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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92화 (92/166)

92화

이번에는 입원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병원 로비를 나서며 영서는 생각했다.

찢어진 왼쪽 손바닥은 겨우 서너 바늘 정도 꿰매는 수준이었다. 응급 처치가 빠르고 적절했던 덕에 다행히 감염 위험이나 수술할 없이 상처를 소독하고 몇 바늘 꿰매는 것이 끝이었다. 흉터가 남을 지도 모르지만 손등이 아닌 손바닥 안쪽인데다가, 우연의 일치인지 상처는 미묘하게 영서의 흰 손금을 따라 갈라져 있었다. 흉터가 남아도 별다른 상관은 없지만, 자신의 왼쪽 손바닥의 가운데 금, 그러니까 중간 무렵에 희미하게 끊겨있던 금이 흉터로 인해 손바닥의 오른쪽 끝까지 이어질 것을 생각하자면 영서는 기묘한 기분이 되곤 했다.

어찌 됐든 큰일은 아니었으니ㅡ아무래도 이전에 자주 입원한 탓이 컸던지라ㅡ이 정도 상처는 그저 넘어졌다고 둘러대는 것에 영서의 엄마와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두툼한 거즈를 붙인 왼쪽 손바닥의 뻣뻣한 감각을 느끼며 영서는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밀린 메시지와 알림 들을 읽었다. 주로 주민과 할머니, 여 사장이 보낸 메시지들이 뒤섞여 있었고, 대부분 부상에 대한 걱정과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들이었다. 하나하나 읽어가며 답장을 적어가던 영서의 눈에, 밀린 알림들 사이에 가려져 왔는지도 몰랐던 알림이 하나 보였다.

‘영서야, 잠깐 시간 되면 저녁에 얼굴 좀 볼래?’

발신인은 당연하게도 주해강이었다. 누구보다도 징징대며 영서의 상처 하나에 울상을 지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해강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여 사장의 차를 빌려 타고 주민과 병원에 왔을 때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들 집에 가라며 그들을 보내고 혼자 치료를 받을 때도, 영서는 이상하게 해강의 그 담담하게 굳은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평소였으면 영서의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은 물론, 손가락 하나만 칼에 베여도 혼자 세상 호들갑을 다 떠는 녀석이었다. 영서는 당연히 이 밀린 알림들 중 대부분이 해강일 것이라 순간적으로 예상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호들갑은 무슨, 그냥 친구 사이에 괜찮냐고 물어보러 연락한 거겠지 싶었다. 아직 부모님이 퇴근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고, 주민은 집이 멀어 먼저 보낸 터라 영서는 마침 혼자였다. 해가 길어 저녁 시간이 되기까지도 시간이 애매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근처에서 해강을 만나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영서는 스스로 가슴을 두드리며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영서야, 여기!”

해강은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로 손을 흔들며 영서를 반겼다. 크림색의 넉넉한 후드 티를 입고 연한 색의 청바지를 입은 해강은 금방 샤워를 하고 나온 듯 황갈색의 밝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있었다. 밝은 머리카락 뒤로 지는 노을이 가려져 붉은빛이 해강의 머리칼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강은 교복을 입은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다가도, 사복을 입으면 또래들과는 다르게 꽤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타입이었다. 항상 장난스럽고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만 빼면, 누가 봐도 고등학생 티가 팍팍 나는 영서와 다르게 그는 고등학생보다는 대학생이 더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괜히 심술이 난 영서가 일부러 천천히 발을 늦추자 잠시 영서를 지켜보던 해강이 쪼르르 달려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마음이 풀려 왜 불렀냐고 불퉁하게 묻자, 해강이 헤 웃으며 되물었다.

“손은 이제 괜찮아?”

“응, 그냥 몇 바늘 꿰맨 정도. 이 정도는 뭐 넘어져도 다치는 수준이니까.”

“가끔 보면 영서는 너무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애들도 아니고 뭐 이 정도에 울며불며 하기에는 내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다.”

