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빗소리가 세차게 귀를 때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시야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산 중턱에서, 영서는 눈을 깜빡이며 영숙을 쳐다보았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요?”
“그래. 그런 말도 있지 않니? 꿈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세 번 부르거든,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저승사자가 날 데려가려고 명부에 적힌 이름을 부르는 거라고 말이다.”
모를 리가. 영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바로 얼마 전, 영서가 영숙에게 했던 얘기가 아닌가.
자신에게 놓인 운명과,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 그리고 일직차사와 명부에 대해. 갑작스럽게 터진 헛웃음은 점점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자, 영숙은 대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영서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영서야?”
“…하하, 나도 참, 비가 너무 내려서 판단력이 흐려졌을 줄은.”
영서는 왜 그렇게도 분명했던 사인을, 이제야 눈치챈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비옷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묵직하게 작은 웅덩이로 고여 떨어졌다.
뒤를 따라오던 영서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가던 영숙도 발을 멈췄다. 다시 한번 영서를 불렀지만, 영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대로 선 채, 대답하지 않았다.
“영서야, 거기서 뭐 하는 게야? 얼른 따라오지 않고. 비가 쏟아지잖니.”
“할머니를 어디다 숨겼어?”
“뭐?”
“언제부터지? 산에 오를 때부터? 아니, 아까 그 이상한 나무를 지나칠 때부터인가?”
영서는 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손을 짚고 넘어온 한 이상한 나무를 기억했다. 그저 비에 젖은 데다 뿌리 부분에는 흙탕물이 고여 손으로 나무를 짚고 점프하듯 건너뛴 나무였지만, 손바닥이 닿은 순간 영서는 온몸에 정전기를 맞은 것처럼 찌르르, 하는 감각을 느꼈었다. 어디선가 느껴본 것 같은, 익숙하지만 서늘하고 기분 나쁜 감각. 그때부터인가? 하지만 그것도 그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도 일단 빗속을 헤치고 영숙을 따라 해강과 다른 사람들이 있는 산장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 그저 잊어버리고 걸음을 옮겼었다. 열악한 환경과 계속해서 거세지는 빗물 때문에, 제대로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서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영서는, 아까부터 한곳을 빙빙 돌고 있었다.
같은 나무를 열다섯 번째 지나쳤을 무렵부터 꿈에서 깨어 몸을 경련하듯, 영서는 그렇게 걷던 것을 멈추었고, 영숙도 갑자기 의미 모를 이야기를 던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영숙이 아니었다.
의아한 얼굴로 왜 그러냐는 듯, 걱정스럽게 자신을 건너다보던 영숙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진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니, 이제 영숙은 웃고 있었다.
-……역시 그년 핏줄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구나.
“할머니가 네까짓 것한테 당하셨을 리는 없고. 분명 내 눈을 가리고 날 홀려낸 거겠지. 할머니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고.”
영서는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눈앞에 선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흰 비옷을 쓴 영숙이었지만, ‘눈’을 뜬 지금은, 흰 털이 길고 북슬북슬 하게 난 짐승이 세로로 길게 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빨갛게 벌어진 입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몇 겹은 되어 있는 듯,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안에는 긴 혀가 뱀처럼 날름거렸고, 비에 젖어 윤기가 도는 희고 긴 털은 마치 탈춤을 뒤집어쓴 것처럼 풍성했으나 얼굴 부분에는 털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영서는 그 얼굴과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을 느꼈다. 저절로 발밑이 아득해지고 이가 악 물리는 감각.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하지만 머릿속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귓가를 메우던 빗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들을 속이는 것이 아무래도 쉬우니까 말이야. 하하하… 하지만 너무 늦었어, 이미 네가 나를 인지한 순간부터… 너는…히히… 나한테 붙잡힌 거란다… 아하하하……
새빨간 입이 죽 벌어지면서, 거의 얼굴의 반절이 찢어지는 것처럼 웃는 그것을 보면서, 영서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흔들었다. 빗방울들이 너무나 성가셨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할머니에 대해 걱정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남들을 믿고,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제대로 해내는 것, 그게 우선이었다.
-호호호…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너는 이제 끝났단다, 얘야… 하하하하… 드디어 잡았다, 드디어 잡았어…… 아하하하하하하….
“…붙잡긴 뭘 붙잡았다는 거야, 이 기분 나쁜 짐승 새끼가…”
영서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비옷 사이로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비에 젖을까 고이 접어 챙겨온, 누렇고 하늘하늘한 종이 다발이었다.
-으응? 그 빈 종이 쪼가리로 뭘 하려고? 설마 나를 그따위 낡은 부적으로 잡겠다는 건 아니겠지.
