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약 60년 전-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장산長山.
“이를 어쩐다, 길을 못 찾겠는데…”
이제 막 열일곱을 넘긴 영숙은, 진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고무신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고, 잠시 장에 다녀오신 다던 주지스님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마 밤눈이 어두우신 분이라 곧 길을 잃고 오는 길을 헤매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과 같이 가자고 졸랐건만, 안 그래도 산행으로 지친 영숙은 쉬고 자신이 혼자 다녀오신 다던 주지스님은 대체 언제나 오실 것인지. 영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고, 날이 빨리 저무는 듯한 기분에 얼른 주지스님을 모시고 며칠 묵기로 한 장안사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다 답지 않게 길을 잃은 것이다. 길눈이 밝고 기억력이 좋은 영숙은 어려서부터 또래에 비해 영특한 면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혼자 주지스님을 모시고 부산을 방문했다. 정혜사의 주지스님의 유일한 제자이자 정혜사의 막내인 영숙은 나름대로 자신감에 부푼 가슴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었다. 나이도 많이 드신 데다 최근에는 폐병 증상까지 보이는 주지스님은, 본인의 나이보다도 더 늙고 쇠약한 노인네였다. 비록 장안사에 계셨던 오랜 친우 분이 타계하게 되셔서 그 수행원으로 따라온 것인지라, 안 그래도 골골대시는 분이 자칫 여행길에 병까지 얻으실까 정혜사의 사람들은 모두 영숙을 못 미더워했다. 아무래도 어린 네가 혼자 주지스님을 모시고 다녀오기란 힘들지 않겠니. 그러나 주지스님만은 오히려 영숙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부탁한다는 말씀 한 마디를 할 뿐이셨다. 어디 잘못되시지는 않았겠지, 다치거나 해서 늦어지시는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아냐, 차라리 내가 모시러 가는 게 더 빠를 거야. 영숙은 초조한 마음에 방향이 어그러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수풀과 나무들을 헤치고 길을 찾아 나섰다.
해는 점점 정수리를 감췄고, 땅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어둠은 점점 키를 높여 영숙의 종아리까지 닿아 있었다. 속의 밤은 보통 마을에 찾아오는 밤보다 훨씬 깊고 무겁다는 것을, 영숙은 그때 뼈저리게 알았다. 이제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어느 방향이었던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사위는 온통 풀벌레 소리와 불안하게 우는 산짐승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사각이는 소리뿐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영숙이 누군가의 인기척을 들은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발자국에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영숙이 고개를 돌리며 외치듯 물었다. 차라리 낯선 남자여도 괜찮으니,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면서.
“…별일이네. 웬 어린애가 혼자. 길을 잃었니?”
그러나 예상외로 인기척의 주인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수상한 남성도, 그토록 기다리던 주지스님도 아니었다. 긴 머리칼을 곱게 비녀로 쪽진머리에, 흰 리넨 저고리에 맑은 옥색 치마를 입은 젊은 아낙이었다. 한눈에 봐도 다시 한번 눈이 돌아갈 만큼, 단정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미인이었다. 영숙은 잠시 입을 벌리고 놀랐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사정을 설명했다. 주지스님에 대한 인상착의를 말해주며, 근처 마을이나 장터에서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도. 아낙네는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숙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길을 잃었구나. 이 근처는 길이 잘 트여 있지 않아서 산사람들 말고는 자주 길을 잃곤 한단다. 네가 찾는 분도 길을 잃고 마을에 내려가서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
“하지만 스님께서는 분명 금방 다녀오신다고, 이 산 중턱에서 기다리면 엇갈리지 않고 만날 거라고 하셨는데… 혹시 다른 산길이 따로 나 있나요?”
“내가 알기론 없단다. 해가 지려는 걸 보고 마을에 묵기로 하셨을 지도 몰라. 밤에 이 산을 타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까. 여긴 산짐승과 독사가 들끓는 곳이거든.”
그렇다면 그런 위험한 곳에 당신이야말로 그런 고운 차림으로 왜 온 것이냐고 묻기에는, 영숙은 너무 지치고 체온까지 떨어지는 상태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장안사에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겉옷을 두고 온 탓이었다. 험한 산길을 오래 걸은지라 흰 고무신은 이미 더러워지고 발바닥도 쿡쿡 쑤셔왔다. 지친 기색의 영숙을 살피던 아낙은 입을 가리며 작게 웃더니, 자신의 집이 근처니 잠시 묵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님께서…”
“너 같은 어린 여자애를 혼자 산속에 두고 가다니, 주지스님도 꽤 매정하신 분이구나. 마을의 장터라면 이 산 바로 밑인데, 아직까지 오시지 않았다면 그냥 마을에서 묵기로 한 걸지도 몰라. 계속 여기서 기다리다간 몸이 얼고 말 거야. 아니면 산짐승한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고. 자, 나랑 갈 테니?”
조근조근 말을 붙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퍽 고왔기에, 영숙은 저도 모르게 고민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스님이 자신을 버려두고 혼자 장안사로 돌아가거나 마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니. 보통의 영숙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하며 스님을 기다렸을 테지만, 이상하게 몸을 적신 피로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영숙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추운 바람에 눈까지 감기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럼, 염치없지만 신세를…”
“염치없기는. 따라오렴.”
