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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93화 (93/166)

93화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의 손에서 떨어져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의 부모는 알량한 돈이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상황으로는 그 아기를 온전히 키워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입양을 전문으로 하는 고아원에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아기를 맡기고는 돌아섰다고 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자아라는 게 생길 때부터 소년은 또래의 친구들과 ‘선생님’ 또는 ‘수녀님’이라고 불리는 어른들의 품에서 크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년이 아는 좁은 세계는 모두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주변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계에 작은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소년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같은 밥으로도 무럭무럭 건강히 잘 성장한 소년은 항상 밝은 미소와 단정한 외모에 반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모두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입학 첫 주간에도 소년은 씩씩하게 혼자서 등교를 했고, 준비물도 잊지 않고 잘 챙기고 숙제도 항상 제때 했으며,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소년의 주변 어른들은 모두 소년을 칭찬했다. 부모가 없어도 바르게 잘 자란 아이, 라고 말이다.

대체 잘 자라는 것과 부모의 유무가 무슨 상관관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해강은 십 년쯤 지나고 나니 그게 어른들이 으레 웃자란 어린애들에게 하는 칭찬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보통 어린아이가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고 조숙한 모습을 보이면, 쉽게 말해 ‘떼를 쓰지 않거나’ 또는 ‘손이 많이 가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를 칭찬하고 추켜올린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한 삶을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을 것이다. 해강은 요즈음 그런 생각을 했다.

세계가 완전히 깨어진 것은 그 다음 해였다.

지난해보다 키가 한 뼘쯤은 더 크고 또렷한 이목구비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애들의 소꿉장난 같은 것이라도 종종 해강과 짝이 된 여자아이들은 짝이 끝나갈 무렵 책상에 엎드려 우는 일이 많아졌고, 개중 용기 있는 아이들은 해강을 따로 불러내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고백을 하곤 했다. 아홉 살들이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앙큼하기도 하지. 애석하게도 그때의 해강은 유연하게 남을 거절하고 적당히 선을 긋는 법을 아직 몰랐다. 애매한 소년의 태도에 우는 것은 소녀들이었고, 같이 놀던 남자아이들마저 점점 패거리를 형성하더니 한두 명이 뒤에서 해강을 보고 ‘재수 없다’라고 하기 시작했다. 아마 재수 없다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를 만큼 어린 나이였을 텐데, 아무튼 그랬다. 해강은 급식을 먹고 오후가 되어 학교가 파하고 나면 일찍 귀가를 하는 아이였다. 고아원에는 해강보다 훨씬 어린 동생들이 많았고, 해강의 고사리 손도 아쉬울 정도로 담당 수녀들과 도우미 교사들은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고아원에서는 어른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아직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쓰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모두 혼이 나거나 타이름만 들었을 뿐, 해강처럼 얌전히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 어린 동생들을 업어주는 아이는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을 쏘다니거나 간식을 먹지도 않고, 학교만 끝나면 곧장 집에 가는 해강을 같은 반 남자아이들은 탐탁지 않아 했다. 아니면 집에 뭔가 재미난 게임기를 숨겨두고 혼자만 즐기는 걸지도 몰라, 하며 몇몇은 머리통을 맞대고 쑥덕였다. 순수한 악의란 그런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해강의 뒤를 몰래 따라간 아이들은 해강의 발이 주택가를 지나쳐 한산한 동네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 발걸음이 멈춘 곳이 고아원이라고 쓰인 건물임을 알았다.

“야, 주해강. 너 고아냐?”

“너 엄마랑 아빠 없어? 고아원은 엄마 아빠도 없는 애들이 가는 거랬어, 우리 아빠가.”

“뭐? 그럼 너 집도 없어?”

해강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등교한 소년을 둘러싸고 몇몇이 물었다. 반은 호기심, 반은 악의가 담긴 질문들이었다. 심지어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들도 아니었다. 키득거리는 비웃음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사이에 포위된 채 해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고, 소란을 느낀 학생들은 소란의 주인공이 평소 해강을 싫어하던 말썽쟁이 패거리와 교실의 인기인인 해강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더욱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가? 해강이가 뭐라고?”

“무슨 얘기 해? 해강아, 나도 알려줘.”

“야, 주해강 고아래! 어제 우리가 얘 고아원으로 가는 거 봤어. 집이 고아원인 거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거기 사는 애들은 다 가족이 없댔어. 아니면 있어도 가족이 버린 애들이랬어.”