“종이 쪼가리라니, 말이 심하네.”
영서는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최대한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싸움에서 지면 끝이다. 그래,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거니까.
-아하하하…. 히히히… 그래, 그래… 마음대로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주문도 적히지 않은 종이로 뭘 하겠다고. 어차피 전부 비에 젖어버릴 테니…
“읏…. 하하, 방심한 건 오히려 네 쪽이야. 너, 네 진짜 몸은 다른 곳에 숨겨두고 지금 내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있지?”
영서를 감싼 비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거의 태풍이나 다름없는 풍속과 기압에 휘청거리던 영서는 간신히 몸을 숙이고 두 발을 딛고 섰다. 왼쪽 주먹 안에 쥔 부적들이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지만, 구겨지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는 듯 영서는 부적을 꾹 쥐었다. 그러나 그런 영서 앞에 털 한 올도 날리지 않은 채, 기이하고도 장대하게 선 그것은 시뻘건 입을 꿈틀거리며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제대로 짚은 모양인 듯했다. 영서는 씩 웃으며 오른손으로 제 비옷을 헤치고 목덜미를 더듬었다. 다행히 비옷 안에 들어가 있어서인지, 세찬 비바람에도 목에 건 것은 얌전히 매달려 영서의 손안에 들어왔다.
“…어디서 반 쪽짜리 주제에 까불어.”
흰 털북숭이가 자리에서 움직이려던 순간, 영서는 손안에 든 것을 입에 물었다.
삭-
“빈 부적이 아니라는 것도 못 알아챌 정도로 덜떨어진 새끼한테 먹힐 생각은 없거든!!!”
영서는 힘껏 칼집에서 빼낸 은장도를 휘둘러 자신의 왼쪽 손을 푹, 하고 찔렀다.
타는 듯한 고통과 팍- 하고 무언가 터지는 감각과 동시에, 손바닥과 손목, 손가락을 타고 뜨거운 핏방울들이 튀었다. 주먹 안에 쥐어진 노란색 부적은 삽시간에 피로 젖어 드는가 싶더니, 기이한 빛을 내뿜었다.
분명 빈 부적이었을 텐데.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그저… 빈…
영서의 목에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박히기 바로 직전,
영서의 왼쪽 손이, 아니 피로 맺힌 주술의 글자들이 그것의 얼굴에 닿는 것이 먼저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네가 그렇게 찾던 ‘그 피’다! 어디 맘껏 얼굴에 발라보든가!!!”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이, 이런!!!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흰 털북숭이가 내지르는 비명은 과연, 귀를 찢고도 머리를 멍멍하게 울릴 정도로 끔찍하고 괴기한 소리였다. 영서는 굽히지 않고 이를 악문 채,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도 왼쪽 손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얇고 팔락거리는 부적들이, 영서의 더운 피로 적셔져 새겨진 글자들이 영서의 힘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수백 년 동안 인간의 피와 살점을 먹고 뒤틀린 채 살아온 괴물의 눈을 멀게 했고, 얼굴을 태우기에 충분히 밝고 강한 빛이었다.
손을 타고 흘러나가는 힘과 피를 느끼면서, 영서는 젖은 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피를 흘린다면,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영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을 해치우고 난 다음에, 내가 이 자리에서 쓰러지게 되면? 누군가 날 발견할 수나 있을까? 이대로 산속에 쓰러지면… 그다음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망설일 수는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놈을 없애는 게, 지금 영서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지금 놓친다면, 다음 기회는 없어. 몇 십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영서는 이를 악문 채, 눈에 힘을 주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네놈 무덤이 되어야겠지!!!
반 쪽 짜리라도 상관없었다. 반쪽을 해치울 수 있다면, 나머지 반쪽도 해치울 수 있다는 얘기니까. 여기서 쓰러져도, 분명 누군가 발견해 줄 거야. 그래, 누군가가.
영서는 별안간 뇌리에 떠오르는 얼굴을 그려보았다.
너라면 나를 찾아주겠지.
온 밤을 새워서라도, 내가 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찾으러 다시 와주겠지.
그것만으로 충분해.
…주해강.
너를 믿을게.
영서는 마지막까지 힘을 끌어모아 왼손으로 전부 흘려보냈다.
흡사 폭발하는 것과도 같은 빛이 번쩍, 하고 내리 꽂혔고, 귀가 먹먹하도록 소리를 지르던 그것의 흰 털들이 까맣게 타 바닥에 소복이 쌓이고 나서야, 영서는 털썩 쓰러졌다.
차가워지는 뺨에 닿은 빗방울들을 느끼며, 영서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