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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75화 (75/166)

75화

-일직 차사 강이도는 고개를 들라.

목소리는 우렁우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도는 고개를 들었고, 목소리의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당당한 눈빛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모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대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

-같은 저승사자의 영혼을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은 그렇게 남용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그것은 명백하게 인간으로 치면 살인에 해당하는 중죄이네. 죽은 인간의 영혼을 회수해야 하는 자네가, 같은 차사를 해하다니. 게다가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네. 열흘간의 구금 후 자네의 환송 및 추후 처리에 관해서는 월직차사에게 자문을 얻는 수밖에는 없겠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라면 자네에 대해 잘 알 테니 말이야. 그리고 그도 이번 일에 대해 문책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네.

-….

-어허, 이것 보게.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단 말인가. 일직차사, 그대의 지위와 처지를 망각하지 말게. 자네에게 발휘해 줄 융통성은 바닥났네. 여봐라, 게 없느냐! 월직차사에게 기별을 넣어 조속히 염라청으로 복귀하라고 전해라! 그가 오지 않는다면 내 이번에는 강림을 직접 불러다가 문책을 할 터이니.

고개를 조아린 영혼들이 물러가고, 이도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은령이 염라청으로 복귀했다는 보고가 떨어지고, 이도는 다시 그녀의 도움으로 간신히 징계를 피할 수 있었다. 거의 100년 치의 잔소리 감이지만, 그런 것은 이제 상관없었다.

***

“영서야, 여기 봐, 아이고 예뻐!”

“아들, 저기 아빠 있네? 응? 브이~”

까르르 터지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옹알거리는 입소리, 아이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누구보다 행복하고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웃고 있는 부부, 그리고 그들의 즐거운 첫 번째 나들이를 축하하듯 살랑살랑 바람결을 따라 휘날리는 벚꽃들.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화단과 공원 곳곳에 심어진 여러 종류의 꽃들이 산들산들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아이의 뽀얀 달덩이 같은 얼굴에 장밋빛의 기쁨과 웃음이 넘쳐흘렀다. 햇살마저 완벽하고 아름다운 날.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 플라타너스 나무 밑, 그늘진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고 너구리굴을 만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창백한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 누적된 피로와 과로로 지친 그의 일과를 대변해 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어두컴컴한 눈 밑과, 가족 단위로 들 많이 찾는 큰 튤립 공원에 굳이 혼자 어두컴컴한 정장을 빼입고 담배를 빽빽 피워대는 꼴이 퍽 이질적이라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한 번쯤은 흘금거리게 만드는 그의 눈에 띄는 외모와, 더더욱 눈에 띄는ㅡ물론 여러 가지 의미로ㅡ그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그의 발치에 쌓인 담배꽁초 무더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멀찍이서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가까이 지나갈 때쯤이면 애써 모른 척을 하고 있었다. 한 부부의 손을 잡고 신나게 걸어가던 웬 남자아이가 그의 앞을 지나가며 기침을 하자, 남자는 막 불을 붙인 담배를 구둣발로 지져 끄고 한숨을 쉬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강이도. 제대로 정신 차리고 일하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변명 따윈 필요 없어. 처음부터 내가 말했지. 도령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게 뭐지? 감히 대왕님이 나까지 부르게 만들어? 내가 없었다면 도령님을 호출했을 거라고 하시지 않나. 이미 징계 중이신 분을 불러서 대체 무슨 소리를 듣게 만드려고? 정신 똑바로 차려.’

‘……’

‘다시 한번만 말하지. 더 이상 쓸데없는 짓 벌이지 마. 눈감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다음번에는 잔소리로 끝나지 않아. 너한테 같은 차사의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힘을 준 게 나라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도 너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나란 걸 잊지 마.’

은령은 매서운 눈으로 이도를 한 번 노려본 뒤, 다시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인간도. 하염없이 담배만 피우는 이도.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그렇지?

이도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생각하던 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이렇게 담배나 태우며 먼발치에서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는 것은, 아마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목을 죄어오기 때문일 것이라.

“…하지만, 너무 오랜만인데.”

입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탓에ㅡ놀랍게도 이도는 이런 인간적인 감각은 잊은 지 오래였다ㅡ다시 한번 담배를 꺼내 들었다가, 아까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부모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퍽 아파오기 시작했기에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곧… 이따위 인간 세상도, 이런 인간 세상의 물건도 모두 뺏겨 한동안 구경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역시 꼬맹이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한 대나 더 태울까 고민하는 이도였다.

어느덧 공원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시계탑에서, 오후 세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 공원이 유명한 이유는 아름답게 잘 조성된 튤립과 다른 꽃밭들뿐만 아니라, 정각마다 시계탑의 제일 꼭대기 부분에 있는 나무 문을 열고 나와 음악을 연주하는 작은 태엽 인형들의 합주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이도의 눈에는 그걸 연주하는 인형들도, 그걸 보기 위해 매 봄마다 이 공원에 매일 모여들어 가족들끼리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인간들도 모두 무용한 것들뿐이었다. 인간도 시간으로 세 시가 되었으니 이미 선배는 염라청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곧 이쪽으로 오겠지.

이도는 자신에게 남겨진 작디작은 자유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들이 다 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오늘, 이 시간대에, 그가 이 공원에 나들이를 온다는 사실만 알고 이도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조차도.

“영서야, 저게 좋아? 아이 재밌다~ 그치?”

“자기야, 영서 한 번 안아볼래? 시계탑이랑 같이 찍어보자.”

그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이도는 벌떡 일어나 그늘진 벤치에서 나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대낮의 아지랑이와 그 사이에 허물어진 인파 속에서, 저 멀리 은령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여튼 시간 하나는 잘 맞춘다니까. 혀를 찬 이도가 은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한 가족 앞에 가 섰다.

“…어머, 누구세요?”

“어…자기 회사 동료 분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 되는대로 내뱉는 말일지라도.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기다렸으니까.

…너를 만나려고 왔어.

유모차 안에서, 양손을 펴고 제 아빠에게 손을 뻗던 아기가 동그란 눈을 하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까맣고 동그란 눈과 마주치는 순간, 바보 같게도 이도는 꼭…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 난 틀리지 않았구나.

나는 다시,

너를 만날 수 있게 된 거구나.

젊은 부부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말을 흐리고 있는 미남자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고, 유모차에 앉은 자신들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199X년 X월 XX일.

두 돌이 된 영서의 생일날, 영서의 부모는 기이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런 일이 있었지.

-뭐가요?

-……네가 알 거 없어.

-아, 왜요?! 방금 영서가 어쩌구 했지 않았나?

이도는 고개를 저으며 혜리의 얼굴을 멀찍이 밀어버렸다. 방금 분명히 영서 이름을 말한 것 같은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흘겨보는 혜리를 그대로 놔둔 채, 이도는 자리를 떴다. 방학을 맞아 텅 빈 남중 고등학교는 벚꽃과는 거리가 먼, 울창하고 푸른 플라타너스 나무들만이 운동장을 가득 지키고 있었다. 이도는 문득 벚꽃이 완연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지 가늠해 보았다.

…그전에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속으로 중얼거린 남자는, 다시 권태로운 얼굴로 휘적휘적 걸어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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