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 안녕, 권영서.”
“안녕~”
“아, 안녕.”
“야, 오늘 체육 들었냐? 나 체육복 없는데 빌려주라.”
“옆 반 애한테 빌리지 그걸 왜 같은 반인 나한테 말해, 등신아.”
새가 재잘재잘 울고, 아침 공기는 적당히 시원하고 맑은 햇볕이 내리쬐는 오전 8시.
남중고등학교는 2학기를 막 개학한 참이었다.
영서는 이상하게 엄청 오랜만에 학교에 오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여름 방학 동안 이래저래 쏘다닌 일도 많거니와, 학원을 다니느라 학교에서 진행하는 방학 자율학습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벌써 낯설게 느껴지는 학교의 운동장에 들어섰다. 9월이 다가와도 아침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여전히 하복을 입은 학생 무리가 교문과 운동장 곳곳에 뭉쳐 있었다. 평범한 학교, 평범한 등교, 평범한 학생들…! 그동안 이 얼마나 평범하고도 보통의 일상을 원해왔는지, 영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 좋은 날씨, 건강해 보이는 선도부와 선생님들!
이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는 학교 건물!
머리칼을 늘어뜨린 귀신이 돌아다닌다거나, 교문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을 히죽거리며 노려보는 귀신도 없다!
이게 얼마 만의 정상적인 등교인가 싶어, 영서는 전학 이래 최고로 밝은 얼굴로 등교를 하던 참이었다.
“야.”
“…..”
“야, 꼬맹이.”
“…예? 저요?”
“그래, 너.”
처음에는 귀신인가 싶어 가볍게 무시. 그러나 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어라? 학생주임 선생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이상하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잠, 잠깐, 저 얼굴을…
“…우아아아아악!!!”
“뭐야, 그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은.”
“아, 아하하, 아, 깜짝이야… 진짜… 아니,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요? 그 꼴은 뭐예요? 안경에, 웬 가디건? 평소에 그 꺼무죽죽한 양복은 어디 가고?”
영서는 배를 잡고 웃으며 마음껏 남자를 놀렸다. 이게 누구신가, 꿈에서나 보던 일직차사잖아! 영서는 왠지 반가운 마음 반, 잔뜩 놀리고 싶은 장난기 반으로 남자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그 꼴이 대체 뭐냐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이놈이,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걸걸한 목소리의 학생 주임이 불호령과 함께 회초리를 흔들며 영서의 어깨를 턱, 잡아 세웠다. 엥? 영서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학생 주임과 일직차사를 번갈아 보았다. 아…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너무 반가운 마음에 영서는 자신이 매우 간단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학생 주임 곁에 있는 남자에게 한 말을, 이 성격이 괴팍하고 엄한 학생 주임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서 변명을 하는 게 영서의 벌점에게도, 방과 후 봉사 시간에게도 좋을 것이었다.
“아, 서, 선생님한테 한 거 아닌데요. 그냥 저 혼잣말…”
“풉, 하하하, 아하하!! 여기 학생들은 참 활발하고 귀엽네요, 박 선생님.”
“바, 박 선생…님? 아저씨, 뭔 헛소리에요?”
“아저씨? 이놈 이거 봐라, 이거?! 권영서! 새로 온 선생님께 그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엉!”
“…예에에에??!?”
새, 새로 온 선생님이라니. 분명, 분명…
눈앞에 서서 빙긋 웃고 있는 남자는, 몸짓이나 말투, 태도는 이상하게 상냥하게 보이지만, 분명 틀림없는 일직차사, 강이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학생 주임한테 일직차사가 보인다고?! 그, 그것도 웬 새로 온 선생님…??!
“…아…안녕하세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시 남자와 학생 주임을 번갈아 보던 영서가 입을 닫고 깍듯이 인사를 하자, 남자는 웃으며 학생 주임에게 말했다.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박 선생님. 원래 남학생들이 젊은 선생님한테 친근하게 구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거 참, 기간제 교사라고 학생들이 너무 건방지게 굴까 봐 걱정입니다. 강 선생, 혹시 싸가지 없는 놈 있으면 저한테 전부 말하세요. 아주 제가 빠따로 다 그냥…!”
“하하, 거기 친구, 권영서라고 했지? 곧 종이 칠 테니 얼른 들어가.”
손을 살레살레 흔들며 웃음 짓는 저 얼굴은, 분명히 강이도가 맞았다. 새로 온 기간제 교사라니, 참나. 대체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런 엉터리 같은 상황을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캐물을 수는 없었다. 저 서슬 퍼런 학주만 아니었어도…! 영서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재빠르게 운동장을 가로질러갔다.
하여튼 어디에 사는 누구보다도 더 여우 같은 인간!!
나중에 다시 마주치면 전부 설명하게 만들 거니까!!!!!
