀리서, 이레와 주민이 손을 흔들며 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그런 물건을… 저희 집안이 왜?”

“태초에 관한 이야기는 나도 자세히 들은 바가 없단다. 그저 입에서 입으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후손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지.”

“기록이 없다니요? 하지만, 이런 물건이 가보로 내려올 정도라면…”

영서가 어리둥절하게 묻자, 영숙은 마른 기침을 몇 번 한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거울은 우리 집안의 보물이 아니야. 이 보물에 대해 아는 것은 일부 후손들에 지나지 않아. 거의 한 대에 한 명 꼴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한 대에 한 명…”

“이 할미가 젊었을 적 이야기에 대해서는 재혁이가 말해준 적이 있지? 그 말대로다. 할미는 위로 오라비만 세 명이 있었고, 친척 중에서도 딸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어렵게 얻은 고명딸이라고 어른들은 기뻐하셨겠지만, 그 딸이 결혼도 안 하고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하다니 얼마나 집안이 발칵 뒤집혔겠니.”

영숙의 주름진 입가에는 그때의 기억이 아른아른하게 떠오르는 듯,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은 아주 차분하고 맑았지만, 이내 곧 무표정하게 식어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영숙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할미가 어렸을 적, 너의 고조할머니께서 항상 나를 앉혀두고 말씀하신 것이 있단다.”

영서는 조금 전 보았던, 그 흐릿한 흑백 사진 속의 강단 있는 얼굴을 한 여성을 떠올렸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리고 나의 고조할머니는, 무당이셨다고. 영서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너와 내가 가진 이 힘은, 그저 공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란다. 우리는 이 힘을 남용하지 않고 남들을 돕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라고 말이다.”

“…힘을 남용하지 않고… 남들을 도와요…?”

“여 사장에게 들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영서 네가 가지게 된 그 힘은, 그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야. 모든 것은 다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을 게야. 그분들의 뜻대로 말이다.”

영숙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덧붙였다.

“…너는, 원래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날 운명이었던 게다.”

***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미의 뱃속에서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리고, 처음 숨을 쉬게 되었을 때.

그 아이의 머리 위로, 작은 실이 이어졌다.

그 아이가 처음 세상에 안겨졌을 때,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와 혼절하듯 스러진 산모를 부축하는 간호사들, 침착하게 아이를 받아 들고 크고 정확한 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의사의 목소리가 한데 뒤엉켜 분만 실은 매우 혼잡했다. 온통 피였고, 온통 울음바다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스친 거대한 안도감이, 아이가 별 탈 없이 건강히 잘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를 안아 든 채 울면서 웃는 산모와, 그런 부인보다도 더 크게 울면서 그들을 꼭 안아주는 그녀의 남편도 말이다.

-휴, 진짜 시끌벅적하네. 하다 하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선배.

-그러게.

-…이런 곳은 아무래도, 그다지 오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그냥 장례식이나 다니고 싶다.

아이가 처음 빛을 보고 숨을 내쉬었을 때, 의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산모의 품에 갓난아기를 안겨주었다. 아들이군요, 축하드려요.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제자리에 있는 바른 눈과 코, 그리고 작은 입, 아직 양수에 젖어 쭈글쭈글한 고구마를 닮은 못생긴 신생아를 보며, 산모는 저도 모르게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 아빠를 닮았나, 왜 이렇게 못생겼담.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넉살에 간호사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구석자리, 분만실의 밝은 조명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한쪽 벽 구석에, 어두컴컴한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 중 한 명은 매우 익숙한 얼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깔끔하게 넘긴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를 한 남자. 그는 바로 이도였으며, 다른 한 명은 지금으로선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그의 후배 중 제일 경력이 짧은 축에 드는 저승사자였다. 후배는 이 분야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는 저승사자 특유의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인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과거의 이도는 현재보다 더 음침하고 모든 것이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지겹고 피곤하다는 얼굴로, 후배의 수다에 별다른 대답조차 하지 않은 이도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선, 아, 아니, 일직차사님, 이제 제 차례 맞죠?

-…그래, 배운 대로 해봐.

나름 견습 딱지를 뗀 지 꽤 되었기는 했으나, 항상 지도 선배를 따라다니는 바람에 스스로 망자를 수거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후배는 당당한 얼굴로 한 발 나섰다. 이도는 예의 그 온기가 없는 입매를 굳힌 채, 묵묵한 눈으로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기는 시끄럽게 울어댔고, 산모는 붉어진 얼굴로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바보 같은 얼굴. 명백한 생명의 탄생. 그 현장에서, 이도는 잠자코 모든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예요, 축하드려요, 산모님.”

-으음, 그러니까, 명부를 일단 꺼내고…

“울음소리가 아주 우렁찬 왕자님이네. 아가, 안녕. 내가 네 엄마야. 아이구, 못생겼다.”

-망자의 이름을 확인. 어, 어라? 선배, 이름이 없는데요?

“산모님, 아기 이름은 정하셨어요?”

-분명 명부에 적혀있을 텐데… 선배?

“애기 아빠랑 미리 정해둔 이름 자가 있어요. 영 자를 넣어서 짓자고. 꽃부리 영.”

-…제가 뭘 잘못한 건 아니겠죠? 흐음, 이상하다…

“나머지 글자는 아가가 태어나면 어울리는 글자로 완성해서 짓자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 여기 생겼다.

수척하지만 밝게 웃는 얼굴의 산모와, 당황하다가도 이내 다시 활기를 찾은 후배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에 가까운 기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서에요. 권영서.”

-영서, 권영서. 여기 생겼네요.

그 이름 석 자가, 이도의 귀에 들러붙어 그대로 스며든 것만 같았다.

순간 온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이도는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움칠, 떨었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의 계획의 차질은 있을 수 없을 터. 이도는 그저 손 놓고 구경이나 하겠다는 듯 여전히 벽에 기대 있었다.

-이거 원 참, 이래서는 태어난 의미도 없겠네요. 태어나자마자 죽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아가야. 그게 너한테 정해진 운…

-이봐.

-예? 선……으윽…!

후배의 손이 아기의 이마에 닿으려던 순간, 이도가 그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후배는, 결국 자신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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