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90화 (90/166)

90화

-…서야, 영서야, 얼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져 온다. 영서는 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꺼풀에 풀이라도 붙은 듯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거부할 수 없을 만큼의 졸음과 피로가 덮쳐오기도 했다.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잠들면 좋을 텐데, 먼저 저 목소리가 나를 그만 불러주면 좋겠어. 나는… 그냥…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지?

순간 명확하고도 다정한 음색의 문장이, 아스라이 사라지는 목소리를 지우고 머릿속에 박혔다. 너무나도 또렷한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이한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뇌리에 박히자마자 영서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졸린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응시하자, 뿌연 안개로 가득하던 사위가 잠시 고요해지는 듯하더니 안개 사이로 희미한 인영이 비쳤다. 누구지? 아까부터 나를 부르던 목소리? 하지만 다른 사람이야. 분명히 알 수 있어. 영서는 눈을 뜨고 그 인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림자는 점점 더 확실하고 뚜렷해지고 있었다. 이내 영서는, 그것이 양반다리를 한 채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여성의 형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아직 너무 이르단다, 아가.

“누…구세요?”

힘겹게 입을 떼 물었다. 이상하게 물속에 잠긴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너는 더 살아야 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스스로를 위해서.

“저기요…. 누구신데, 무슨 소리를… 여긴…”

-너무 말을 많이 하진 말거라, 아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되겠구나. 자리를 옮기고 싶지만 시간도 없는 것 같고.

“네? 무슨…”

의미 모를 소리만 주워섬기는 그림자를 보며, 영서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별안간 그 그림자의 얼굴 쪽에서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분명 여성… 한복을 입은, 머리는 쪽 진 채… 체구는 작은 편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얼굴과 모습은 그림자가 진 듯 캄캄한 채였다. 대체 누구인지, 이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머리로 흘러 들어오는 듯한 기이한 목소리가 대체 누구인지 영서는 어떻게든 짐작하려 애썼다.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던 영서는 어떤 것에 시선이 묶인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릎을 세워 앉은 그녀가 손에 쥔 것, 그것은.

분명, 그 거울이었다.

-눈 떠, 권영서!!!

“헉…!”

“영서야!!!”

“영서야, 정신이 들어?”

“나…나, 나는…”

누군가 멱살이라도 끌고 내동댕이친 것처럼, 영서는 그렇게 무언가 강압적인 힘에 의해 번쩍 눈이 뜨였다. 숨이 헉, 들이켜지며 상체를 크게 들썩였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단숨에 밝아지는 얼굴의 해강과, 그 옆에 나란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주민의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주름살이 자글자글하게 잡힌 고모할머니의 얼굴과,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여 사장, 그 밑에 자리한 동그란 눈의 이레, 그 뒤로는 석규와 하나, 두식,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일향까지…

영서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리며 상황 파악을 하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멱살을, 아니, 목이었던가? 머리 아니었나? 아냐, 어깨를…

꼭 누군가가, 자신의 몸 안 깊숙이 자리한 영서의 혼을 붙들고 꺼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막혔던 숨이 터지기라도 한 듯 영서는 길고도 깊게 심호흡을 했고, 멀쩡하게 숨을 쉬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 위로 저마다 안도와 기쁨이 번지고 있었다.

방금… 나를… 누가?

“영서야, 영서야! 아이고 내 새끼, 꼼짝없이 손주 하나 골로 보낼 뻔했구만!”

“영서야, 괜찮아? 머리는 안 아파?”

“열이 좀 나는데, 감기 걸린 거 아냐?”

“뭐? 여름 감기는 바보도 안 걸린다는데, 참나. 야, 너는 왜 다 젖은 흙바닥에 그렇게 누워 있냐?”

그렇지. 영서는 가까스로 자신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순간을 떠올려냈다. 장대같이 쏟아지던 비, 입안까지 들어차던 빗방울들, 왼쪽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듯하던 고통, 축축하고 쓴 흙의 냄새, 젖은 흙의 냄새….

