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89화 (89/166)

89화

여 사장과 하나가 발걸음의 방향을 돌린 것은 ‘그것’을 알아챈 직후였다. 기운이 쪼개어진 것,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방향에서 그것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은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산장에 남은 이들이 위험했다.

이리저리 길을 헤치고 기운을 쫓는 것은 꽤 오래 걸리는 일이었지만, 왔던 방향을 다시 일직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시간에 딱 맞춘 모양이었다. 인간 형태로 뛰어왔으면 아마 늦었을 것이다. 크게 뒷발을 굴러 나뭇가지를 딛고 도약한 뒤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것의 목덜미를 물어 챈 여 사장은 생각했다.

“문 닫아!!!!”

목덜미를 물어 채기 직전 외친 고함소리에 누군가가 반사적으로 석규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닫히는 문틈 사이로 비친 얼굴로 보아하니 해강인 모양이었다. 호오, 어린 것이 주제에 꽤 반사 신경이 좋네, 정도의 감상을 떠올린 여 사장은 입안에 가득 들어차는 썩은 피 맛과 물컹한 질감의 그것을 퉤, 하고 뱉어냈다. 뱉어 내기 전에 날카로운 어금니로 몇 번 잘근잘근 씹으며 흔들어대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산이 무너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불시에 기습을 당한 그것은 어느새 변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예의 그 희고 긴 털을 휘날리며 진흙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목이 꺾인 건지 검은 피를 흘리며 기이하게 돌아간 목을 한 그것이,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서 구르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구미호의 눈이 더욱 빨갛게 타올랐다. 불꽃을 닮은 붉은 털들이, 소리 없이 부는 바람을 타고 소스스 일어나 있었다. 이번에야 담판을 내자. 네놈 숨을 온전히 끊어놓기 전까지는 이 산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을 테니까.

“사장님…!”

“너는 물러서 있어. 저놈한테 네 독은 무용지물이니까. 산장 문 열지 말고 뒤에서 구경이나 해.”

“그렇지만!”

“수십 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다 했더니, 어디서 또 요사스러운 짓만 배워왔나 보군. 분신을 만들어 낼 줄도 알고 말이야. 가만 보자, 이쪽이 가짜인가, 아니면 다른 쪽이 가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처럼 털을 세우고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는 구미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꿈틀거리던 그것의 입이 쭉 찢어지며 빨간 혀를 내밀고 웃었다.

-아하하… 이 목소리… 이 힘… 그래, 너는… 그 때 그 여우 새끼로구나… 딱하기도 하지… 아직도 인간들 사이에 꼬리 말고 숨어서 지내는 꼴이라니…

“뭐 임마?!”

-멍청한 놈…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하하하… 산과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고작 짐승 따위가 내 숨을 끊겠다고? 호호호…

“죽기 전이 되니까 쫑알 쫑알 말이 많아지네, 그렇지? 아직 덜 맞았구나, 이 새끼야.”

여 사장의 뒷다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단단하게 경직되자, 그것의 입이 더욱 찢어지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권영숙, 그 요망한 년, 그때 그 년만 내가 잡아먹었어도,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을…히히히… 이봐, 지금 권영숙이 어디 있는지 아나? 바로 이 산 안에 있다고…그 년은 약속을 깬 거야… 하하하……

“…무슨 소리야, 영숙이는 분명히 영서랑 절에…”

“…사장님.”

하나와 여 사장은, 동시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예상에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나누어진 기운, 또 다른 하나의 분신, 그리고 다른 분신의 기운이 느껴지던 방향…

그 방향은, 정혜사와 멀지 않은 쪽이었다.

하지만 여 사장과 하나도, 그것이 이 산 밖은커녕 정혜사 안으로 다시는 발도 들여놓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영서와 영숙이 이 산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아마 다른 기운은 지금쯤 영서에게로…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영서와 숙이를 잘도 불러냈구나.”

-아하하… 그거야 쉽지. 저 산장 안에 있는 어린 것들의 혼은 아주… 아-주 맑고, 말랑말랑해서… 홀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고… 호호호… 너야말로 무슨 농간을 부려 산장에 결계를 친 건지 모르겠지만, 이미 권영숙은 내 손바닥 안이야. 그 년의 힘과 거울만 있으면, 나는…

실실 웃으며 피와 함께 말을 토해내듯 뱉던 그것의 목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음 말이 이어지지도 못한 채 흰 털북숭이 가면을 쓴 듯한 대가리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몸 부분만 남은 흰 털 덩어리가 스르르 자리에 쓰러졌다.

“사장님!!!”

“퉤, 에퉤! 고약한 놈, 피도 이미 이렇게 다 썩어서는…”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그럼. 불온한 기운은 이제 사라졌어. 일단 이 주변에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녀석이 하는 말로 봐서는… 또 어딘가에 힘을 쪼개서 숨겨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나는 착잡한 얼굴로 여 사장의 목덜미 털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와 피에 젖은 짐승의 냄새와 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멎어가고 있었다.

“…아빠!”

그때, 별안간 산장 문이 벌컥 열리며 이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비는 거의 멎어있었고, 젖은 풀숲과 나뭇가지 잔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탁탁 밟으며 뛰어온 이레가 담뿍 웃으며 커다란 구미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풍성한 털에 파묻혀 얼굴과 몸의 반절이 가려진 형국이 되었지만, 이레는 개의치 않고 깡총 깡총 뛰어가며 그에게 매달리려고 애를 썼다.

