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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85화 (85/166)

85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문 씨 성을 가졌으나, 그 외엔 다른 기록이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저 평범한 규수였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가진 힘은 평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언젠가 그녀는 백호가 나오는 꿈을 꾸었고, 남들과는 다른 기이한 일들을 겪게 되었다. 항간에서는 그런 그녀를 두고 문 영감 댁 딸이 미쳐버린 게 아니냐, 하는 험담도 돌았으나, 그녀는 훗날 궁 안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기는 물론, 일부 목격담에 따르면 동물과도 소통하고 온갖 귀신과 요괴들도 그녀의 손 아래였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요절한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테지만, 모든 일들이 그러했듯 그녀의 이상한 죽음조차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고, 그보다 작은 민란이 한 번 더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기이하고 신기한 능력을 가졌다 한들, 젊은 여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거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간에서는 그녀의 비상하고도 신비로운 능력과 뛰어난 언변, 정숙한 외모로 왕의 첩질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 야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반박이 대다수였다. 실제로 당시 궁에 자주 출입을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재판 판결에 대한 도움과 벼슬을 지내던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긴급하게 출입했다는 기록뿐이었다. 남은 기록 중에는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사실 양아버지고, 그녀의 친 부모는 일찍이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근거를 알 수는 없다.

어느 날 그녀는 아흐레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갓난쟁이 아들과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딸을 두고서였다. 그녀의 남편은 무신의 벼슬을 얻은 다음 해에 바로 전쟁에 동원됐다. 시댁 부모가 어린 것들을 대신 봐주러 그녀의 집에 왔고, 정확히 아흐레가 지나던 밤, 아침 해와 함께 그녀는 지친 기색으로,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빛나고 총기 어린 눈을 한 채 돌아왔다.

품에는 웬 거울을 끌어안은 채 말이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나뭇가지를 뒤흔들던 밤이었다.

부인은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초의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가는 목과 창백한 얼굴은 흰 손 위에 얹혀 있었고, 손은 세워 앉은 무릎 위에 놓인 채였다. 그녀의 앞에는 낡은 이불을 덮은 두 명의 작은 아이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집까지 찾아오는 짓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말도 없이 사라지신 겁니까.

그녀의 맞은편,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그러나 창호지 너머로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은 남자가 물었다. 그는 남들의 눈을 피해 밤 부엉이가 울기도 전에 소리 없이 마당에 서, 문살을 두 번 두드리고 세 번 마루를 두드렸다. 그가 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던 그녀였지만, 그 익숙한 약속과도 같은 다섯 번의 울림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가만히 방 안에 앉아있었다. 남자는 근방의 작은 마을의 나그네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무장한 차림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행선지가 어딘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감한 얼굴로 잠든 딸의 얼굴을 쓸어보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남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남은 시간이 거의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원하는 답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전쟁에 나간 부군을 기다리는 몸이야. 이전처럼 자네와 말을 섞고 정다이 지냈다는 것은 나에게 이젠 잊어야 하는 과거라는 말일세. 자네가 내 말을 듣지 않을수록 난 곤란해질 것이고, 그러면…

-영신 아씨.

-…내가 말했지. 나는 너를 그저…

그녀의 어린 딸이 눈을 찡그리며 칭얼거리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둑한 방을 밝히고 있던 등잔불이 순간 흔들거리며 그들의 그림자를 키웠다. 어린아이의 잠꼬대가 멎을 무렵,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비단 내가 혼인을 한 몸이어서뿐만이 아닐세. 나는 자네를… 그저 착하고 좋은 아우라고 생각하며 잘 해준 것뿐이야. 자네에게, 그리고 백부님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나와는 이제 상관이 없어. 나는 출가외인이니까. 부탁하건대, 다시는 찾아오지 마.

-아씨.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네.

그녀는 완고했고, 더 이상 대화는 끝이라는 듯 몸을 돌려 앉았다. 남자는 한 번도 그녀의 의견을 꺾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잠시 앉아있다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그들을 떠났다.

남자는 그다음 날, 전쟁터로 떠났다.

.

.

.

“그래서 그 남자는 전쟁에 휩쓸려 죽었군요? 짝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혜리가 묻자, 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은령이 나타날 것이다. 이도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작게 대답했다.