조각난 필름들같이 기억이 하나하나 맞춰지자마자, 영서는 반사적으로 왼쪽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흰 붕대와 거즈로 감싸진 손바닥은 절의 누군가가 응급처치를 했는지 그다지 전문적인 솜씨는 아니었고, 그러나 지혈만큼은 제대로 된 듯, 더 이상 피가 번져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면 저릿저릿하고도 알싸한 고통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영서야, 피를 꽤 많이 흘렸어. 몸이 엄청 차가웠는데… 여 사장님이 피 냄새를 맡고 바로 찾아주셔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약간 정신이 없는 듯, 주민이 속삭이듯 말하며 영서의 왼쪽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영서는 왠지 주민이에게, 너도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목이 칼칼해 목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기침을 몇 번 하자 빗속에서 피를 흘리며 오래 쓰러져 있었던 건지 정말 감기가 걸린 것 같았다. 머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약간의 혼란스러움과 열감이 이마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 어디에서…?”

“어디에 있었냐고? 혼자 비옷을 입고 쓰러져 있었어. 할머님하고 같이 산을 올라오다가 길을 잃었다며? 할머님이 빗속에서 한참 동안 너를 찾다가 못 찾았는데, 다행히 도중에 하산하던 우리랑 만나서 바로 네 냄새 쪽으로 갔거든. 몸이 너무 차서… 걱정했어.”

영서는 시선을 들어 해강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찾아낸 건 역시 여 사장님이었겠구나. 하긴 그 빗속에서, 사방천지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쓰러진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해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앉아있었다. 해강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래도 다행히 절에 있는 약으로 응급처치는 했다. 여 사장이 부른 차가 도착하는 대로 시내에 있는 병원에 다녀오렴. 머리 많이 아프니?”

“괜, 찮아요, 할머니… 저기, 그보다…”

영서가 목을 가다듬으며 손가락을 들어 뭔가를 말하려 하자, 영숙은 바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해냈단다. 반쪽은 우리가, 남은 반쪽은 영서 네가.”

영서는 분명 아직도 손안에서 타들어가던 그것의 감각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마치 짐승의 살가죽을 인두로 지지는 듯하던 냄새와 그 연기, 기분, 비명까지 전부. 어깨가 약간 움츠러들었으나, 그런 영서의 상태를 감기로 인한 오한으로 인지한 건지 영숙이 이불을 다시 영서의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걱정스러운 고모할머니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만큼 피로한 것 같기도 했다.

“…끝, 이 아니었을 거예요. 분명…”

“…그래, 맞아. 하지만 그놈이 제 몸을 반으로 나눈 탓에 그만큼 약해져 버리고 말았어. 게다가 양쪽에서 너와 여 사장이 그놈의 기를 끊어놨으니, 다시 힘을 모은다고 해도 한참이 걸릴 게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하지만…”

영서는 문득, 꿈 안에서 보았던 기이한 그림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 거울을 들고 있었고, 영서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단순한 귀신 따위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봐, 차 왔다. 영서, 혼자 일어설 수 있겠냐?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진동이 울린 휴대폰을 잠시 확인한 여 사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의 부하들도 그를 따라 일어났고, 이레는 여전히 영서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망울로 영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피 많이 나? 죽어?”

“죽기는, 이레야. 영서 오빠 이제 병원 갈 거야. 이레도 같이 갈까?”

“…응. 같이 갈래.”

석규가 이불을 꾹 쥔 이레의 손을 살살 떼어주며 안아 들자, 영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니, 영서야. 할 말이라도 있느냐?”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미적거리는 영서의 기색을 눈치챈 건지, 물어오는 영숙에게 영서는 할머니를 붙잡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다 토해내고 정리를 하고 싶었다. 할머니라면 뭔가 아는 게 있으시지 않을까, 얘기를 하다 보면, 그러면…

그 그림자에 대해 말해도 되는 걸까.

의아한 영숙의 얼굴을 보자 영서는 왠지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 순간, 영서는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믿지 말라던, 자신을 빼고는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믿지 말고 나아가라던 말을.

그 목소리는… 누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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