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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76화 (76/166)

76화

죽음같이 조용하던 침묵을 뚫고 창밖으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 드리웠는지 모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쨍하니 밝던 해는 어딘가로 숨은 지 오래였다. 톡, 톡 빗방울 소리가 영서의 귓가를 울렸다. 멍하니 영숙을 바라보던 영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비가…”

“오늘 예보에 비는 없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구나.”

“…아! 해, 해강이랑 주민이가 아직 산속에 있는데, 어쩌죠?”

“으음, 그러고 보니 녀석들도 꼼짝없이 비를 만났겠구만. 멀리 가지 않았다면 빗방울이 아직 굵지 않으니 금방 돌아올지도 모르겠구나. 그 애들이면 몰라도 여 사장과 그쪽 애들은 모두 이 산 지리를 잘 아니까 걱정 마렴. 어디서 비를 그을 곳을 찾고 있겠지.”

하긴 그 둘이 아닌 여 사장네를 떠올리면 약간 안심이 되는 영서였다. 그래, 분명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거나 아니면 금방 돌아오겠지.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으려니 정혜사의 풍경이 아침과는 퍽 달라 보여, 영서는 멍하니 댓돌에 고이기 시작하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제가, 원래는 딸이었어야 한다는 소리는…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다. 원래 이 능력은 우리 집안, 아니, 이 ‘피’를 타고 나는 형질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 능력은 원래 여성에게만 발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미가 되는 ‘거울의 후손’이 낳은 다음 세대의 딸이 그 거울을 물려받는 것이야. 그런데 영서 너는… 아들인데도 이 능력이 발현된 게다.”

“…그 말은 꼭, 제가 이런… 능력을 원래부터 갖고 있었고, 이렇게 살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니.”

바로 그전 대의 후손이, 자신의 눈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것을, 영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귓가를 울리는 빗소리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흔히들 영매의 능력이라고 하는, 영서가 가진 힘은, 분명 영서가 사고로 죽었다가 살아난 후 일종의 거래에 의해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영서가 아는 것과 영숙이 말해준 것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영서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죽다 살아나지 않았어도 이러한 능력이 언젠가 발현됐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과, 그렇다면 대체 왜 자신이 사고를 당했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딸이 아닌 아들이기에 그동안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인지. 어느 것 하나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영서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능력의 기원과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와 그 뿌리의 시작, 영숙이 설명해 주지 못한 저승사자와의 지난 일들이…

영서의 기억을 더욱 맘대로 헤집어 놓았다.

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이런 때에 대체 그 남자는, 얼굴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남자의 싱거운 표정과 밤처럼 새카만 머리, 언제나 피로와 권태에 찌든 것 같은 그의 눈빛이 떠올라 맘속에 콕, 박히는 것만 같았다. 영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를 못 만난 지 꽤 되었다. 물론 언제나 내 곁에 따라다니는 것이 그의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래 얼굴을 못 본 적은 처음이었다. 분명 그 인간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겠지만, 그래도…

영서는 가끔, 자기 전에 자신의 머리맡에서 찬 기운이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손이, 자신이 잠들 때까지 지켜봐 주는 그 눈빛이, 이제는 자신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할머니에게… 일직차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지금 내가 어떤 과업을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할머니라면 이해해 주실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영숙이라면 누구보다도 영서에게 갈림길의 표지판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영서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고백했다.

“…할머니, 저, 사실…”

영서가 천천히 내어놓은 짧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약속을, 영숙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

“아니 갑자기 웬 비야?! 아까까지만 해도 맑더니, 참나.”

“단순 소나기 같지는 않은데… 일단 비를 피할 곳을 찾은 게 다행이지요.”

“머리랑 옷은 다 젖었네요. 그런데 이런 곳에 이 정도로 큰 오두막이 있던가?”

석규가 머리를 털어내며 의아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작년에 이 근방에서 이 정도의 산장은 발견하지 못했었다. 산이야 워낙 크고 이곳을 다 돌아볼 수는 없으니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석규는 꺼림칙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하나도 대충 머리를 털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 보기는 하지만, 이런 산장이 아예 없는 곳은 아니니까. 일단 비만 피하고 해가 지기 전에만 내려가면 돼.”

“으… 비를 맞았더니 조금 춥네요. 여기도 난방은 전혀 안 되는 곳 같고.”

해강이 몸을 웅크리며 투덜거리다가, 냉골이나 다름없이 찬 기운이 스며든 나무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온기라곤 없고 먼지까지 조금 앉은 것은 보아하니 사람의 손길을 탄 지는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겨울 후부터 내내 인적이 끊긴 상태였을지도. 수상쩍게 주변을 둘러보는 해강의 어깨를, 두식이 툭툭 건드렸다. 솥뚜껑 같은 그의 투박한 손에는 흰 수건이 몇 장 개어져 들려있었다.

“어라, 웬 거예요? 가져오신 건 아닐 테고.”

“글쎄다, 저쪽 서랍장을 뒤져보니 여분의 수건과 옷이 남아있더구만. 옷은 겨울옷이라 쓸모가 없지만 수건은 쓸 만한 것 같아서. 네 친구도 많이 젖었으니, 같이 몸 좀 말리거라.”

