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이상하다, 이상해.”
여 사장은 귀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한 번 푸르르 털어냈다. 귀에 물이 들어간 건지, 아니면 젖은 털 때문에 물기가 스며든 건지 귀가 먹먹하고 불편했다. 으, 귀에 물 들어가면 빼기도 힘든데 말이지. 마치 거대한 강아지처럼 뒷발을 들어 귀를 긁어대자, 하나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개도 아니고 뭐 하는 짓입니까? 품위 없긴.
"뭐? 이 자식이 사장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구미호로서의 품위를 지키세요."
"그치만 귀에 물 들어가면 짜증 난다고~ 그리고 이 빗속에 이만한 털 가죽을 쓰고 달리는 게 얼마나 습하고 귀찮은 일인 지나 알아?!"
"저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이래서 파충류 것들은, 쯧. 아주 냉혈한이야."
거대한 구미호의 위에 올라탄 하나는 쏟아지는 빗줄기와 여 사장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손바닥으로 눈 위를 가린 채 산 너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냄새가 섞이고 있어요. 사장님은 괜찮으십니까?”
“네가 그런데 나라고 오죽하겠냐. 난 냄새보다는 기운을 따라가는 쪽이라서.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두 개로 쪼개졌어. 기운이.”
하나는 귀를 의심했다. 기운이, 두 개로 갈라지다니? 무슨 소리인가.
“…사실은 냄새도, 한 방향에서 나는 건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애초부터 한곳에서 나는 게 아니었던 거지.”
여 사장은 푸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턴 채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처음 산장을 나섰을 때보다는 비가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산속을 쏘다니기에는 알맞지 않은 날씨였다.
“…갑자기 불안한걸.”
“…감이 좋지 않네요.”
그 순간, 여 사장의 고개가 꿈틀거리더니 코가 씰룩거렸다.
“역시 돌아가는 게 좋을까요, 사장님?”
“어라, 숙이가 왔네.”
“예? 영숙 씨가요?”
“영서도 같이 온 모양이야. 쯧쯧, 그렇게 단단히 일러뒀건만, 결국 올라오고 말았어.”
“하지만… 어째서… 아, 아마 뭔가…”
하나가 적잖이 놀란 듯 말을 더듬다가,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 사장은 몸을 일으켜 젖은 털과 꼬리들을 털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이렇다니까. 인간들은 정말 제멋대로지. 충고를 해줘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
“……웃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사장님.”
“들켰네.”
이가 드러나도록 히죽 웃은 구미호가, 가볍게 펄쩍 뛰어 바위 밑으로 내려와 힘차게 나무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고 여 사장의 뒷덜미에 몸을 숨긴 하나는, 그저 그녀의 오랜 친우이자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인간인 영숙만을 걱정할 뿐이었다.
“역시 ‘그 피’는 못 말리는 것 같네요.”
“그래서 내가 60년 넘게 구경하고 있는 거 아냐.”
재미있으니까. 키들대며 웃는 여 사장의 목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하나는 못 말리는 건 둘 다 매한가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밖으로 나와 마주한 비는 생각보다 더욱 세차게 내리붓고 있었고, 강한 바람은 다 큰 어른조차도 휘청거리게 할 정도였다. 영서는 노란 비옷을 꽁꽁 싸매듯 입은 채 한발 한발 신중하게 걸었다. 흰 비옷을 입은 영숙은 오히려 영서보다도 굳건한 자세로 성큼성큼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 조심하세요! 빗물이 흘러서 흙이 질어요!”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할머니 귀 안 멀었다, 영서야. 흙을 밟지 말고 나무뿌리 부분을 밟으면 덜 미끄러울 거야. 앞을 잘 보고 걸으렴.”
영숙은 굽을 허리를 하고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훅훅 올랐다. 영서도 낑낑대며 그녀가 밟은 자국이 난 부분을 최대한 따라 밟으며 산을 올랐다. 얼굴은 이미 비로 젖어 눈과 입에 빗방울이 튀었고, 가파른 땅의 경사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이미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세찬 빗방울도, 질은 땅도 아니었다.