짐짓 진지한 말투로 대답하자 해강이 왠지 기쁜 얼굴로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노을이 넉넉하게 배겨든 공원은 이른 저녁을 먹으러 다들 집으로 간 건지 아이들을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노는 아이들 수가 적어도 항상 인기가 많았던 그네도 텅 비어 있자, 영서의 발길이 제일 먼저 멈춘 곳도 그네 앞이었다. 이 나이 먹고 그네를 타고 싶어 하는 것도 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우스운 일이라도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어릴 때는 어리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걸, 크고 나서는 마음대로 해도 좋을 때 더더욱 말이다. 해강은 유달리 그날따라 말수가 적었다. 그 애 답지 않았다. 꼭 영서가 스스로 손바닥을 베었을 때, 그리고 빗속에서 쓰러져 기절했을 때, 그리고 다시 여 사장이 쓰러진 영서를 찾아내 눈을 떴을 때처럼, 해강은 미묘하게 지친 얼굴로 묵묵하게 영서의 옆을 지키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영서는 괜히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 그네 타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 그 후로 엄마가 그네는 얼씬도 못하게 해서 실컷 타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렇게 타니까 뭔가 어색한데 좋다.”

“많이 다쳤었어?”

“알잖아, 우리 엄마 아들 건강 걱정에 유별난 거. 그나마 어렸을 때는 건강한 거였는데, 애들이 그네 타면서 무릎도 깨지고 턱도 찢어질 수도 있는 거지, 왜 그렇게 유난을 떨었나 몰라, 엄마는.”

“…아까도 얘기한 거지만, 영서 너는 조금 더 자기 몸을 소중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해강이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해강도 영서의 옆에 앉아 나란히 그네를 밀고 있었다. 나팔꽃처럼 터지는 웃음에 괜히 모래를 발로 차며 몸을 앞뒤로 태우던 영서가, 해강이 무어라고 중얼거린 것을 듣고 발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이상하다,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나 봐. 여기 주변에는 귀신 없는데.”

약간 농담이 섞인 말투로 영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해강이 다시 웃음을 참는 듯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별거 아냐. 그냥… 네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꼭 내일 죽는 사람처럼?”

영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평소에 바보같이 웃고 실없는 농담이나 치며 따라다니던 해강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영서는 조금 낯선 기분을 느꼈다. 왜 그렇게 웃어. 왜 평소처럼 농담이나 치면서 이상한 소리도 하지 않고, 왜 그렇게…

나를…

영서가 빤히 쳐다보자 해강의 표정이 잠시 미묘해지더니,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해강의 목 언저리가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해강의 뒤로 지고 있는 노을빛 때문인지 아닌지 영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똑같이 발을 구르며 그네를 탈 뿐이었다.

“있지, 영서야.”

해강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둘 다 말없이 그네를 탄 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이미 해는 거의 다 지고, 빛보다 어둠의 밀도가 높아지는 시간. 어스름한 주변이 조용해지고 하늘에 손톱만 한 달이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기다란 그림자만이 해가 완전히 진 것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영서는 해강의 그림자와 자신의 그림자를 번갈아 보며 발 장난을 쳤다.

“나는…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무지 많아.”

“그럼 해.”

“지금은 안 돼.”

“뭐야, 시시하게.”

“나중에… 나중에 할 수 있게 되면 해줄게. 네 얘기도 많이 듣고 싶어.”

“그런 것쯤은 지금도 할 수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고개를 내저은 해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왠지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완곡한 거절 같아서, 영서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있지, 살면서 엄청 많은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고 자랐거든. 지금은 좋은 친구들도, 좋은 사람들도 많이 알지만, 나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정말로 날 좋아하는지,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도 날 좋아해 줄 수 있는지…”

해강의 그네가 멈췄다. 영서도 말을 멈춘 채, 그저 남은 반동으로나마 그네를 움직이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사람 중 해강만큼 인기 있고 사람들의 호감을 손쉽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외모 덕분도 있을 테지만, 해강과 지내면서 영서는 그에 대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바꿔 생각하게 되었다. 감출 수 없이 사랑을 받는 게 당연할 만큼, 그는 그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누구나 주해강이라는 남자애를 만나면 그 애의 외모뿐 아니라 환한 미소, 다정하고 유쾌한 말투, 은근하게 배어있는 배려와 예의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밝은 갈색의 부드럽고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소리, 조그맣게 파이는 보조개를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영서는 속으로 괜히 덧붙이며 딴청을 부렸다. 분명 집도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부모님은 물론 다른 친척들까지 해강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할 게 분명했다. 빚어놓은 것 같이 완벽한 주제에 무슨 배부른 소리인지. 영서가 투덜거렸다.

“너 방금 되게 재수 없었던 거 알아?”

“…웃기다고 생각하지. 나도 알아. 그런데 진짜야. 있잖아, 영서야.”

해강의 눈이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꼭 주변에 누군가 듣는 이가 없나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할 말을 고르느라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사실, 고아야.”

어딘가 저 멀리 풀숲에서, 풀벌레가 찌륵거리며 우는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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