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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82화 (82/166)

82화

아침 해가 안개에 가려져 느지막이 동이 튼 날이었다.

영숙은 언제나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떨어진 낙엽을 쓸러 마당으로 내려왔다. 정혜사의 아침은 참으로 고요하고 서정적인 데가 있어서, 특히 이렇게 모두가 잠든 새벽 아침에는 새도 지저귀지 않아 찬 공기마저 상쾌했다. 영숙은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얼마 전 동네 장터에서 스님들이 사다 준 털이 달린 고무신에 발을 넣었다.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아침에는 입김이 하얗게 서릴만큼 날이 찼다. 오늘 하루 동안 해야 할 일과를 떠올려보며 영숙은 광에서 빗자루를 꺼내와 뒷마당으로 종종 걸어갔다.

“…어머, 아주머니!”

영숙의 눈에 띈 것은, 정혜사의 뒷문 앞뜰에 감나무 밑에서 오도카니 서 있는 웬 여인이었다. 일찍 온 수행자인가 싶어 자세히 그녀를 살피던 영숙은,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 여자는 바로, 얼마 전 부산에서 자신을 산속에서 구해주었던 그 젊은 아낙네였다. 여전히 흰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은, 까만 머리를 곱게 쪽진 채 손을 모으고 영숙 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영숙은, 생각지도 못한 손님에 빠른 걸음으로 여인에게 다가갔다. 반가운 미소를 띤 채 그녀 쪽으로 걸어가던 영숙의 어깨를 잡아챈 것은 다름 아닌 한 젊은 스님이었다. 속세의 나이로 서른이 막 넘은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 군복을 입은 채로 머리를 밀고 정혜사에 귀의한 몸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잘 얘기하는 법도 없고 말수가 적은 데다 때때로 어린 동자승들이나 영숙을 침통한 눈으로 바라보곤 하는, 영숙과는 별로 왕래도 없던 그가 갑자기 빠르게 다가와 영숙의 어깨를 잡아챈 것이다. 솥뚜껑만 한 손이 영숙의 마른 어깨를 쥐고 힘주어 제 뒤로 밀어내자, 영숙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평소에는 자신이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하고 혼자 외따로 도는 분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영숙은 알 길이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을 보러 온 게 분명한 손님 앞에서 이러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나 싶어 벗어나려고 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직하게 영숙을 붙잡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가면 안 된다.”

거의 몇 달 만에 들어본 그의 낮은 목소리였다. 영숙은 괜히 부아가 나서 대꾸했다.

“무영 스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팔이 아프니 놔주십시오.”

“…영숙이 너, 주지스님께서 찾으신다. 어서 가 보거라.”

“주지스님이요? 하지만…”

주지스님이 갑자기 자리에 앓아누운 것은 부산에서 돌아와 여행 짐을 다 풀기도 전이었다. 본인은 단순히 여독이 쌓인 것이라며 나이 탓을 하셨고, 다른 스님들과 수행자들, 동자승들은 모두 그를 걱정하며 영숙을 나무랐다. 자신이 귀신에 홀려 스스로 처신도 못하고 늙은 주지스님을 밤새 고생시켰다는 도훈 스님의 꾸지람에, 영숙은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애초에 계집아이를 제자로 들이신다고 하질 않나, 그 먼 길을 어린애까지 대동하여 다녀오셨으니 안 해도 될 고생을 곱절로 하셨다며 몇몇은 남몰래 혀를 차며 흉을 보기도 했다. 일간에서는 주지스님도 나이를 못 이기시고 치매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영숙은 그 모든 것에서 침묵했다. 그저 자신의 나이가 얼른 차서, 스님의 뒤를 이어받고 모든 가르침을 받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주지스님을 따라 집과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홀로 정혜사에 몸을 들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었다. 그저 영숙은, 자신의 스승인 그를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부족한 자신을 더 단련시키는 것만이 목표였다. 주지스님의 폐렴이 악화되어 결국 몸져누운 지 며칠째, 의원을 모시러 시내까지 나갔다 온 무영은 바로 어젯밤에 귀가한 차였다. 아직 별다른 차도가 없어 정신도 혼미하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영은 다짜고짜 영숙을 잡아채며 그를 보러 가라고 하는 것이다. 영숙은 조금 의아했지만 무영이 이끄는 대로 몸을 돌려 뒤뜰을 벗어나는 수밖엔 없었다.

