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영서는 입술을 씹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영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시,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민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영서는 당황한 얼굴로 주민을 내려다보다가, 이상하게 쳐다보기 시작하는 주변 남학생들의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 권영서, 너 쟤 알아?”
“뭐야, 너도 전학 오기 전에 같은 학교였냐?”
영서의 앞자리에 앉은 반 친구들이 무어라 질문을 했지만, 영서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황을 감추고 애써 침착한 얼굴을 했다. 주민은 거짓말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로, 영서가 아는 주민은 그런 얼굴로 사람을 속이거나 모른 척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나? 하지만 누가 봐도 주민인데, 착각할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주민 쪽을 흘금 쳐다보았다. 주민은 웃으며 주변에 모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영서 쪽으로 다가왔다.
“……”
혹시 나한테 오는 건가 싶어, 몸을 돌리고 아는 척을 하려던 찰나, 주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서를 지나쳐 뒷문으로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는 주민의 뒷모습을 보며 영서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는 기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기분. 이젠 지긋지긋했다. 영서는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벗어나 교무실로 뛰어갔다.
“뭐? 누구?”
“주민이요, 우주민! 설마 아저씨도 모른다고 하는 건 아니죠?!”
영서의 초조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도는, 안경을 벗어 미간을 문지르며 되물었다.
“난데없이 사람 끌고 오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웬 헛소리야? 우주민이가 왜?”
“…역시, 제 착각이 아닌 거죠…?”
영서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지한 영서의 표정에 이도는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혀를 찼다.
“그 꼬맹이한테 무슨 일 생겼냐?”
“…주민이가 …오늘 저희 반으로 전학을 왔어요. 그런데… 저를 몰라봐요. 장난치는 게 아니라 정말 저를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너를 모른다고?”
“네…”
이도는 허어, 소리를 내며 잠시 팔짱을 끼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꼬고 눈을 내리깐 그의 얼굴은, 교무실에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강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닌, 역시 싸늘한 저승차사의 얼굴이 더 어울리는 듯했다. 영서는 왠지 그의 그런 얼굴을 다시 보자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이도만큼은 갑자기 사라지고 나타난 인물이 아니어서, 똑같은 아는 얼굴을 했음에도, 영서를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아줘서.
이도는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영서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의아한 얼굴의 영서가 고개를 들어 가까이 대자, 그는 손바닥을 대고 작게 귓속말을 했다.
“꼬맹이.”
“…네?”
“…알아서 해라. 나는 지금 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진지한 얼굴로 속삭인 이도는 곧바로 몸을 돌려 모퉁이를 벗어나려고 했고, 영서는 그와 동시에 이도의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 셔츠, 셔츠 구겨지잖아!!!”
“이 염치없고 책임감도 없는 저승사자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니까요!! 좀 도와달라니까 그걸 또 도망가려고!!!”
“이거 안 놔?! 옷 찢어지겠다!! 잠깐, 잠깐 잠깐만!!!”
두 사람은 교무실이 있는 복도 끝 모퉁이, 계단 안쪽에서 옥신각신을 하던 참이었다. 마침 학생들이 없는 곳으로 영서가 끌고 가다 보니 빈 공간이라고는 계단 층계참의 좁은 공간뿐이었다. 도망가려던 이도의 셔츠 자락을 냅다 붙잡고 잡아당기던 영서가 윽박질렀다.
“그리고 아저씨, 저한테 설명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지금 그렇게 자연스럽게 도망가려고 하면 안 될 텐데?!!”
“이, 일단 좀 놓고 말해 임마!!”
옷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질린 이도가 옷을 부여잡고 숨을 가다듬는 동안, 영서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이도는 혹시 누군가 듣지는 않는지, 지나가는 학생이나 선생이 이쪽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지 주변을 살핀 후, 구겨진 셔츠와 넥타이를 바로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꼬맹이, 안 본 사이에 꽤 과격해졌다?”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요?”
“예민하긴… 하지만 정말이야. 이번 일은 내가 도와줄 수가 없어.”
“왜요?”