“그래, 그래. 잘 기다리고 있었어? 오빠들은?”

“저어기, 안에! 석규 오빠가 계속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괜찮다고 뛰어나왔어!”

나 잘했지, 하고 샐쭉 웃는 이레의 머리에 콧잔등을 부빈 여 사장이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붉은 털들이 한껏 일렁이는가 싶더니, 풍선이 터지듯 가벼운 파열음과 연기가 자욱하게 터져 나온다. 어느새 다시 익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ㅡ여전히 입과 턱에는 온통 거무스름한 핏자국을 묻힌 채였지만ㅡ두 팔로 이레를 번쩍 들어 안은 그가 산장 쪽에 대고 소리쳤다.

“이제 됐다, 임마! 비도 멎었어!”

“…지, 진짜 사장님이에요?”

산장의 열린 문틈 새로 빼꼼하게 고개를 내민 해강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방금 눈앞에서 다시 인간화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는데, 나 말고 구미호가 또 있냐? 어이없다는 듯 여 사장이 응수하자, 안 그래도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해강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해강의 어깨너머로 까치발을 하고 밖을 내다본 석규의 눈이 단숨에 빛났다.

“이번엔 진짜 사장님이야! 야, 좀 비켜봐, 해강아!”

“아, 아직은 안 돼요! 혹시 모르잖아요!”

“허, 자라 보고 놀란 거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거 참 단단히도 데었나 보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냐?”

“그게…”

석규와 해강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대강 전해 들은 여 사장은 산이 떠나갈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아이고, 참나! 야, 여석규, 그러게 내가 지난여름에 도 좀 많이 닦아 놓으라고 했지, 임마! 이레만 한 쪼무래기도 아니고, 너도 다 컸는데 그게 뭐냐? 하하하!”

“그래도 석규는 아직 인간으로 치면 갓 성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저나 두식이가 산장에 있었더라면 인간 두 셋 쯤 지키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풉…”

“우, 웃지 마세요! 다들 너무하네, 진짜! 우리만 두고 다들 나가버렸으면서!”

“그래도 결계는 제대로 쳐주고 갔다고, 임마. 그리고 따지고 보면 문 열고 밖으로 나온 것도 너였잖아? 정말 이 형님은 통탄할 따름이다.”

여 사장이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쉬자, 이레도 그런 아빠를 따라 하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녀가 쌍으로 똑같네, 사람 놀리는 건. 석규가 투덜거리며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해강은 살짝 당황한 손으로 그를 붙잡으려다, 이내 손을 내렸다. 비는 이제 완전히 멎어 우산이나 비옷 따위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두식도 문턱에 선 해강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는, 보란 듯이 문턱을 넘어 산장을 나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종알대며 웃는 이레를 건네 안은 석규에게 두식이 다가가는 것을 보며, 해강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그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한 번 잃은 믿음을 다시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해강은 이번에는 정말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다. 사실 끝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일단은 안전하다는 것 정도는. 등 뒤에서 얕은 신음 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다. 놀란 해강이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짚은 채 상체를 일으킨 주민이 보였다.

“주민아!”

“어… 해강아, 모두… 어디 있어?”

“이제 괜찮아? 정신이 들어?”

“나, 오래 쓰러져 있었나?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는 한데…”

“오, 주민이도 일어났냐? 밖에 무지개 떴어. 보려면 이리 나와.”

“와아, 무지개요? 그보다 비가 그쳤어요?”

“아마 비도 그 녀석이 부린 조화였겠지. 구름도 걷히고 있어.”

여 사장의 말대로 정말,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시커먼 구름이 점차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산을 처음 올랐을 때, 비가 오기 전처럼 곧 해가 뜨고 뜨겁고 맑은 햇빛이 그들의 젖고 지친 몸을 어루만져 줄 것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 주민을 보며, 해강은 안심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고 섰어, 해강아?”

“…아니야, 아무것도. 그보다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꿈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어. 하하, 그래도 이제는 숨도 잘 쉬어지고 몸도 가벼운 기분?”

자리에서 일어난 주민의 흰 얼굴에는 평소보다도 더욱 건강한 화색이 돌고 있었다. 몸이 찌뿌둥한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듯 팔과 어깨를 푸는 주민을 보며, 해강은 웃으며 다가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꿈, 이라고 했지만, 아마 그것은 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애초에 주민이 무슨 꿈을 꾼 건지 해강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저 그의 무의식 속에 떠오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 것 정도는 해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묻어두고 다시 살아낼 마음과 의지를 가진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이 아니었을 지도, 해강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괜히 괜찮다는 주민의 팔을 잡고 부축해 산장 밖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마침내 디딘 젖은 풀밭은 싱그러웠고, 부러진 채 흩어진 나뭇가지들마저 이미 생명이 다한 것임에도 맺힌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초록을 되찾은 산은 밝아지는 햇살 밑에 우거진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늘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여 사장의 말대로 저 멀리, 산 너머로 무지개가 보였다.

해강은 그제야 환히 웃으며 무지개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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