“돌아보지 말거라.”

나름 눈인사라도 보낼 겸 다시 그 여인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무영이 영숙의 시선을 가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스님.”

“…저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 순간 영숙의 귓가로, 쏴아아아 하고 돌개바람이 불었다.

***

“스님, 스님!”

주지스님의 상태는 더욱 악화된 것 같았다. 영숙은 무영의 손에 이끌려 주지스님이 누워계신 별채로 갔고, 그곳에는 가쁜 숨 사이사이로 폐 기침을 토해내는 노인이 누워있었다. 평소보다 더 작고 가벼워진 손을 붙잡으며, 영숙은 눈가가 빨개지는 걸 느꼈다. 어쩌다 이렇게 급격히 악화되신 건지, 간밤 사이에 의사는 뭐라고 하던지, 대체 무슨 병이고 약을 쓸 수는 없는지, 영숙은 무영에게 연거푸 물었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영숙아…”

끊어질 듯 가느다란 노인의 목소리가 영숙을 불렀다. 의식이 잠시 돌아온 것인지, 기침을 하도 해 고목나무만큼 갈라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주지스님의 손을 꼭 붙든 영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숙이 여기 있습니다, 스님.”

“무영이는… 잠시 나가주렴. 할…얘기가…있다. 콜록, 콜록, 커흑!”

“말 길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영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주지스님은 영숙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그러나 강단 있는 어조로 말했다.

“영숙아. 너에게 충분히 배움을 주기도 전에 먼저 떠나는 스승을 용서해다오. 아직 너는 어리지만, 다른 승려들과 수행자분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될 게다.”

“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약한 말씀 마세요!”

“아니다…아니야…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너에게 말해줘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두서없이 들려도 이해해 주렴. 네가 성인이 되면 주려고 한 것이지만, 너에게 물려줄 것이 있다.”

“물려줄 것이라니…”

“정확히 말하면, 너의 할머님 되시는 분께서 내게 옛날에 부탁하신 물건이다. 그분과는 젊은 시절 같은 절에서 출가해 수행을 한 적이 있단다. 어린 소녀가 난데없이 비구니가 되겠다기에,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가 보다 싶었단다. 그래, 영숙이 너를 보면, 꼭 네 할미를 닮았어. 아마 너의 그 타고난 능력도… 쿨럭, 콜록 콜록, 큭…”

“스님…!”

노인은 한참을 말을 이어나갔다. 느리고, 띄엄띄엄 끊어지는 이야기였지만 영숙은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으려 노력했다. 주지스님, 젊은 시절 영지 스님이라고 불린 그는, 승려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숙의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영지의 스승이었던 그 절의 주지는 그녀를 받아주었으나, 오래 지내지 않아 그녀는 쫓겨났다고 했다. 계집애 주제에 부엌일을 하지 않고, 다른 선배 승려들을 제치고 건방을 떨며 오만불손하다는 이유였다. 영지는 그 일이 얼토당토않다고 여겼지만, 쫓겨난 그녀를 찾아가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당당한 걸음걸이로 절의 대문을 나섰다고 한다. 들어올 때 들고 왔던 작은 보따리 짐 하나를 머리에 인 채로.

