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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퇴마비록-94화 (94/166)

94화

“있지, 나… 고아야.”

영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럴 때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배운 적도 없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괜찮다고? 전혀 그런 줄 몰랐다고? 하지만 '그런' 게 대체 뭔지 영서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부모가 없고, 오로지 나 혼자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영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밝게 웃으며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너무나도 복잡한 감정에, 그저 영서는 해강을 빤히 쳐다보는 실례를 범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뻣뻣해진 목으로 고개를 들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손톱 같은 달이 희미하게 비칠 것 같았다.

“…그렇구나.”

“…아하하하! 그게 뭐야, 그 반응!”

“어?”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뱉은 말은 그저, 그렇구나, 였다. 너무 성의 없는 반응인가 싶어 잠시 고민하던 찰나, 해강이 웃음을 터뜨리며 영서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살짝 밀었다. 웃, 웃어도 되는 건가? 아니, 웃어선 안 될 일은 또 뭔가, 그러나 영서는 맑은 웃음소리에 약간의 혼란을 느끼며 어색한 얼굴로 해강을 흘긋 쳐다보았다. 퍽 진지한 말투로, 아니 쓸쓸한 말투로 차분하게 고백하듯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해강은 거의 배를 잡을 기세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왜 그렇게 숙연해져, 갑자기? 말한 사람 민망해지게. 방금 영서 표정 완전 바보 같았는데, 사진으로 찍어둘걸.”

“뭐, 뭐라고?! 이게 진짜!”

사람이 모처럼 걱정했더니! 영서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화를 내려다가, 말을 말자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진지하게 들어주려 했더니만, 해강은 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얼굴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딱히 뭐라고 반응해 달라고 얘기한 건 아니야. 그냥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

“언젠가 해야 할 말?”

“응.”

해강은 다시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어느새 나방들이 모여든 가로등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벌써 해가 진 것이다. 영서는 같이 그 가로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차차 알게 되겠지.”

“뭘?”

“말했잖아. 차차 알게 된다니까.”

“뭘 알게 될지 알게 된다고?”

“응.”

그게 무슨 궤변이냐고 이죽대고 싶었지만, 영서는 왠지 오늘따라 해강의 말에 딴죽을 걸거나 괜히 말을 얹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묘하게 평소보다 기운이 죽은 느낌이랄까. 해강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평소와 같은 기운이 아니었다. 영서는 말을 아꼈다. 평소의 해강이라면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계속 시답잖은 장난을 치거나 마구 달라붙어오는 등, 어떻게든 영서를 웃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해강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담담한 눈으로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있지, 영서야, 나는 네가 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또 이상한 얘기하려고 그러지?”

“아닌데.”

“그럼 또 뭐가.”

“그냥… 처음 너를 봤을 때… 네가 영서구나, 권영서, 몇 번이나 입안으로 네 이름을 발음해 봤었다. 괜히 신기했거든.”

영서는 해강이 뭔가 뜻 모를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그야 당연히…

언제였지?

내가 주해강과 처음 만난 것은, 분명, 학원에서…

아니, 아니야. 학교 내에서도 몇 번 해강을 지나가듯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눈도 마주치고, 가볍게 인사를 한 적도 있었다. 영서가 전학을 오고 나서 꽤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혜리와 옥상에서 있을 때 공을 차 준 것도…

영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주해강이, 나를 처음 봤을 때? 그건 언제지?

문득 영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해강과의 첫 만남과 해강이 생각하는 첫 만남의 시기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가? 아니면 역시 전학 오자마자 학교에서?

“…그냥, 그거는 말하고 싶었어. 권영서가 너라서 다행이야.”

해강은 씩 웃고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영서가 알쏭달쏭 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해강이 손을 내밀었다. 영서는 망설이다가, 내밀어진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은 크고 따뜻했다. 언젠가 해강이 영서를 껴안았을 때, 그때와 같은 기분에 영서는 괜히 손을 빨리 빼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뺨이나 귀가 붉어져 있을 테니까.

X월 XX일, 인천국제공항.

