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장산萇山범.
목격담에 따르면 여러 가지 차이점은 있으나, 공통적인 외형은 진홍색의 피부, 비단같이 곱고 흰빛을 띤 긴 털, 큰 골격을 가진 호랑이 같은 짐승의 모습.
특히 긴 털이 가장 큰 특징이며, 여성의 머릿결 같은 매우 아름답고 고운 백색의 털이 일종의 환각을 일으켜 사람의 경계심을 없앤다고 한다. 범이 아닌 사람이나,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목격된 적도 다수. 인간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어, 아름다운 목소리나 지인의 목소리 등으로 인간을 꾀어내 잡아먹는다고 한다.
“장산범, 이라면…”
“들어본 적 있니?”
“…네, 하지만 분명…”
해강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럼, 석규 형은 그것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게 있다는 거네요? 오래전부터 여 사장님이 그걸 쫓았다는 건 무슨 이야기죠?”
“말 그대로지. 그놈과 형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척을 지게 된 건지는 몰라. 오히려… 처음에는 그 범이란 것이, 단순히 인간을 잡아먹고 해치는 귀신이 아니라 형님처럼 도력을 가진 신수 중 하나였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진짜건 아니건 간에, 지금은 그저 인간들을 무작위로 해치고 조심성 없이 구는 바람에 우리에게도 위협이 되는 되는 데다가, ‘우리 쪽’으로도 끌어들일 수 없는 영물의 도력은, 없애두는 게 뒤탈이 없어, 오랫동안 그 녀석을 찾고 있는 이유지.”
해강도 장산범에 관해서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저 인터넷의 익명 괴담에 의존해 몸집을 키운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실제로 마주할 수도 있다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 그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해강은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그저 타고나길 촉이 좋아, 뭔가 기이한 것이 기분 나쁘게 피부를 타고 오르는 듯한 감각만을 느낄 뿐이었다. 옆에 기댄 주민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런데, 주민이는 갑자기 왜 이럴까요, 분명 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비를 그렇게 많이 맞은 것도 아니고.”
“추측이지만 아마 범이 조화를 부리는 거다. 그놈은 아주 고약한 데가 있어서, 항상 혼자 있는 인간을 노리거나, 여럿이 뭉쳐 있어도 그중 제일 약하고 마음이 잘 흔들릴 만한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아. 홀리는 방법은 대상인 인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예방법이랄 것도 없어.”
“하지만, 제일 약한 거로 치면… 아무래도 제일 어린 사람을 타깃으로 삼지 않을까요? 이레는 멀쩡한 데다, 주민이는 그다지 약하다거나…”
“신체적인 힘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네 친구는 이미 비가 온 시점부터, 그래, 아마 그때부터 그놈의 힘이 우리에게까지 닿은 거겠지… 주민이는, 그때부터 장산범에게 홀린 거야. 혼을 뺏긴 인간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지. 맥이 희미해지고, 온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고, 결국 정신을 잃는 거야. 이건 물리적으로 몸의 체온을 올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
담담하지만 싸늘한 석규의 말에, 해강은 당황한 얼굴로 주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간신히 호흡은 하고 있으나, 확실히 정신을 온전히 붙잡기 힘든 모양인지, 이미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약점을 노리는 거지. 네 친구, 최근에 뭔가… 마음이 아주 약해질 만한 일을, 제대로 정신을 붙잡기 힘든 일을… 당한 적이 있지 않아?”
해강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주민의 미약한 숨소리 사이사이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레는 여전히, 허공을 노려보며 잔뜩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
“사장님, 비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면 제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가 묶여버립니다.”
“아아~ 나도 알고 있다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힘을 내달란 소리잖아. 응?”
“…어차피 거리도 꽤나 좁혀진 모양인데, 이쯤 되면 차라리 사장님이 본체를 드러내시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그러면 내 털이 몽땅 젖잖아~”
그러니까 그놈의 털을 몽땅 뽑아버리기 전에 얼른 뭐라도 하시란 말입니다.
라고 얼굴에 쓴 것 같은 표정으로 하나가 노려보자, 여 사장은 농담이라는 듯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뭔 얘는, 농담도 못해.
“영차- 이 바위 정도 높이면 되려나.”
빗물이 계속 흘러 발이 미끄러지는데도, 여 사장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키의 세 배는 되는 높이의 거대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계속 내리쏟는 비와 일정하지 않은 바람, 게다가 안개까지 끼는 바람에 산속은 이미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하나와 여 사장은 산장에서 나오자마자 빠른 지름길로 최대한 거리를 좁혀나갔고, 인간과는 다른 그들의 타고난 능력 덕분인지 산장을 떠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몇 킬로미터 정도는 떨어진 어느 높은 지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올라간 여 사장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두고, 입고 있던 바지와 재킷, 셔츠를 순서대로 벗었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나가 날렵하게 옷가지들을 받아내지 않았다면, 여 사장의 옷은ㅡ심지어 두식이 어제 새로 세탁한 뒤 다림질까지 해서 준비해 준 옷이었건만ㅡ비바람에 날려 산속 어딘가를 나뒹굴었을 것이다. 못 볼 것을 본 표정으로 잔뜩 인상을 쓴 하나가 옷을 대충 개서 옆구리에 끼자, 바위 위에는 어느새 알몸의 남자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커다랗고 불그스름한 털이 풍성하게 자란 꼬리를 흔들거리는 구미호가 앉아있었다.