“글쎄… 짝사랑은 아니었지.”

***

비바람에 시달린 것인지, 두식이 항상 무스로 깔끔하게 정돈하던 머리칼은 헝클어진 채였고, 그의 단정한 셔츠도 바지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두식은 두식이었다. 미묘하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이레와 석규는 물론, 해강까지도 그가 진짜 두식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아직 사장님은 안 오셨나? 나한테는 그놈을 잡으러 간다고 하시더니. 우리라도 같이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두식이 형… 하, 형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형, 혹시 구슬 가루 가진 거 있어요?”

“구슬? 휴대용은 없는데. 왜? 누구 다쳤냐?”

두식이 장작더미를 산장 구석에 잔뜩 내려놓고 나서야, 나뭇가지와 비로 젖은 손을 탁탁 털며 마루로 다가왔다. 윗목에 가만히 누워 작게 숨을 고르고 있는 주민의 이마를 짚어보던 두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상태는 슬슬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얘는 왜 앓아누워있냐? 감기?”

“혼이 먹힌 것 같아요. 전부는 아닌데… 산장에 들어오기 전에 놈한테 홀린 것 같아서. 다행히 구슬이 하나 있어서 쓰긴 했거든요.”

“하나 다 쓴 거면 괜찮을 거다. 사장님하고 하나 누님이 그 놈만 잡아오면 혼도 다시 풀려나겠지.”

두식은 솥뚜껑만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담요를 집어 주민의 몸에 덮어주었다. 해강은 의외로 그의 태도에 섬세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석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저씨, 혹시 산장 앞에서… 그놈 못 봤어요?”

“…맞아, 그러고 보니 형이 오기 전에 분명, 이 앞에 와 있었는데.”

“멀리서 봤을 때 뭔가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기는 했었다. 그런데 비바람이 심하기도 하고, 내가 문 앞에 다가왔을 때는 이미 사라진 후였어. 내 기척을 느낀 거겠지. 하나 누님이었으면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워낙 빗속에서는 냄새를 못 맡으니까…”

“그쪽은 대체 어디까지 간 거람. 이렇게 근처에 있는 놈의 기척을 눈치 못 채고 다른 곳까지 갔을 리는 없는데.”

석규가 엄지손톱을 물며 중얼거리자, 두식은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날씨가 문제야. 안 그래도 비 때문에 냄새가 금방 흩어지는데, 바람이 이렇게 심하니 어느 방향에서 냄새가 실려 오는 지도 구분하기가 어려워. 꼬맹이들은 잘 데리고 있었냐?”

“아이고, 말도 마요, 진짜. 이레는 냄새 맡고 폭주하지, 주민이는 쓰러져서 혼이 빠질랑 말랑하지, 얘도 그놈한테 홀려서 여기 위치까지 말해주고…”

“아, 석규 형!”

“위치를 말해주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석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두식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이 앞까지 와 있었던 거군. 하지만 그건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다. 너무 마음 쓰지는 마라.”

“네…”

“중요한 건 사장님과 하나 누님이 아직도 기별이 없다는 건데… 비바람이 아무리 쳐도 통신이 끊길 정도로 산골짜기는 아니란 말이지. 하다못해 문자로라도…”

“형, 그래서 말인데, 영숙 씨하고 영서의 힘을 빌리면…”

“하지만 영숙 씨는 지금…”

두식과 석규가 목소리를 낮추며 뭔가 의미 모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해강은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에 손가락을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이레는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건지 해강의 옆구리에 파고든 채 얼굴을 떨어트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확실히 이레의 구슬 덕분인지, 주민의 숨소리가 조금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눈은 뜨지 못하고 있지만.

“…어…?”

정말 찰나의 순간.

번뜩, 아니 그보다는 팟, 하는 감각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해강은 머릿속에 가벼운 번개라도 친 듯이 스쳐간 기운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짝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낡고 습한 산장과, 밖에는 비바람과 휘몰아치고, 두식과 석규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해강은 방금 느낀 감각에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눈을 깜박거렸다.

영서다.

영서가 왔어.

근거도 없는 확신과 희망의 말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해강은 알 수 있었다.

영서가, 오고 있어.

멀지 않은 곳에서, 영서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해강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든 순간, 낡은 산장의 문을 누군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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