과묵한 두식은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어 이렇게 말없이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특기였다. 아마 이레를 돌보고 나서부터 애 보기의 달인이 되었다던 하나와 여 사장의 농담이 농담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해강은 반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수건을 받아 옆에 웅크리고 앉은 주민의 머리에 수건을 얹어주었다.

“주민아, 아저씨가 수건 찾아오셨다. 이거로 좀 말리… 어, 어라? 왜 그래?”

해강이 당황한 목소리로 주민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돌리게 했다. 단순히 추위에 떠는 줄만 알았던 주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고, 잡은 어깨도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 조금 맞았다고 이렇게 사람이 백지장처럼 질릴 리가 있나? 해강의 물음에 주민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더욱더 웅크렸다.

“괘, 괜찮아… 그냥, 좀…추워서…”

“아니, 무슨 겨울에 눈 맞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그래? 두식아, 여기 밖에 땔감 같은 거 없나 찾아봐라. 비 안 맞은 걸로다가.”

큰 배스 타월 같은 수건을 망토처럼 여민 여 사장이 혀를 차며 말하자, 두식이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산장의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비가 부슬부슬 오고 어두컴컴해 보였지만, 산장의 뒷부분이나 바로 요 주변에 나뭇가지들이 많이 있을 테니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하나도 젖은 머리를 말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주민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얘, 손 좀 줘볼래?”

“저, 저요…?”

“그래. 음… 맥이 잘 안 잡히네. 확실히 체온도 갑자기 떨어지고. 머리는 안 아프니?”

“아, 머리도 조금… 저, 저만 이렇게 추운가요? 몸이 막…떨리는데…”

해강이 남은 수건들로 주민의 피부를 감싸주었지만, 젖은 옷과 머리 탓인지 체온이 올라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침착한 얼굴로 주민의 이마를 짚어보고 다시 맥을 잡더니, 여 사장에게 다가가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흠…음…그 렇구만. 응.”

“석규를 보내는 게 나을까요?”

“아니, 두식이가 그나마 낫겠지만, 지금은 땔감을 찾아오라고 보냈으니까…”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채 한참 생각에 잠기던 여 사장은, 제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좋았어, 내가 다녀온다!”

“예?”

“네?!”

“어, 어엉? 뭐, 뭔데요? 다들 뭔데요?!”

어리둥절한 해강이 어른들을 번갈아 보자, 여 사장이 으쌰,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씩 웃었다.

“호미로 막을 거 가래로 막기 전에,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낫지. 하나야, 너도 같이 가야겠다. 석규는 이레랑 애들 좀 봐주고. 두식이가 금방 올 테니까 괜찮을 거다.”

“아빠, 이레도 가!”

“안 돼, 임마. 이레는 여기서 오빠들이랑 기다리는 거다, 알겠지? 또 튀어나가면 안 돼? 오빠들 지켜주는 거 잊지 말고.”

“지, 지켜요? 누가 누구를…”

“사장님, 저까지 안 가도 괜찮으십니까?”

석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자, 여 사장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임마, 쟤 아픈 거나 잘 봐줘. 대강 물기를 털어난 겉옷을 다시 걸쳐 입은 여 사장이, 다시 산장의 문을 열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하나도 뿌연 비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석규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빈 의자에 주저앉았다.

“저기, 석규 형, 저 사장님이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이에요? 갑자기 어딜 다녀오신다는…?”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눈치 상… 아마도 그놈을 잡으러 가시는 것 같아.”

“그놈이라뇨, 또 뭔가 나타나는 거예요, 이 산에?”

귀신이라면 지긋지긋한데! 해강이 우는소리를 내자, 석규가 하하 웃으며 안경에 맺힌 물기를 닦았다. 하지만 곧 그 웃음이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의 석규가 안경을 뽀득 뽀득 닦는 소리만이 산장을 채웠다. 이레도 왠지, 잔뜩 기분이 나쁜 얼굴로 마치 식빵을 굽는 고양이처럼 마룻바닥 위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불안한 침묵 끝에 석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우리 쪽에서 쭉 예의주시하면서, 잡아 족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놈이 하나 있어.”

그때 해강은 문득, 이레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뭔가… 그 건물에 있었을 때와, 아니 비가 내리기 전에 신나게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기운을 뿜어내진 않았다. 지금의 이레는, 잔뜩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고양잇과의 동물처럼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기댄 주민의 몸이, 기묘하게 차가운 것을 느꼈다.

“…그놈은 날씨나 지형에 상관없이, 그리고 시대에도 상관없이 모습을 드러내곤 하지. 하지만 그에 비해 목격담은 적은 편이야.”

석규가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이런 날이면 더욱 제 살 판이 나겠지. 사람을 꾀어내 잡아먹기 딱 좋은 장소, 좋은 날씨가 아니니.”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여, 해강은 문득 빗속으로 사라진 여 사장과 하나는 이 빗줄기에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목격담이 적은 이유는… 아무래도, 피해자가 적은 모양인가 봐요?”

조심스럽게 해강이 묻자, 석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목격담을 말해 줄 만큼,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은 피해자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야.”

콰르릉-

저 멀리서부터, 천둥이 하늘을 무너트릴 듯한 소음이 들렸다. 아마 곧이어 번쩍하고 번개가 치겠지. 그 순간, 이레가 몸을 반짝 일으켜 문 쪽을 응시했다. 석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이름은…”

번쩍, 하고 어두운 산장 안에 희뿌연 번개가 내리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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