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91화 (91/166)

91화

병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큰 비가 온 후라 절로 올라가는 마을 곳곳이 물에 잠겨있었고, 절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렸던 터라 병원까지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었다. 그러나 영서에게는 다들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고, 영서는 그저 창에 이마를 기댄 채 붕대에 감긴 왼쪽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할머니 말씀대로일까요?”

“뭐가?”

조수석에 앉아있던 여 사장이 백미러로 흘금 영서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영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가 해냈다는 거요. 저는 그 뒤로 통 정신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지난번에… 그래, 한 60년 정도 지난 일이지만, 마지막으로 그놈을 없앴을 때가 너희 할머니가 너만 했을 때거든. 그때의 숙이는 나이도 어리고 힘도 지금보다 약했을 때지만, 적어도 지난 60년간 그놈의 기를 눌러놓긴 했었어. 확실히 예전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진 못했으니까.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나타난 거고.”

“그놈을 퇴치하는 건 영영 불가능한 걸까요? 시간만 있다면 계속… 몇 번이나…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글쎄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괴상망측한 일들이 전부 합당한 수순에 따라 일어나는 거라면 좋겠지만.”

여 사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비탈진 도로가 물에 젖은 탓인지 자주 덜컹거렸다. 방지 턱이 연이어 나 있는 길을 지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아는 건 아마 하늘에 계신 높은 분들이나 아는 일이겠지, 적어도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이지. 뭐가 생겨나고, 죽고, 다시 생겨나는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너무 신경이 쓰여요. 그 정도로 강하고 서늘한 기운은 처음이었어요.”

“…영서 너, 명부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네? 아, 네.”

“그거 한 번 꺼내봐.”

여 사장이 아예 몸을 돌려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살짝 호기심 어린 그의 밝은 적갈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왠지 그 얼굴을 보자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영서였지만, 차 안에는 운전을 하는 두식과 그 옆에 탄 여 사장, 급하게 구한 지라 좁은 자동차의 부족한 좌석 문제로 주민과 영서만 타고 있었다. 게다가 주민은 아까 전부터 영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채였다. 영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치지 않은 오른쪽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허공에서 빛이 모이는가 싶더니,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작은 미풍이 불면서 빛은 곧 낡은 책으로 변했다.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보이는 붉은 실로 철해진 낡은 책.

“오, 이게 말로만 듣던 명부 군. 옛날에 스승님한테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명부는 왜요?”

“네가 말했었잖냐. 대상을 제대로 퇴마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때는 명부를 확인하면 된다고. 아무리 이름을 모르는 혼이라도, 뭔가 새로운 이름이 적혀 있다면 그게 성공했다는 증거 아냐?”

과연 그 말대로다. 영서는 지난번에도 몇 차례 그런 식으로 이름 없는 혼들을 수집ㅡ이런 표현에 대해 다른 단어를 쓰고 싶었지만, 며칠 동안 고심 끝에 영서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ㅡ한 적이 있었다. 세상만사 전부 이름을 가진 혼들만 존재할 리도 없었다. 영서는 그런 식으로 이름 없는, 또는 이름을 잃어버린 것들의 이름을 하나둘씩 명부에 적어나갔다. 가벼운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갔고, 영서는 유심히 낯익은 이름들 사이에 낯선 이름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역시 아니에요. 없어요.”

“뭐,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확실하게 그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은 건 맞으니까. 다시 생겨난다 해도 그때는 아마 100년도 더 지난 후일걸.”

그 후에 대해서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여 사장은 가벼운 말투로 되묻고는 조수석 어깨 부분에 턱을 받치고 싱긋 웃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영서도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민은 여전히 숨을 색색 고르며 어깨에 복슬복슬한 머리통을 기댄 채였다.

“사장님, 그러고 보니 처음에 산을 올라갔던 거, 그 스승님이라는 분을 만나러 가신 거 아니셨어요?”

“그랬지. 그런데 그런 일에 휘말릴 줄은.”

“스승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세요? 그리고 그… 들어보니까 할머니는… 삼 년 동안 절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건…”

영서의 얼굴에 약한 죄책감과 걱정이 스치는 것을 알아챈 여 사장은, 다시 빙글거리며 영서를 안심시켰다.