건방지긴, 부처님이 노하실 게다, 어디서 저런 사특한 능력으로 누구 안전이라고, 길거리에서 굿이나 하며 살으라지! 영지의 선배 격 되는 승려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녀를 험담했고, 그 뒤로 그 절에서 그녀가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영지도 나이가 들고 주지가 타계하자, 그도 다른 승려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이곳에 정착을 했다고 한다. 맑을 정, 은혜 혜 자를 써 작은 절의 이름을 정한 뒤, 뜻이 맞는 동무들을 불러다가 하나둘씩 살림을 꾸려 수행을 하며 하나의 절로서 자리 잡았다. 영지의 나이가 예순 살이 되었을 무렵 편지가 하나 도착했는데, 발신인은 다름 아닌 영숙의 할머니였다. 오랜만에 어릴 적 동무를 만나는 것도 설레는 일인데, 그녀가 직접 이 산속까지 찾아온다고 하여 그는 매우 걱정을 했으나, 오랜만에 본 그녀는 매우 건강하고 기운이 왕성해 보였다. 용건은 즉, 바로 지난주에 자신의 첫 손녀딸이 태어났으므로 그 애의 앞날을 부탁한다는 얘기였다. 갑자기 난데없는 부탁에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느냐고 묻자, 호탕하게 한 번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자신이 다음 달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노인의 나이의 걸맞지 않게 지금 당장이라도 나무 장작을 팰 수도 있을 정도로 건장했던 그녀를 보며, 영지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녀가 가진 능력은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었다.

모든 일은 그녀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고, 그걸 가만두지 못하고 승려들은 그녀를 내쫓아버린 것이었다. 영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어딘가 당당하게 절을 떠나는 그녀를 막지 못했었다. 다 생각이 있는 거겠지, 앞날을 볼 줄 아는 아이니 뭐든지 알아서 잘 해내겠지. 실제로도 그녀는 그 능력으로 근방에서 유명한 무당 노릇을 하며 전국 팔도까지 돌았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예지한 것은, 다가올 자신의 죽음이었다.

“…할머니라니… 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그렇겠지, 그럴 게야. 네 할머니는 너와 최소한의 접촉만 하려고 하셨던 게다. 자신은 너무 많은 업보를 쌓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손녀를 볼 낯이 없다고, 그러니 나에게 대신 너를 부탁하면서, 이 물건을 전해달라고 했다.”

노인이 가리키는 대로 방구석에 있던 작은 서랍장을 옆으로 밀자, 바닥에 판자가 들리는 것이 보였다. 판자를 떼어내자 작은 걸쇠가 잠긴 낡은 상자가 있었는데, 한눈에도 수십 년은 건드리지 않은 듯 켜켜이 쌓인 먼지와 녹이 가득했다. 망설이던 영숙이 누워있는 그를 한번 돌아보자, 노인은 어서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숙의 손끝이 상자의 걸쇠에 닿는 순간, 단단히 잠겨있을 줄 알았던 걸쇠가 마치 바람에 풍화된 점토 조각처럼 사르륵 부서져 내렸다. 잠시 당황한 영숙이 상자를 머뭇거리며 만지다가, 이내 결심을 한 듯 녹슨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그럼 그게…”

“그래, 이 거울이다.”

영숙이 바닥에 놓인 거울에 시선을 두자, 영서도 그녀를 따라 바닥에 내려둔 거울을 응시했다. 가방에 넣어온 그 거울, 여 사장의 건물 지하에 꼭꼭 숨겨져 있던, 고모할머니가 수십 년 전에 부탁했다던 그 거울.

“…고조할머니께서는 정말 그 뒤로 돌아가신 건가요?”

“…워낙 환란의 시대였으니, 사실 언제라도 목숨이 위험한 때였단다. 게다가 네 고조할머니는 예사 분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정혜사의 선대 주지스님께서 전부 알려주신 게다.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할머니가 알려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영숙은 길게 얘기를 해서인지, 잔기침을 하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영서도 가만히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맑고 아름다운 광채가 도는 거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대께서 돌아가시던 그날 밤, 그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영서는 그녀가 말하는 ‘그놈’이, 곧 이전에 말했던 그 여인을 칭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름다운 여인의 인두겁을 쓴 범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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