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84화 (84/166)

84화

숙이에게.

숙아.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내 장례식이 모두 정리된 다음이겠구나.

항상 숙이 네가 내 서랍 속 경전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다른 사람은 들여다보지 않을, 그러나 숙이 네가 볼 법한 곳을 떠올리다 보니 이 책 사이를 선택했구나. 고루한 늙은이의 생각이라고 여기고 마저 읽어주렴.

너의 역사에 대해, 아니 너희들의 역사에 대해 내가 모든 것을 말한 후겠지. 그렇다면 나도 손쓸 도리가 없이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내 말을 잘 들으렴.

앞으로 괴로운 일도, 힘든 일도,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을 게다.

하지만 숙이 너는 분명 너 자신을 믿거라. 너 자신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답에 닿을 수 있단다. 인생은 원래 그렇단다. 힘들고 슬퍼도,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것을 꼭 믿고, 꼭 살아내려무나.

너의 할머니, 나의 오랜 친우이자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었던 그녀를 기억해라. 내가 해준 이야기들을 잊지 말아 다오. 너와 그녀, 아니 더 많은 그녀들을 위해 잊지 말아 다오. 제일 먼저, 그 거울을 가져온 그녀를 기억해다오.

내가 모르는 먼 훗날 너의 손주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너도 나와 네 할머니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거나 궁금해하지는 말거라.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지 않니.

내가 죽는 것에 너무 슬퍼하지도 말거라. 너의 할머니가 부처님에게 돌아가던 날, 나는 너에게 그것에 대해 알려주지도 못했잖니. 그러니 나 또한 그렇게 돌아간다고 생각해 주렴. 이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끝이 나기는 하는 건지, 기나긴 윤회의 끝을 거쳐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아직은 모르겠구나. 그러니 눈물은 보이지 말아 주렴.

하지만 숙아,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

너는 그 모든 것들을 충분히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정혜사를 잘 부탁한다.

***

“그날 내가 죽인 것은, 그저 그것이 머무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그 후로 그놈을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그 후로 그것의 털 한 오라기도 볼 수가 없었단다. 어쩌면 복수에 눈이 멀어서 더욱 그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야. 결국 다른 스님들의 설득으로 나는 그것을 찾는 걸 포기하고 절을 다시 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할미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가지 끝내고 눈을 감아야 한다면, 그 녀석을 끝내는 일일 게다. 비록 그놈과 내 목숨을 맞바꾼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영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울은 여전히 맑은 빛을 내뿜으며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영서는 왠지 그 거울도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물건이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의 흐름마저 바꿔버리는 힘을 가진 물건이었다.

“…영서야, 우리의 피에 흐르는 이 능력을 두고 말이다, 누군가는 축복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신의 뜻을 받든다느니, 뭐니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도 하더구나. 웃긴 말이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니.”

영숙은 잠시 숨을 들이켜더니, 그녀답지 않게 떨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저주란다.”

쾅쾅쾅-

“해강아! 나야, 영서! 문 열어!”

“영서? 영서라고?”

빗소리만이 가득 차오르던 산장 속 침묵이 깨진 순간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해강을 불렀을 때였다. 익숙한 영서의 목소리에, 해강은 불에 덴 듯이 벌떡 일어나며 되물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며 창문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빗속으로 또렷하게 들린 목소리는, 분명 영서의 것이었다. 해강은 반색을 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안 돼, 해강아! 잠깐만!”

“형, 왜 그래요? 영서가 왔잖아요, 어서 문을…”

“…너, 저 밖에 있는 게 영서라고 확신할 수 있어?”

석규가 진지하게 해강을 막아서며 묻자, 해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니. 하지만 해강이 들은 것, 지금도 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는 것은, 분명히 영서인데. 이상하게 석규의 말을 들은 순간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쿵쾅거리며 어서 문을 열고 비를 맞고 서 있을 영서를 끌어당기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석규는 완강한 태도로 해강을 막아선 채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고, 그 둘은 대치한 채 한참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소리와 창문이 떨리는 소리, 문을 두들기며 외치는 목소리가 한동안 산장을 가득 채웠다.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돌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영서의 목소리가 멎었다. 끝난 걸까? 아니면 영서가 돌아간 것일까? 해강은 무어라 입을 열고 싶었지만, 석규는 여전히 해강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석규야, 나다. 문 좀 열어.”

한참 후 들린 목소리는, 석규를 부르는 여 사장의 목소리였다. 틀림없는 그의 목소리에 석규도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으나, 해강처럼 당장 문을 열 것처럼 뛰쳐나가진 않았다.

“야, 뭐하고 있어? 왜 문을 꽁꽁 잠가 놔? 어서 열어.”

신경질적인 하나의 목소리였다. 비에 젖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상 늑장을 부리며 문을 열지 않는 석규를 질책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해강과 석규는 문에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를 죽여 문에서 물러났다.

으르릉-

“…이, 이레야…?”

잠든 줄 알았던 이레가, 마루 위에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네 발로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까맣고 맑던 눈동자의 동공이 확대되고, 여 사장을 닮은 붉은빛이 도는 두 개의 귀가 머리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목을 긁으며 위협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 이레는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작은 구미호가 바라보는 곳은 단 한 곳이었다.

문밖.

이레는 분명 문밖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석규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이레를 덥석 안아 막은 동안, 해강도 문에서 떨어져 누워 있는 주민을 막아섰다. 문을 두드리는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로 된 문은 조금 더 있으면 금이라도 갈 것 같았다. 한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문밖에서는 어느새 여러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해강아, 주해강! 나야! 문 열라니까!”

“석규야! 나라고! 안에 있지?”

“야, 당장 안 열어?! 빨리 열어!!”

쾅쾅쾅쾅쾅-!!!

우지끈-

“으…!”

들썩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던 문이, 잠금 걸쇠가 부서지지 직전 멈췄다. 눈을 감으며 신음하던 해강은, 곧바로 모든 소음이 정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의 흐름마저도, 귀를 찢는 듯 울리던 창문과 산장의 소음까지도.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니, 석규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레와 문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석규야, 나 왔다.”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두식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비명처럼 산장을 부술 듯 울리던 목소리들은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조용해졌고, 이레는 다시 맑은 눈을 빛내며 석규의 팔에 안긴 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여우 귀와 털을 세우며 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갑고도 기쁜 얼굴이었다. 석규의 팔 사이에서 쏙 빠져나간 아이가 타닥타닥 걸어 문으로 다가갔다.

“앗, 이레야, 잠…!!”

빠르게 문을 열어젖힌 이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통 비를 맞은 채 장작더미를 든 두식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석규는 아직도 얼떨떨한 듯, 의심과 당황이 반씩 섞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해강은 여전히 경계 어린 얼굴로 구석에서 주민을 감싼 채 두식을 노려보았다.

“삼촌! 진짜 삼촌이네! 우와!”

“오는 길에 비가 쏟아지길래, 왠지 촉이 안 좋아서 금방 돌아왔다. 문 앞에 뭔가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가까이 오자마자 사라져 버렸어. 다들 괜찮냐?”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에게 안기는 이레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두식이, 방금 전까지 산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도 어렵다는 얼굴로 석규와 해강을 번갈아 보았다.

해강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