“…정말, 그런 식으로 꼭 변신하셔야 합니까?”
“하지만 옷이 찢어지면 안 되니까~”
“항상 그 꼬라지를 봐야 하는 제 기분도 좀 생각해 주세요.”
뾰족하고 수염이 가닥가닥 튀어나온 털투성이의 주둥이 사이로, 묘하게 가뿐해진 목소리가 킬킬대며 웃자 하나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켠 구미호가 웅크렸던 몸을 펴고 아홉 개의 꼬리를 펼쳤다.
“…저쪽이다.”
그르릉거리는 듯한 여 사장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오자, 하나도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기운에 폭발하듯 흘러나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비바람과 안개로 어두워진 산 중턱 어느 곳에선가, 아주 익숙하고도 불쾌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된 하나가 먹잇감을 발견한 여우처럼 먼저 숲속으로 뛰어나가자, 꼬리를 살랑거리던 구미호도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달려갔다.
***
“…혼을 뺏긴 거라면… 뺏긴 혼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 거죠? 그, 장산범이라는 괴물을 죽이면…?”
“아쉽게도 그놈은 죽인다고 죽는 놈이 아냐. 그동안 우리 측에서도 몇 번이나 장산범이라고 불리는 녀석을 소탕했어. 분명 실체도 있고, 정말 호랑이를 닮은 짐승의 모습을 한…”
석규는 주민의 몸을 마룻바닥 위에 편히 눕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장산범이 아니야. 장산범이라는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괴담이고, 그놈이 술수를 부린 것에 홀린 사람들이 남긴 목격담이 조각조각 끼워 맞춰진 거니까. 실제로 우리가 몇 번이나 장산범을 죽였지만, 그놈은 아직도 살아 있어.”
“그러면 어떻게 혼을 되찾을 수 있는 건데요?”
“글쎄, 이번에는 그 녀석을 죽이지 말고 살려서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알아내야지.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주민이라는 애, 최근에 무슨 일 없었어? 너희는 친구라는 놈들이 그런 것도 모르냐?”
“으, 그, 그치만… 저는…”
물론 해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눈치 없이 밝고 쾌활한 해강이라도, 차마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친구가 얼마 전 가족을 잃었다고 떠벌리기는 꽤나 꺼림칙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주민의 반쪽이나 다름없었던 쌍둥이 누나를.
병원에서의 일이 삽시간에 떠오르자, 해강은 불쾌한 기억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단 주희라는 애와 관련되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래, 그 병원에서는 영서가…
영서가……
영서. 해강은 순간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영서의 얼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석규가 의아한 얼굴로 해강을 쳐다보자, 해강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형. 영서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서? 영서가… 음…그러게, 아마 그 애라면…”
여 사장님과 영서가 함께 그 녀석을 잡을 수 있을 지도.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해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비록 빗물이 스며들긴 했지만 아직 배터리도 남아 있었고,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통화 정도는 될 것이다. 하다못해 메시지 한 통이라도.
“이 산 지역은 그래도 통화권 내야. 통신이 되는 대로 밑에 한 번 연락을 해 보자. 영숙 씨라면 몰라도, 영서는 아직 어리니까 영숙 씨보다야…”
“아, 전화는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비가 오는데 위치를 잘 찾을 수 있을까요? 여기 산장 위치가… 저희도 헤매다가 들어왔잖아요.”
“정혜사에서 이 산 일대를 관리하는 산림청과 연락을 할 수 있을 거야. 실제로 산장지기들도 정혜사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인간들도 많으니까.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면 그 근처 산장으로 올 수 있겠지.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석규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영서가, 오는 길에 그놈한테 되려 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겠지.”
“설마, 그 정도로… 형이 우리 영서가 얼마나 센 지 못 봐서 그래요! 원래 무지무지 엄청난 애인데, 그게, 갑자기… 여 사장님 댁에서부터 보이지도 않고, 능력도 안 되는 바람에…”
“그래, 영숙 씨가 뭐가 됐든 해결해 주셨으면 좋겠네. 아무튼 영서가 와줄 수 있다면 이쪽으로서는 정말 고마운 거니까.”
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화면에 저장된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빛나는 액정에 떠오른 그 애의 이름을, 엄지로 슬슬 쓸어보다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연결 음이 끊기고 그렇게 애타게 그리던 목소리가 여보세요? 라며 대답할 때까지, 해강은 입술을 깨물고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