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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88화 (88/166)

88화

영서는 꿈을 꿨다. 오랜만에 생생하게 꾸는 꿈이었다.

꿈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영서가 바로 자신의 방 침대에 잠옷까지 입은 채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뭔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던 것 같은데. 내가 이겼나? 아니면 진 건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영서는 감은 눈을 천천히 떴고, 언젠가 보았던 익숙한 상황에 눈을 깜박거렸다.

-이제 눈 뜨네, 꼬맹이.

“…아저씨.”

-우리, 오랜만이지?

일직차사는 언제나와 같이, 영서의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채 턱을 괴고 비뚜름하게 웃는 얼굴로 영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이 열린 건지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눅눅하지 않고,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데다 시원한 바람. 어느새 그가 영서의 이마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그 손길이 이상하게 그립고 정다운 기분이 들어 영서는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꽤 이런저런 일로 바쁜 모양이네.

“아저씨야말로요.”

-나야 항상 바쁘지. 안 그래도 바쁜데, 너무 무리하고 있지는 않나 해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보러 온 거 아냐.

“그거 참 고맙네요.”

-말하는 본새하고는, 귀엽게 좀 굴어라.

귀엽게 구는 게 뭔데요, 하고 물으려다가, 영서는 왠지 말대꾸는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입을 다물고 뾰로통한 얼굴로 눈을 흘기자, 남자는 쿡쿡 웃으며 엄지로 영서의 가지런한 눈썹을 슥슥 문질렀다. 퍽 다정하고 고요한 손길이었다.

“이번에는 또 뭔데요.”

-뭐냐니?

“꼭 시킬 거 있거나, 뭐 오지랖 부릴 때만 꿈에 나오잖아요.”

영서의 말에 남자는 가만히 눈을 기울여 영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영서는 그의 눈빛에 왠지 모를 고독감과 서운함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영서 혼자만의 감상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 이건 네 꿈이지. 네가 꾸는 꿈이니까 내가 나와서 무슨 소리를 한다 한들 무시하면 그만 아니냐.

“그렇지만…”

영서는 왠지 말문이 막혔다.

“그럼, 그동안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전부 내 꿈이었어요?”

-글쎄, 어느 쪽일까. 꼬맹이 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럼, 질문을 바꾸자. 너는 어느 쪽이 더 좋은 걸까?

영서는 문득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저승차사가 왜 이러나, 사람 갖고 놀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정말로 그동안 꿈에서 만난 남자의 모습들은 전부 꿈의 허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뇌가 이끌어낸 형상으로 내가 멋대로 원하는 남자의 반응과 모습을 무의식중에 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전부는 아닐 텐데. 전부, 내가 상상한 것만 있지는 않을 텐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디부터 꿈이었고, 어디까지 진짜 이도였던 걸까?

영서는 알 수가 없어, 그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꿈속에서는 마음대로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꿈이라서. 마음만 같아서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 손을 짚고 일어나 머리맡에 앉은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화하고 싶은데. 아니, 애초에 내가 아저씨랑 무슨 ‘대화’를 해야 한다고? 권영서, 하도 귀신 보면서 살다 보니 이젠 저승차사한테까지 친밀감 느끼냐? 영서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몸짓에 영서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주던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아저씨,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요, 그냥 이딴 꿈에서 말고, 현실에서 제대로 만나러 와주면 안 돼요?”

그는 꽤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며 영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이라 대답한 것 같았지만, 영서는 그의 손바닥이 자신의 두 눈을 덮음과 동시에, 장막이라도 쳐진 듯 가려진 눈과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그것도 이 빗속에서, 전화도 똑똑하게 들리질 않고.”

“영서야, 너…”

“영숙 씨,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약속한 날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왜 섣불리 이런 짓을! 그전까지는 위험하다고 사장님이 몇 번이나 당부하셨잖습니까?”

비옷을 입은 영서의 손을 잡으려는 해강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석규와 두식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황과 애매한 책망 비스름한 것이 어려 있었다.