고운 눈을 접어 웃으며 먼저 등을 돌리고 나서는 여자를, 영숙은 조용히 따라나서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혹시 지금이라도 스님이 돌아오신다면, 아니 다른 인기척이라도 들린다면… 그러나 영숙의 기대대로 다른 인기척이 들리는 일은 없었고, 사위는 온통 고요하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좀 들어 보련? 몸이 많이 차구나.”
“감사합니다, 저어… 이곳에서 사시는 건가요?”
작은 개다리소반에 따뜻한 차와 떡이 든 그릇을 내려놓은 여자에게 영숙이 조심스레 물었다. 손에 쥐어진 옥빛 도자기 잔이 차의 온기로 따뜻해, 경계로 잔뜩 날이 선 영숙의 표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어린 영숙마저도 홀릴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서 살았단다. 하지만 전쟁 통에 바깥양반을 잃고 혼자 피난을 와서 이리저리 되는대로 살다 보니, 이런 산속에 혼자 터를 잡게 되었구나. 이래 보여도 산일에는 잔뼈가 굵거든. 저 밑에서 약초나 풀을 캐고, 밭도 꾸리면서 살고 있지.”
“그래서 산길을 잘 아시는군요. 힘드시겠어요. 여자분 혼자서, 험한 산일을 하시고…”
“너야말로 어린애가 이런 산골에는 웬일이니? 이 산은 들어갈수록 지형도 험한 데다 앞에는 바닷가가 있어서 도시와도 거리가 멀단다. 보아하니 이 근처 사는 애가 아닌 것 같은데, 큰 시장 터와 시내로 나가려면 저 앞 포구까지는 나가야 해.”
아낙의 말에 영숙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갈 데 없는 산속에서 풀이나 캐며 사는 순박하고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자신이 그동안 겪은 기이한 일들이나, 다른 어른들은 물론 가족조차도 믿어주지 않았던 숱한 일들에 대해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평소의 영숙의 성격이라면 절대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테지만, 왠지 지금 기분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 이 여인의 기나긴 밤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해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영숙의 이야기는 점점 자리를 잡아갔고, 낭랑하면서도 차분한 영숙의 말소리와 중간중간 맞장구를 쳐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인의 목소리가 낡은 초가집의 창호지문 밖으로 밤새도록 흘러나왔다. 땔감을 넉넉히 넣었는지 방 안은 점점 따뜻해졌고, 얼었던 몸과 마음이 완전히 풀린 영숙은 재잘거리며 여인과 밤새 담소를 나누었다.
영숙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피로와 여독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눈을 깜박거리며 힘겹게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영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인은 낡은 자개장에서 솜 이불을 꺼내주며 눈을 붙이라고 권했다. 씻지도 못한 몸으로, 집주인의 것일 게 분명한 하나뿐인 이부자리에 덥석 누워 잘만큼 영숙은 눈치 없진 않았으나, 여인의 부드러운 손이 영숙의 손을 잡고 이끌어 푹신한 이불 위에 눕히자 거절을 할 새도 없이 영숙은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꿈도 꾸지 않고 잔 듯했다.
쓰러진 영숙이 산속에서 홀로 발견된 것은 바로 다음날 동이 틀 무렵이었다.
약속한 자리에서 사라진 영숙을 찾기 위해 주지스님은 마을 상인들에게 부탁해 장정 여럿을 데리고 밤새 산을 뒤졌다고 한다. 주지스님의 주름진 손이 영숙의 볼을 세차게 때려가면서 깨우자, 그제야 눈을 뜬 영숙이 내뱉은 첫마디는 여자를 찾는 물음이었다.
“이것아,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어린애가 이런 깊은 골까지는 어찌 들어왔누?”
“아이고, 영숙아, 괜찮느냐? 정신이 좀 들어?”
마을 이장으로 보이는 수염 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영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혀를 차자, 주지스님이 영숙을 일으켜 앉히며 몸을 살폈다. 해코지를 당한 흔적은 없고, 그저 간밤에 찬 이슬을 맞아 머리칼과 옷이 조금 젖어있을 뿐이었다.
“스님… 그 아낙네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누굴 말하는 게냐? 여긴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홀로 쓰러져 있는 게야?”
“아이고, 단단히 홀렸구만, 홀렸어. 이거 어쩐대? 스님, 저 아도 인제, 오래는 못 살겠다 아닙니까? 그 여시깽이 같은 범한테 홀린 게 분명하다니까!”
“범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얘, 너 웬 여자가 집으로 널 데리고 갔다고 했지? 너, 그거 범한테 홀린 거다.”
영숙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분명 간밤에 몸을 누였던 푹신한 이불과 찻잔이 놓여 있던 개다리소반, 쑥 향이 향긋하던 떡이 담긴 접시, 따뜻한 방, 낡은 초가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영숙은 멍한 눈으로 여인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장안사로 돌아가고 부산을 떠나 다시 정혜사로 돌아올 때까지 그 여인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정혜사로 돌아온 지 일주일 후.
그 여인은 웃는 낯으로 정혜사의 뒷마당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