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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80화 (80/166)

80화

이레가 그들에게로 오게 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 말을 하다 석규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이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덩달아 착잡한 기분이 된 해강도 입을 물고 묵묵하게 주민을 내려다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이레가, 여 사장님 댁으로 오게 됐군요.”

“나도 처음에는 화만 냈지, 앞뒤 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그 당시 조직 외부에 적이 엄청 많았는데, 그런 어린애를 데려온다는 건 스스로 약점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말 그대로 이레는, 살아남은 게 기적인 아이였는데.”

“살아, 남았다고요?”

“사실 우리도 최근에서야 그 잔당을 소탕하고, 우두머리가 갖고 있던 파일들을 입수하게 되면서 그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거든. 몽땅 태워버렸대. 이레네 집도, 이레의 방도, 이레의 엄마와, 친구들, 이레를 위해 모여 준 모든 인간들이.”

“…인간들이라면, 잠깐만요, 설마…”

“…맞아.”

석규의 내리깐 눈이 고요하게 젖어 들어갔다. 묵묵하게 잠든 아이의 등을 토닥이던 석규의 손이, 순간 멈췄다.

“이레의 가족을 죽인 범인은, 인간이 아닌… 우리와 같은 영물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어. 그 조직은 우리 조직보다도 훨씬 인간을 배척하는 집단이었고,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지. 잠시 사장님이 근방의 잔챙이들을 정리하고 세력을 키우느라 바쁘셨을 때, 어딘가에서 인간 주제에 영물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영물과 눈이 맞은 주제에 집안의 도움을 받아 자취를 숨기고 아이를 낳았다더군. 그리고 그 여자의 아비는 동물 박제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유명한 사업가였어. 그 남자의 손에 죽어간 동물들의 수를 세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영물은 고사하고 모든 동물들의 원수나 다름없는 놈이었지. 물론 우리에게도 거슬리는 인간이었지만, 당장은 아니었어. 어쨌거나 우리는 대외적으로 사업을 우선시했으니까. 일단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인간이라면 당장 죽일 수는 없고, 일단은 살려두는 법이거든. 그런데 다른 영물들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눈엣가시였던 이레의 엄마와 그 혼혈아까지 우리 같은 영물의 수치라고 생각한 거지. 그딴 인간의 딸이 낳은 영물이라니, 그 집안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이레는 더러운 피를 가진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거야.”

석규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말을 멈췄다. 어쩌면 중간에 이레가 품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를 고쳐서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이는 깬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했던 것인지,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떻게 정보를 입수한 건지, 그쪽에서는 이레의 어머니와 이레에 대해 모든 걸 조사한 모양이야.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이레의 생일에 대한 그녀의 계획까지도. 일부러 그 애의 가족과 친지들이 다 모이는 이레의 생일날 그런 일을 벌였으니 말이야.”

해강은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과 친지들이 한순간에 살해당하는 걸 봐야 했던 이레를 생각했다. 아마 이제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웠을, 아마 제일 먼저 엄마라는 말을 했을 이레의 그 작은 입이, 웃음을 터뜨리고 케이크의 초를 불었을 그 순간들도.

“…살아남은 건, 이레 혼자였나요?”

“…집과 그 근방이 모두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더라. 사장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겠지. 전부 불타서 사방이 쑥대밭이 되어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어떤 긴 천 옷에 감싸진 덩어리가 울면서 굴러다니더라는 거야. 이게 뭔가, 해서 열어봤더니, 애를 보따리처럼 천 옷에 싸놓았던 거지.”

“그게 이레였군요.”

하지만, 그 불속에서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강을 살짝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석규가 덧붙였다.

“그거 알아? 사장님 털에 불 붙여도 안 타는 거?”

“예? 사장님 털이요? 털이라면, 구미호일 때에 그?”

“응. 붉은 기가 도는 주황빛 털이 엄청~ 부드럽고 푹신푹신하거든? 가끔 기분 나면 만지게 허락해 주셔. 사장님 말로는 옛날에 구미호 개체 수가 훨씬 많았을 때는, 구미호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장님 같은 경우에는 절대 불에 타지 않는 털과 가죽을 가지셨다나 봐. 진짜 불 붙여본 적도 있는데, 정말로 안 붙는 거 있지?”

“와, 신기하네요… 아 그럼, 이레도…?”

“그랬던가 봐. 아직 본체인 구미호로 제대로 변신도 못할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옷으로 감싸서 직접적인 화기만 피했더니 화상 하나 없이 멀쩡하더라고. 아무래도 엄마니까 순간적으로 생각이 났겠지. 가스를 마셔서 애가 상태가 좀 안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건강해져서 이렇게 잘 자랐잖아?”