“보다시피.”
이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자, 이도는 제 안경테를 검지로 톡톡 치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저씨는 지금 임무 수행 중이라 바쁘거든. 인간의 몸으로 지내는 이상, 인간의 사회에 섞여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는 수밖에 없어.”
“그게 뭐예요?! 그리고 애초에 그 임무라는 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그런…!”
“쉿, 너무 화내지 마.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닐 거야.”
성질이 나 목소리가 커지는 영서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 이도의 말에, 영서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삐죽 입을 내민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이도는 의미 모를 웃음을 물고 잠시 손가락으로 톡톡 제 턱을 두드렸다. 그 능글맞은 얼굴에는 정말로 할 말이 없는 듯했고, 영서는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영서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됐어요. 아저씨 말마따나 뭐 아저씨도 해야 할 일이 있겠죠. 나중에 설명해 준다는 말은 못 믿겠지만.”
“진짜래도. 아무튼 일단 지금은 그렇게 이해해 줘. 이래 보여도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 하느라 이래저래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니까.”
“어련하시겠어요.”
단단히 삐진 모양이군. 이도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영서의 머리통을 슥슥 쓸어 넘겨주었다. 익숙한 그의 손길에 영서는 잠시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왜 익숙한 걸까. 그래, 분명… 언젠가 또 이런 식으로…
“…종 치겠어요. 갈게요.”
“그래. 아, 학교 돌아다니다가 혜리 보면 나 좀 보러 오라고 해라. 얘가 분명 부르는 거 들었을 텐데 들은 척도 안 하네.”
“네.”
영서는 왠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 같아, 머리를 덮은 그의 손을 쳐내고는 고개를 돌리며 복도로 걸어 나갔다. 조금만 늦게 말을 돌렸으면 아마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영서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도는 잠시 그대로 서서 영서가 반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살이 빠졌나? 조금 마른 것 같았는데. 착각일 수도. 심상히 생각한 이도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교무실로 돌아갔다.
“영서야아~!”
“엑, 네가 왜 내 자리에 있어?”
“너 보러 왔는데, 쉬는 시간 동안 돌아올 기미가 안 보여서 앉아 있었지. 이제 종 치는데 어디 갔다 온 거야? 화장실?”
“뭐, 대충 비슷한 거.”
교실로 들어가자 영서를 맞아주는 것은 익숙한 해강의 목소리였다. 영서의 자리에 앉아 옆자리 친구들과 마치 제자리인 양 떠들고 있던 해강은, 영서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외쳤다. 쟤는 매일 우리 반 와서 저러고 있네. 멀찍이 앉은 다른 학생들이 활짝 웃고 있는 해강을 보며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다. 영서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서 빠르게 걸어 해강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잔뜩 헝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종 쳤으니까 너희 반으로나 돌아가라. 내 자리 뺏지 말고.”
“너무해~ 영서 너무 차가워~”
짐짓 우는 시늉을 하며 더욱 영서의 책상에 답삭 엎드려 일어날 기색이 안 보이는 해강이었다. 가증스럽게 애교를 부리다니. 영서가 해강에게 더 단호한 태도로 반에 돌아갈 것을 종용하려던 찰나, 또 다른 반가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 해강이 아냐?”
주민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참인지 손에 물기를 털어내며 종종 교실로 들어오던 주민이, 방긋 웃으며 해강에게 살레살레 손을 흔들었다. 영서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것과 동시에 해강은 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반짝 들고는 주민을 맞아주었다.
“어라? 우주민, 너 왜 여기 있어?”
“나 오늘 전학 왔어. 아,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이번 학기부터 너희 학교 다닌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개학하고 처음 보지?”
“뭐야~ 난 또. 어, 그럼 영서도 그렇고 전학생이 두 명이네, 이 반은?”
“…아? 영서도 전학생이야?”
“응, 영서도 2학년부터 전학 온 거잖아. 뭐야, 다 알면서 웬 처음 듣는 척?”
“……”
살짝 당황한 영서의 시선과, 영문을 모르겠다는 주민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오직 해강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