저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해강은 여전히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였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책가방이 철근처럼 무거워져서, 어깨를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모두 왜 이렇게 떠들고 있죠? 종 친 거 못 들었나요? 자리에 앉으세요.”

어느새 앞문으로 들어온 젊은 담임이 출석부를 탁탁 치며 아이들의 주의를 돌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르르 제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해강은 여전히 뒷문에 서 있었다. 교사는 해강에게 눈짓을 하며 얼른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해강은 멍청이 같은 얼굴로 그 자리에 못 박인 채였다.

고아는 엄마 아빠가 없는 애래.

아니면 엄마 아빠가 버린 애래. 집도 가족도 없는 애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해강은 그대로 발을 돌려 교실 문을 박차고 복도를 달려 나갔다.

“해강아, 왜 학교 안 갔어? 무슨 일이야?”

나이가 제일 많은 수녀인, 다른 젊은 수녀나 도우미 교사들에게 어머니, 라고 불리는 테레사 수녀가 주름진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해강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막 소매를 걷어붙이고 흰 기저귀 천이 가득 든 빨래 통을 세탁기에 털어 넣던 중이었다. 그녀는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기운이 정정해 여러 집안일을 거드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재작년에 타계한 원장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대리인으로서 그녀는 사실상 고아원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는 할머니 뻘인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녀는 아까 전 등교를 한 해강이 퉁퉁 부은 눈으로 가방을 멘 채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수녀님, 저는 엄마 아빠가 없어요?”

우물거리던 입술이 떨어지고 터져 나온 물음은 단순했다. 단순한 만큼 뿌리가 깊은 질문이었다. 테레사 수녀는 빨래들을 잠시 두고 해강에게 다가와 무릎을 구부렸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니?”

“저는 엄마 아빠가 버린 애에요?”

그녀는 대답 대신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해강의 곱슬곱슬한 머리통을 쓰다듬어주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해강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수녀는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세상에 엄마 아빠가 없는 사람은 없어. 수녀님들도 다 있고, 여기 있는 모두가 있지.”

“그런데 지금 같이 살지 않잖아요.”

“같이 살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있잖니? 우리가 해강이 가족이 아니면 누구야.”

십 년쯤 지난 후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해강이었지만, 고작 아홉 살인 해강이 그 말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소년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나왔다.

“…수녀님, 수녀님…”

“그래.”

“…저는…”

저는, 태어나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쪽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어린 해강은 들려올 대답이 무서워 차마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대신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늙은 수녀의 품을 온통 눈물로 적셔놓았다.

***

어느 맑은 휴일, 해강은 뒤뜰에서 엘리자 수녀와 함께 갓 빤 이불보들을 널고 있었다.

희고 얇은 천들은 빨랫줄에 걸려 흐느적거리며 해강의 머리나 등을 간질였고, 그럴 때마다 풍겨오는 익숙하고도 포근한 섬유 유연제의 향기에 해강은 방싯방싯 웃으며 이불보를 쓰고 유령 흉내를 내는 등 엘리자 수녀를 웃음 짓게 했다. 잔뜩 애교 섞인 장난을 치던 해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녀가 굳은 얼굴로 허리를 꼿꼿하게 편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해강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엘리자 수녀님 맞으시지요? 지난번에 테레사 수녀님 옆에 계셨던.”

남자는 예의 바른 말투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은은하고 담백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꽤나 미남인 젊은 남자였다. 척 봐도 교양과 매너가 밴 몸짓, 부드러운 표정, 지적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은테 안경, 그 몸에 걸친 차분하지만 값비싸 보이는 정장까지. 해강은 그런 종류의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살짝 입까지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 수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뒤 딱딱한 태도로 남자를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해강은 아직 널어야 할 빨래가 남았다고 끼어들고 싶었으나, 엘리자 수녀의 딱딱한 표정과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큰 목소리를 낼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저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고아원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 해강은 몰랐다.

그 남자가 자신과 무슨 관계인지, 어째서 지금에서야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건지, 그리고 자신을 데려가 키울 것이라는 것도.

남자의 이름은 임재희였고,

해강의 두 번째 부모이자, 그의 처음 만난 사촌 형이었으며,

해강을 이 모든 짓에 발을 담그게 한 장본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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