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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79화 (79/166)

79화

다시 산장.

해강은 당황한 얼굴로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고 석규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쩌죠, 그러면… 하지만, 분명 영서 목소리였는데…?!”

“말했지. 그 녀석은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어. 해강아, 너도 그놈한테 홀린 거야.”

“…그런… 하지만 어떻게…”

해강의 밝은 눈동자가 혼란과 공포로 물들었다. 손안에 쥔 휴대폰은 배터리가 거의 닳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보다도 더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으니까.

그때, 이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문으로 달려갔다.

“이, 이레야!”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이상한 냄새, 짜증 나!!!”

석규가 재빨리 아이의 팔을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이레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히고 산장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뭔가를 물어뜯을 것처럼, 평소의 밝고 천진난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긁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이레는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발버둥 치는 이레를 저지하듯 석규가 감싸 안자, 여전히 짜증이 난다며 이레는 마구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 진정하라며 아이를 다독이는 석규도 결국 지쳐버렸고, 급기야 자신을 안고 놔주지 않는 석규의 팔을 이레는 있는 힘껏 깨물어 버리고 말았다.

“으윽…”

“형…! 괜찮으세요?”

“…괜찮아, 너무 놀라진 마. 가끔 이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고통스러울 법도 하건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은 채 석규는 천천히 이레의 고개를 자신의 팔에서 떼게 했고, 그대로 이레를 안아 올린 채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들썩거리는 이레를 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석규가 피곤한 눈덩이를 문지르는 것을 보고도 해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온기 하나 돌지 않는 싸늘한 산장 안은, 이레의 괴이한 행동과 주민의 상태로 얼음판같이 냉랭하고 예민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해강과 석규 또한 불안함과 예민함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아마 그 녀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걸 거야. 그래서 이레가 이렇게 난폭해진 걸 수도.”

“…이레가 이상해진 건, 역시 장산범… 때문인가요?”

“나는 하나 누님처럼 탐지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항상 별 도움은 안 되지만, 이레는 비록 혼혈이어도 구미호의 피가 흐르는 아이야. 아무리 어려도, 어떨 때는 이레 한 명이 나랑 하나 누님, 두식이 형님 셋을 합친 것보다 나을 때도 있거든.”

이를테면 주위에 접근하는 요괴를 쉽게 알아차린다든가. 이레를 다독거리느라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석규가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특유의 웃음기가 그나마 아직까지는 그 또한 버틸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어쩌면 영서가 온다고 해도 그 애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여 사장님과 이레가 반응한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그 대상이 실체가 있고 인간에게 그 영향력을 뻗는 요괴들 같은 종류거든. 영혼이나 악귀를 상대하는 영서의 능력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할까. 좀 더 물리적인 일이지.”

“하지만, 영서도 지난번에 저를 그런 놈에게서 구해준 적이 있어요. 분명 저에게 영향도 끼치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면 다행이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여 사장님이 얼른 무사히 돌아오시길 비는 수밖에 없어. 아니면 영서와 영숙 씨가 이 산장을 찾아준다거나. 물론… 방금 전화가 정말 영서가 맞는지는…”

석규가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부분은 해강도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때, 옆에 누워 있던 주민의 입에서 가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큭, 커흑, 콜록!”

“주민아, 괜찮아?!”

“하…윽…누…누나?… 주희 누나야?”

“누나?”

“…주민아, 나야, 해강이! 정신이 좀 들어?”

희미하게 뜨인 주민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마른 입술 새로 터져 나온 한 마디는,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그리던 주희의 이름이었다. 석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해강이 입술을 깨물며 주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주민아, 나 해강이라고!”

“해강아! 너무 세게 흔들지 마. 잠시만, 방금 주민이가 누나, 라고 했니? 혹시…”

해강은 결국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의 가족사에 대해, 그것도 최근 상喪을 당한 일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고 싶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 주민의 상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석규에게 무엇 하나라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나았기에. 자초지종을 들은 석규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역시 그놈은, 주민이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든 거야. 아주 최적의 먹잇감이었군.”

“주민이를 처음 만난 게… 그때였어요. 주희가 죽고 나서 많이 힘들어하는 건 알았지만… 아직까지 계속 생각하고 있을 줄은…”

“…가족이 죽었잖아. 하물며 제 반쪽이나 다름없는 쌍둥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잊을 수 있겠니.”

석규가 안쓰러운 눈으로 하얗게 질린 주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성격의 남자아이. 그러니 그런 그에게 쌍둥이 누나의 죽음이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리라. 아마… 오랫동안 힘들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주민의 드러난 이마와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슥슥 쓸어준 그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라리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약점이 된 거라면, 어쩌면 도리어 주민이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어, 어떻게요?”

“간단하지. 마음속 깊이 곯아버린 그 상처를, 자기 스스로 깨닫게 하면 돼. 그리고 주민이는 주희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사람인 걸, 죽은 사람과는 달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걸 알려줘야 해.”

죽은 사람과 달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

해강은 왠지 어려운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주민의 감정에 대해 아무리 헤아려본들 그 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제 좀 나아졌을 줄 알고, 같이 놀이동산에서 놀기도 하고, 이리저리 쏘다니기도 하고, 오히려 밝고 긍정적인 얼굴로 며칠 동안 여러 가지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아직 주민은, 주희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걸까.

해강의 표정이 어두워진 채 대답이 없자, 석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자기가 보는 눈앞에서 가족이 죽었다는 건, 어쩌면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도 몰라.”

석규는 자신의 품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이레를 한 팔로 감싸 안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이는 여전히 뭔가 울분에 찬 것처럼, 아니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예민한 얼굴로 숨을 씨근대고 있었으나, 석규의 다정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기세가 수그러들곤 했다. 이 작은 아이가 대체 왜 이렇게 구는지 해강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나마 석규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해강에게는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이레 말이야, 이 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도, 어쩌면 장산범에게 홀려 난폭하게 변한 것 같아.”

“네? 이레가요?”

“…그래, 주민이가 누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워하다 삶의 의지를 뺏긴 것처럼, 이레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마구 날뛰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이레는…”

“…이레도, 가족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지켜봐야 했었거든.”

해강이 살짝 충격받은 듯 새파란 안색으로 이레와 석규를 번갈아 보았다. 이레는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지, 한참 전부터 눈을 꾹 감고 석규의 품에 안겨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벗겨진 샌들이 바닥에서 나뒹구는 바람에, 아이의 작은 맨발이 꼼지락거렸다. 해강은 이 작은 새끼 구미호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가족이, 눈앞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이레는 고작 열 살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마주하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

“…죽은 가족이라는 건, 설마…”

“…응. 이레의 어머님.”

아직도 들썩거리는 아이의 등을 안고 토닥거리면서, 석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레는, 자신의 엄마는 물론, 같이 살던 다른 가족들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어. 그것도 자신의 생일에 말이야.”

“생일이라니…”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사장님은 이레가 자신의 딸이라는 확신도 가질 수가 없었대. 하지만 그 광경을 마주한 순간, 다시는 안 하기로 다짐한 일을 결국 마지막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게… 뭔데요?”

석규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사장님이 잘하는 거. 어리고 힘없고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돌보는 일.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좋고, 망나니가 되어도 좋으니까, 그저 부모가 없고 어리다는 이유로 죽지 말라고 하는 거.”

부모가 없고 어리다는 이유로… 죽지 말라는 것.

해강은 목 안쪽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아마, 아주 옛날,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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