영서는 속으로 득득 이를 갈면서 종이 치기 시작한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슬아슬하게 학교로 들어가는 영서의 뒷모습을 일직차사, 아니 강이도 선생은 빙글빙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와아악!! 권영서!”
“…아, 혜리구나. 오랜만이다.”
“뭐야, 이제는 놀라지도 않냐? 재미없어~”
왜냐하면 아까 오늘 치의 놀라운 걸 전부 봤으니까. 영서는 아직 1교시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미묘하게 낡고 지친 얼굴로 웃으며 혜리를 맞아주었다. 교실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학생, 잽싸게 매점에 다녀오려는 학생, 서로 지난밤에 본 예능 프로나 만화 얘기를 하려고 모인 학생들로 시끌시끌했다. 영서는 턱을 괴면서 교복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이러면 혼잣말을 하는 이상한 애로는 안 보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입가를 가리며 목소리를 죽이는 영서를 보며, 혜리는 천장에서 얼굴만 내민 채 뾰로통해졌다가, 이내 김이 샜다는 듯 천장에서 쑤욱 나와 영서의 책상 위에 부드럽게 걸터앉았다.
“학교에는 왜 한 번도 안 왔어? 방학 동안 얼마나 심심했는데.”
“이제 학교 밖에도 다닐 수 있잖아. 심심하면 네가 먼저 오지 그랬어. 안 그래도 바빴거든?”
“나도 바빴거든? 웃기셔, 진짜. 보충 수업은 안 들었어?”
“나야 학원 다니니까.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이 좀 많았거든. 병원에도 또 가고…”
“뭐? 병원은 또 왜?”
“별거 아니었어. 지금은 괜찮아. 그나저나 너는 학교에 왜 박혀있던 거야? 웬 바쁜 일?”
“아, 그게, 일직차사가…”
혜리는 뭔가를 얘기하려다 말고 합,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었다.
“…뭐야, 아저씨가 뭐?”
“…어…아냐, 그냥 뭐, 일직차사가 귀찮은 심부름 좀 시키고 그래서… 그거 하느라.”
“참나. 너 같은 보통 유령한테 뭘 그렇게 맨날 일을 시키냐? 그러고 보니까 웃기네.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자기가 하기 귀찮은 뒤치다꺼리 다 시키는 거 아냐?”
영서는 피식 웃으며 쥐고 있던 샤프를 손안에서 돌렸다. 혜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러나 웃기만 할 뿐, 일직차사가 그 애에게 시킨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뭐 때문에 그동안 그렇게 바빴다고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영서도 굳이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저 어물쩍 넘어가려는 혜리에게 이번만은 맞춰주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너 교문에 아저씨가 왜 그러고 서 있는지 알아?”
“아아, 그거? 인간 행세하고 다닌 지 꽤 됐어. 여름 방학 때부터 그랬거든.”
“아니, 갑자기 무슨 속셈이래? 게다가 저승차사가 언제부터 인간 모습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건데?”
영서가 화제를 돌려 이도에 대해 묻자, 혜리도 키득거리며 책상에 걸터앉느라 공중에 뜬 발을 흔들었다. 무게 따위는 없었기에 당연히 영서의 책상이 흔들릴 일도 없었지만, 영서는 그런 것이 혜리가 장난을 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정확히는 안 알려주던데. 괜히 물어보기 좀 무섭잖아, 너는 몰라도 나한테는. 너는 모르겠지만 일개 귀신한테는 저승차사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눌려서 엄청 답답하고 힘들다고.”
“그런 애를 아저씨는 왜 끌고 다니면서 일을 시켜? 웃기네.”
“너무 뭐라고 하진 마. 나도 다 얻는 게 있어서 잠자코 시키는 일 하고 그러는 거야.”
“얻는 거?”
“응. 뭐, 여러 가지.”
혜리가 달랑거리던 발을 멈추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책상 옆에 선 혜리를 통과해, 장난을 치며 지나가는 남학생 하나가 우렁차게 웃으며 지나간다. 영서는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봤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혜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교실에 가득한 학생들을 유유히 통과해 복도로 나갔다. 사실 걸어서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원하면 얼마든지 벽이나 천장, 바닥을 쑥 통과해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있는데. 혜리는 영서가 보고 있다고 느낄 때면, 그런 행동을 자제하곤 했다. 굳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이미 잃어버린 중력과 부피를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걸어 다니곤 했다. 어차피 너를 통과해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도. 영서는 혜리의 변하지 않는 단발머리가 살랑거리며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애의 모습을 보면서 영서는, 언젠가 일직차사가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산 자는 죽은 사람을 동정해서는 안 되고, 죽은 사람은 산 자를 동경해서는 안 된다.
혜리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어떤 마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