한 남자가 얇은 머플러를 풀어내며 한 손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제 막 출국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그의 옆에는 자연스럽게 두 명의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따라붙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남자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머플러를 풀어내 왼쪽에 선 남자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러니까, 그 일은 제게 먼저 보고해 주셔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네…. 예, 바로 그 사람이…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머플러를 건네받은 수행원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짤막하게 지시를 내리고는 다시 남자의 잰 걸음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오른쪽에 서있던 수행원은 이미 먼저 남자의 캐리어를 찾아와 들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전화 건너편에서 무어라고 떠들어대는 목소리를 잠시 손바닥으로 막고는 오른쪽의 수행원을 흘깃 쳐다보았다.

“말했던 곳, 예약해뒀어?”

“네, 이사님.”

“이사님, 김 회장님께서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그쪽 아드님에 관한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쯧,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일 좀 시키지 말라고 좀 하든가 해야지. 그리고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 변명이 많아? 멍청한 게.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았어야지. 윤 실장, 이 인간 리스트에서 지워. 그리고 이 사장한테 전화해서 이 인간하고 맺은 합병 계약서 다시 가져오라고 해.”

“예, 이사님. 그런데, 김 회장님이…”

“조용.”

남자는 수행원에 입가에 손가락을 세워 말을 막고는, 말소리가 멎은 전화기에 귀를 대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행원들은 묵묵히 자리에 서서 남자의 곁을 지켰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체격의 남성 둘이, 시커먼 양복을 입은 채 공항 라운지 한가운데에 서 있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흘금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전화를 끝낸 뒤 휴대폰을 왼쪽에 선 수행원에게 건넸다.

“그리고 업무용 번호 바꿔. 이 인간 아무래도 끈질기게 들러붙을 거야.”

“예, 이사님, 회장님이…”

“김 상무, 가서 리무진 기사 회사로 돌아가라고 하고 김 상무가 직접 운전해. 그 인간 어제 술 마셔서 아마 교통사고 낼 거니까.”

“이사님, 회장님께서…”

“아!!! 알겠어!! 그놈의 회장, 회장!!”

남자는 바쁘게 걷던 발을 멈추고 머리를 헝클이며 소리를 질렀다. 잔뜩 신경이 곤두선 모습에 곰 같은 덩치의 수행원들은 쩔쩔매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또 쓸데없는 얘기하면 당장 비행기 돌려서 내가 직접 죽여 버릴 거야.”

이를 갈며 전화번호를 누른 남자는 화를 참으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던 수행원들은 한참 동안 눈치를 보다가, 결국 경력이 1년 더 높다는 이유로 윤 실장이 먼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사님.”

“왜.”

“…회장님은 지금 스웨덴에 계셔서… 아마 주무시느라 전화를 못 받으실 겁니다.”

남자는 주저 없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파삭, 하고 휴대폰이 산산조각 박살이 났고, 옆에 지나가던 사람들 중 몇몇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건 빨리 말해.”

남자가 이를 갈며 돌아보자, 윤 실장은 자신에게 돌아올 그의 화를 막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하듯, 재빨리 다른 화제를 꺼냈다.

“도, 도련님께서!”

“…뭐?”

“…해강 도련님께서, 연락을 남기셨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보러 와달라고…”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윤 실장을 올려다보다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보다 빠르잖아. 역시 내 동생이야.”

“내일 도련님께 바로 가시겠습니까?”

“음…아니, 일단은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그리고 해강이 모르게, 그 학교에 한번 들렀다가 와야 할 것 같아.”

“도련님 모르게요? 학교는 지금 방학 중입니다만…”

“그러니까 걔 모르게 들르기 딱 좋지.”

남자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듯, 빙긋 웃는 얼굴로 대답한 뒤 다시 발걸음을 뗐다. 김 상무가 빠른 속도로 바닥에 처참하게 박살 나 퍼져있는 휴대폰 조각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새 휴대폰은 오늘 밤에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윤 실장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나저나 한국은 오랜만이네.”

남자의 이름은 임재희.

그는 약 2년 만에야, 한국에 다시 방문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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