석규는 품 안에서 토닥이던 이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어린애한테는… 그까짓 화상보다 훨씬 심한 흉터가 남았겠지. 아직까지 이레는, 주변 인들이 다치는 걸 극도로 무서워해. 작은 상처나, 피가 몇 방울만 나도 이레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거든. 아마 구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때쯤부터인 것 같아.”

“그런 거였군요.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이레도 그런 일이…”

“그래. 음, 그러니까, 이레처럼 주민이도,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잊고 산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줘야 해. 약해진 마음은 본인만이 다시 강하게 먹을 수 있는 거니까. 그렇지?”

석규의 말에 해강은 그제야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어도, 비바람이 치는 산속에서 고립된 지금 상황에서는, 그 누구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주민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더 맞는 일일 테다. 게다가 주민은 영서가 아끼는 친구였으니까.

“음… 하지만 주민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빠지고 있는걸. 체온도 계속 떨어지는 것 같고. 일단 마음을 강하게 먹고 말고의 문제 이전에, 기운을 좀 회복해야 우리 목소리도 들릴 텐데…”

주민의 맥을 짚어보며 상태를 살피는 석규를 가만히 지켜보던 해강은,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그거요, 그거!!”

“아 깜짝이야, 뭐, 뭐가?!”

“구슬이요, 구슬!”

바지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불쑥 내미는 해강의 손안에는, 익숙하고도 맑은 빛이 감도는 작은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석규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확인하고는, 놀란 눈으로 해강과 구슬을 번갈아 보았다.

“너, 너 이거!! 이레 구슬이잖아, 너!!! 어디서 났어??!??! 혹시…”

“혹시…?”

“…훔친 건 아니겠지?”

만약 슬쩍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용서해 줄 테니까. 석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해강을 노려보자, 해강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거든요! 이레가 직접 준 거예요! 저한테 놀아줘서 고맙다고, 나중에 필요할 때 쓰라고 줬던 거예요!”

“…이레가…?

”네… 절대로 훔친 거 아니에요. 완전 억울해.“

”정말이지?“

이레 상태가 이래서 물어볼 수도 없고… 석규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중얼거리자, 해강이 억울하다는 듯 구슬을 내밀었다.

“이, 일단 이걸 써보자구요! 주민이 몸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니까!”

“…으음… 그래, 뭐, 일단은 한시가 급하니까…”

석규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구슬을 받아 들고는, 잠시 구슬을 이리저리 전등 빛에 비춰보았다. 유심히 관찰하던 그는, 픽 웃고는 구슬을 입안에 구슬을 넣더니 송곳니로 파삭, 소리가 나도록 구슬을 깨물었다.

“어, 어엉?! 형, 지, 지금 뭐 하시는?”

“상처가 난 것도, 어디 피가 나는 것도 아닌 이런 상태에는, 이런 방법이 특효약이거든.”

알사탕을 깨물어먹듯 구슬을 여러 번 깨문 석규가, 돌연 주민의 턱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으아아…! 난데없는 광경에 해강은 그저 빨개진 얼굴로 입을 막고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혀, 형, 지금 무슨…!”

석규는 잠시 후 고개를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주민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여전히 잠에 빠진 듯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창백하던 얼굴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혈색이 도는 것이 보였다. 당황한 해강이 주민과 석규를 번갈아 보자, 석규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인공호흡 같은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그치만 이건 인공호흡하고는 다른…”

“뭐가 달라, 똑같은 거지. 그럼 나 말고 네가 할래?”

“예?!? 제, 제제, 제가 왜요?”

“거 봐. 아무래도 친구가 해주는 것보단 덜 어색하니까. 그럼 두식이 형님이 해주리? 주민이한테도 차라리 내가 해주는 게 나을걸?”

저 태연한 얼굴 좀 봐, 진짜! 그러나 해강은 석규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저 뻔뻔한 웃음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내가 할 수도… 아냐, 친구인데 뭐 어때. 형 말마따나 인공호흡이랑 똑같은…

“…뭐야, 그 얼굴은? 너 우냐?”

“영서가… 보고 싶어서요…”

석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없는 놈. 얼굴은 잘생겨가지고 왜 저래. 하여튼 영서만 고생길이 훤하겠구만.

석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혀를 차는 지도 모른 채, 해강은 홀로 외롭게 자신과의 의미 없는 싸움을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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