“그날이라뇨, 할머니가 산에 올라오시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해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비옷을 입은 영서와 영숙은 산장의 문턱을 경계로 서서 한 발짝 밖에서 비를 맞고있었다. 어서 안으로 들이고 싶은 해강의 마음도 모르고 석규는 착잡한 얼굴로 영숙을 살펴보았다. 영숙은 그저 은은하게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숙 씨는… 뭐라고 해야 할까,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삼재三災여서, 안식년을 지내려고 정혜사에서 머물고 있는 거야. 평소에는 몇 주 정도는 시내에 있는 영숙 씨의 본가에 가거나, 아니면 다른 친척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아무튼 절에 내내 있는 건 아니야.”

“삼재요? 그렇지만… 삼재라고 굳이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오는 삼재와는 전혀 달라. 일종의 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네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이번 안식년에는 절대로 힘을 쓰지 않고 무조건 절에서만 머무르면서 기를 정화하면서 지내왔어.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항상 사람을 보내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도 해온 거고. 영숙 씨, 이 산에도 올라오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석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영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말고, 갑작스럽게 숨을 들이켜며 말을 멈췄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두식이 의아한 얼굴로 석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

“…저, 석규…형?”

석규의 발은, 열린 문 사이의 문턱을 밟고 조금, 아주 반 발짝 정도로 밖에 난 땅을 디디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퍼지는 순간,

“문 닫아!!!!!”

일종의 짐승이 내는 으르렁 소리와도 같은,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우레와 같은 고함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해강은 깜짝 놀란 와중에도 그 말에 홀린 듯이, 반사적으로 문고리를 잡고 힘껏 잡아당겨 문을 쾅 닫아버렸다. 왼 팔로는 이미 석규의 어깨를 잡고 힘껏 끌어당긴 후였다.

“바, 방금…!”

“…아니었어.”

멍한 얼굴의 석규가, 영숙에게 말을 걸며 다가가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뭐가 아니에요?! 게다가 방금 그 목소리는…”

“…아니었어, 영숙 씨가. 영서가, 아니었어.”

“네?!”

그때, 닫힌 문 너머로, 뭔가가 터질 듯한 비명을 쏟아내는 것이 들렸다. 꿈에서라도 들을까 무서운,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끔찍한 비명소리였다. 마치 산 짐승의 목을 따는 것 같기도, 인간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억눌리고도 활활 타오르는 듯한 비명소리였다. 그 비명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온몸으로, 머리통을 타고 전해지는 소리였다.

비명을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젖은 진흙 바닥을 구르는 소리, 그르릉 거리는 짐승이 위협하는 소리 비슷한 것이 연달아 들렸다. 다시 문을 열 엄두가 나지 않는 소리들이. 해강은 그 몇 초 안 되는 순간이, 마치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온몸에 기운이 쑥 빠지는 감각이었다.

“…영서가… 아니라면…”

“…나도…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영숙 씨의 눈에… 빛이 돌지 않았어. 꼭 마네킹처럼.”

석규는 여전히 높낮이가 없는 말투로, 마치 도깨비불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실제로 혼이 반쯤 빠진 건지도 몰랐다. 문턱 밖으로, 그의 발이 산장 밖으로 반 발자국 정도 나간 만큼 말이다.

“그리고…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났어. 문을 나서자마자… 공기가 다른 느낌. 그건… 산 자의 냄새가 아니야.”

“석규야, 정신 차려 임마! 어디 이상한 곳은 없어?!”

“…괜찮아요, 저는… 그냥 조금 놀라서… 대신 문을 닫아줘서 고맙다, 해강아. 난, 순간적으로 몸이 안 움직이는 바람에…”

“아니에요, 그것보다… 조금 전에, 문을 닫으라고 한 건… 누구였죠?”

그것은 분명 석규의 목소리도, 하물며 두식이나 주민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사람의 목소리하고는 동떨어진 듯한, 어딘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묻어있는 그런 외침이었다. 사실 그 소리를 실제로 들은 게 맞는지, 단지 자신의 상상이었던 건지 해강은 그런 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확실히 그가 맞았다. 해강은 문을 닫기 직전, 그 좁은 문의 틈새로 얼핏 보인 붉은 털을 떠올렸다. 그래, 잘못 본 게 아니야. 분명히…

“…드디어 돌아오신 거야.”

석규의 한층 안정된 말투에, 해강은 그제야 본능적으로 아, 정말로 그가 돌아왔구나, 하고 안심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구미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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