“큰일은 아냐. 숙이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지난 삼 년 동안 삼재였는데, 그게 올해 여름까지였거든. 이번 삼재는 숙이의 업이 너무 강력해서 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행을 하면서 몸가짐을 단속하는 기간, 이라고 하면 될까? 그게 아마 한 달 정도 남았었는데, 그래서 산에 오를 때도 너희를 두고 나랑 애들만 간 거야. 원래는 스승님을 뵈러 갈 때마다 숙이도 자주 따라나서거든.”

“할머니가 절에서 나가시면 안 된다고요? 그렇지만…”

영서는 문득, 지난번에 해강의 일로 오랜만에 할머니를 찾았을 때, 그녀가 절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뒤로 몇 번 연락할 때도 영숙은 항상 정혜사에 있는 듯했고, 할머니가 사시는 집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ㅡ언젠가 아버지가 자신의 다이어리에서 친지들의 연락처를 찾다가 영숙의 집 주소를 펼쳐놓은 것을 영서는 본 적이 있었다ㅡ왜 할머니가 계속 절에만 계시는지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삼재라… 아마 보통 사람들이 자주 말하곤 하는 아홉 수라든가, 올해로 삼재라고 하는, 미신과 좀 더 가까운 그런 종류의 것과는 다른 듯했다. 삼 년 동안 절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니. 할머니의 업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업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있는 것일까. 영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여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뭐, 스승님이 그러신 거니까, 나는 삼재니 업이니 하는 것은 잘 몰라. 애초에 우리 같은 영물한테는 스승님이나 숙이 정도의 영력도 없으니까 말이지. 말만 영물이지, 그냥 오래 산 짐승이라고 생각해라.”

“사장님.”

“틀린 말 했냐? 살아있는 모든 건 다 끝이 나게 되어 있어, 임마. 두식이 너는 아직 젊어도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지.”

“예?! 사, 사장님이 그렇게 늙으셨어요?”

“크, 늙었다는 말을 직빵으로 들으니 마음이 쓰리지만, 맞는 걸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뭐 구미호 수명이야 각자 다르긴 하지, 태어난 지 백 년도 안 되어서 몰살당한 애들도 있었고, 옛날에 내가 아는 분은 천 살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얘기도 있고. 분명한 건, 갈수록 영물의 수는 적어지고, 구미호가 태어나는 빈도도 낮아졌다는 거야. 수명도 훨씬 짧아지고 있어. 나야 수백 년을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호상이다, 싶은 거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알겠어, 임마. 농담이야, 농담. 먹여 살릴 자식들이 있는데 어떻게 죽냐.”

두식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 서린 걱정과 비탄의 감정을 영서는 잠자코 모른 척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것이 짧고 긴 것은 산 자의 기준일 뿐이고, 모든 것은 전부 언제든 죽을 수 있다. 죽은 후가 중요한 걸까? 아니면 짧으나마 살아 있을 때, 아등바등 살지라도 산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걸까? 이전의 영서라면 당연히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사람이 죽고 나면 그저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고, 영혼 같은 건 없을 것이라 단언했을 것이다. 영혼의 무게니 뭐니 하는 것은 고상한 예술가들이나 주워섬기는 말이라고.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영혼은 있다. 아니, 이승에 남은 것, 영서가 그동안 만나온 것들이 단지 순수한 영혼이 아닌 영혼이 남긴 허울과 찌꺼기일 뿐이라도, 영과 혼은 존재한다.

사람이 죽고 나면 끝인 게 아니었던 걸까. 죽고 나면 또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일까.

영서는 다시 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강 선생, 이것 좀 봐주겠어? 복사기가 또 종이를 먹네, 참.”

“아, 이럴 때는 여기 밑에 있는 걸 열어서 빼시면 돼요. 종이 방향을 반대로 넣으셔서 그런 겁니다. 여기, 이 눈금 보이시죠? 여기에 있는 기준에 맞춰서 종이를 넣으셔야 고장이 안 나요.”