정혜사를 나서자마자, 정확히는 정혜사 뒷산을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뒷목이 찌르르할 정도로 기분 나쁜 감각이 영서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꼭 누군가가 근처에서 맴돌며 영서를 훔쳐보기라도 하는 느낌에, 영서는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시선의 정체를 찾으려 애썼다. 시야에 걸리지 않도록, 그러나 희끗희끗하면서도 희미하게 눈가에 어른거리도록, 무언가가 자꾸 영서의 주변을 맴돌았다. 비가 내려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어스름한 기운 너머로 영서는 이 귀찮고도 신경에 거슬리는 놈의 정체가, 문득 영숙이 말한 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서가 느낄 정도면 영숙도 분명 이 기이한 기운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영숙의 발걸음은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고, 영서는 아무리 조심조심 따라가려 해도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고 넘어질 뻔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어 할머니에게 다시 말을 걸려던 찰나였다.
“영서야, 그거 아느냐?”
뒷짐을 진 채 빠른 속도로 앞서나가던 영숙이 물었다. 영서는 빗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잡아내려 노력하면서 되물었다.
“네? 뭐가요?”
“산속에서는 말이다, 일행과 같이 산을 지날 때에는 일행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단다.”
“이름을요?”
“주로 나무꾼이나 심마니들 사이에서 유명한 규칙 같은 거지. 누구야, 누구야, 라고 부르지 않고, 서로의 성씨나 어이, 이봐, 하고 부른단다. 산속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면, 부르지 않은 것이 찾아올 수도 있고.”
순간 영숙이 걸음을 멈췄다. 영서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먹구름으로 어둑해진 하늘과 여전히 내리붓는 빗줄기 사이에서 둘은 그렇게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뺏길 수도 있거든.”
똑똑똑-
“영서에요! 영서가 분명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해강을 석규와 두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산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나, 확실히 그 태도는 아까 전의 문을 부술 듯 두드리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레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주민의 옆에 웅크리고 누워 담요를 덮고 잠들어있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겠다고? 영서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렇지만…”
“나야, 문 열어.”
문밖에서 들려온 음성은 분명 영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그 목소리에 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석규는 여전히 해강을 막으며 고개를 내저었고, 두식은 미간을 찡그리며 문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해강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영서가 맞다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게 진짜 영서라면, 왜 우리 이름을 안 부르겠어?”
“이름을 부른다고 진짜 영서인 건 아니잖아요. 아까도 분명…”
“그래, 네 말 대로야. 그러니까 우리가 영서라고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없다는 거잖아. 무턱대고 열려고 하지 좀 마, 해강아.”
“하지만!”
그때 문밖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비바람 소리에 섞여 잘 들리진 않았지만, 산장의 모두가 듣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여기가 아닌가 봐요. 분명 무슨 산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전화만 잘 들렸어도.”
“다른 쪽으로 가면 바로 다른 산장이 있기는 하다만, 이쪽이 큰 산장이라… 일단 저쪽으로 다시 가보자꾸나.”
영숙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석규와 두식이었다. 두식은 거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랐고, 석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해강은 분명 영서와 더불어 그의 고모할머니 목소리까지 들린 것은 맞지만, 대체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놀란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둘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영숙 씨가… 왜? 대체…”
“…우리 때문인가. 젠장…”
“한 달도 안 남지 않았어요? 대체, 어째서…”
“딱 한 달. 한 달만 남았었지. 하…”
“저…저기… 무슨 얘기에요, 대체?”
“…일단, 문부터 열어주자. 진짜 두 사람이 맞는 것 같으니까…”
해강의 영문 모를 얼굴을 뒤로하고, 석규는 한숨을 쉬며 문으로 다가가 잠금을 풀었다.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것은, 역시나 놀란 얼굴을 한 영서와 영숙이었다. 노란 비옷과 흰 비옷을 나란히 입고 선 영숙과 영서는 비에 맞은 생쥐 꼴이었다.
“여, 영서야!”
“뭐야, 안에 있었으면서 왜 문도 안 열어?”
“영서야아아아….”
해강은 거의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달려가 영서를 흠씬 부둥켜안았다. 간신히 말린 티셔츠가 다시 빗물로 젖어 들어갔지만,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