강 선생, 이라고 불린 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걸린 종이를 빼내고, 새 복사용지를 넣어 버튼을 눌렀다. 과연 그의 말대로 복사기는 다시 일정한 기계음을 내며 깔끔하게 복사를 해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역시 강 선생이야, 하고 칭찬한 교감이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자리로 뒤뚱뒤뚱 걸어간다. 다 나오면 내 자리로 좀 갔다 줘~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 돌아선 남자의 표정은 언제 웃었냐는 듯 차게 식어 있었다.

돼지 같은 인간, 아니 돼지가 아깝다. 돼지는 많이 먹지도 않지. 얼마나 말도 잘 듣고 순종적인 동물인데. 이도는 속으로 이를 갈며 복사기가 내뱉는 종이들을 기다렸다. 한 손을 허리춤에 얹고 한 손을 복사기 위에 얹은 채 검지를 톡톡,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였다.

동그랗고 윗부분에 살짝 각이 진 안경은 그의 싸늘한 인상을 완화시켜 주기에 아주 좋았지만, 이상하게 인간 세상에서는 안경을 쓴 사람을 좀 더 만만하게 보는 듯한 경향이 있다. 물론 안경을 써도 만만하지 않은 인상을 가진 인간들도 많겠지. 그렇다면 역시 잘 웃고 상냥하게 구는 게 문제였나. 하지만 분명 은령 누님의 말로는 나이 든 인간들, 게다가 고리타분한 행정 체계에 목숨을 거는 나이 든 공무원들은 무조건 젊은 인간이 까야 한다고 했다. 깐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것인가, 인간사를 대충 돌본 탓에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고, 이도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쌤, 강 쌤 말이에요, 은근히 몸 좋지 않아?”

“키가 크긴 하지. 그런데 좀 마르지 않았어?”

“아냐, 맨날 셔츠만 입어서 그렇지, 지난번에 이 쌤 없을 때 반팔 카라티 입고 온 적 있는데, 생각보다 몸 좋던데요? 등 좀 봐요, 어머.”

“쉿, 너무 목소리가 크다. 지영 쌤, 자꾸 그러면 강 쌤한테 관심 있는 거 다 소문나요~”

“영어 부장 쌤도 젊은 남교사 왔다고 일주일째 싱글벙글하셨잖아요.”

이도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도는 인간화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마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청력 때문일 것이다.

신체는 인간과 똑같이 변한다고 해도 오감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심지어 원래 가지고 있던 영력의 절반 정도로 줄기는 하나 그래도 차사 특유의 어마어마한 음기를 누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더더욱. 왜 인간의 몸은 음과 양을 맞춰서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밸런스가 깨지면 몸은 허깨비들의 숙주가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차사 정도 되는 능력을 가졌다면 인간화를 풀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적어도 인간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안경 벗으면 더 잘생겼을 것 같은데.”

“왜? 나는 안경 쓴 남자들이 좋더라. 특히 잘 어울리는 남자.”

“그래도 안경 벗는 게 더 나을 거 같지 않아요? 렌즈 안 끼시나?”

교무실 구석에 자리한 젊은 교사들에게서 들리는 수다 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도는 심지가 굵지 못했다. 일부러 관심을 끌지 않으려고 최대한 평범한 옷에 안경까지 쓰고 다니는 건데. 여자들은 이런 스타일의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이지. 이도는 남중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기 위해, 그동안 등한시했던 인간 세상의 유행을 좀 알아보고자 나름대로 조사를 했었다. 인간이 아닌 것을 들키진 않겠지만, 자꾸 관심을 받는 것도 위험했다. 내일부터는 목이 다 늘어진 트레이닝 복이라도 입고 오든가 해야겠어. 이도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 복사기에서 나온 종이들을 간추려 들고는 얼굴에 다시 담뿍 미소를 지었다.

강이도, (표면상)29세, 영어 과목 기간제 교사로 남중고등학교에 부임한 지 막 2주 째 되는 날이었다. 조금 있으면 학교는 개학을 할 테고, 그러면 영서도 돌아오겠지.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때의 영서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도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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