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98화 (98/166)

98화

“뭐어어어--??!!?!”

“쉿, 쉿! 목소리 좀 낮춰!”

여기 학교잖아! 눈을 휘둥그렇게 뜬 해강의 팔을 잡아끌며 영서가 작게 속삭였다. 호들갑을 떠는 해강은 너무 눈에 띈다. 잽싸게 그의 교복 소매를 잡고 학교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간 영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민이가, 영서 너를 몰라???! 왜?!”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대체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점심시간, 급식실에서 즐겁게 밥을 먹고 있는 해강의 뒷덜미를 낚아채 학교 체육관 건물 쪽으로 냅다 납치해 온 영서가 시무룩한 얼굴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해강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그늘진 체육관 건물 뒷벽에 기대 주르르 미끄러져 앉는 영서를 보고, 해강은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다가 재차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걔가 왜?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그때 주희 일만 해도…”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아직 주희 얘기는 안 꺼내봤어. 애초에 나를 못 알아보는데 자기 가정사에 대해 들먹이는 녀석에게 좋게 반응할 리가 없잖아.”

해강은 그것도 그렇다며, 영서와 똑같이 아이스크림을 물고 옆에 주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체육관 건물 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아직 푸른빛을 지닌 채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름은 다 갔지만 여전히 점심 후 먹는 아이스크림은 영서를 기분 좋게 했다. 왠지 멍해지는 기분에 둘은 나란히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약 오 분 정도 그러고 있다가, 두 사람의 입이 심심해지자 이번에는 해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영서야.”

“왜.”

“…지금 꼭 데이트 같다.”

“너는 데이트를 이런 식으로 하냐?”

“…그럼 나중에는 나랑 데이트해줄 거야?”

“아니.”

이제는 해강의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차단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영서였다.

***

역시 주해강은 도움이 안 돼.

영서는 혀를 차며 교실로 들어왔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결 방법을 찾고 싶어 해강이라도 붙잡았더니, 영 상한 동아줄이었다. 아저씨도 도움이 안 되고, 주해강도 도움이 안 되면 정말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영서는 주민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정말 나를 모른다는 그 눈빛을 보고, 어떻게 예전처럼 말을 걸 수 있겠어.

어쩌면 영서는, 주민에게 주희의 죽음이 아직도 충격적인 일이라서, 그 애에 관련된 기억을 무의식중에 지워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해강을 기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영서가 아는 주민은 여전히 주희의 죽음에 빠져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웃을 줄은 아는 사람이었다, 우주민은. 그리고 갑자기 전학이라니… 영서가 알기로 주민은 영서네 동네에서 차로 30분, 버스로 1시간은 걸리는 곳에 살고 있었다. 물론 주희의 병원 때문에 자주 여기에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도 사라졌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와 둘이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어머니께서 주민을 홀로 떼어 굳이 다른 동네로 전학을 시킬 이유가 있었을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영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일단 주민에게 다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으니까.

교실은 이제 끝나가는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이제야 체육복을 빌리러 온 놈, 교과서를 빌리러 온 놈, 아직도 간식을 질겅거리는 놈,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며 장난을 치는 놈들로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남고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영서는 가만히 자리에 앉으며 건너편 분단에 앉은 주민의 자리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양치를 끝내고 온 참인지, 양치 도구를 사물함에 넣으며 다음 교시 교과서를 꺼내던 주민이 몸을 돌리자마자 영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영서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주민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준 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영서의 자리로 다가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왠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주번, 이거 주번 누구야? 칠판도 안 지우고. 다들 얼른 자리에 앉아라.”

“선생님, 주번 승훈인데요.”

“뭐, 강승훈? 짜식이 그냥… 또 땡땡이야?”

“승훈이 조퇴했어요.”

반장이 손을 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교사는 혀를 차며 직접 칠판지우개로 어지러운 분필 자국들을 지워냈다. 책 펴라. 부산스럽게 교과서를 꺼내 펴는 학생들 사이로, 이미 영어 교과서와 노트를 펴고 있던 주민의 흰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영서는 자꾸만 돌아가는 고개를 붙잡아 정면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면서, 교과서 위에 샤프로 괜히 낙서를 했다.

“영서야, 잠깐 나 좀 보자.”

“어엉?”

수업에 집중하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곧 방과 후가 되었다. 금세 시끌시끌해진 교실에 청소 당번을 부르는 반장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보다 더 큰 왁자지껄한 남학생들의 소리가 공간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학원 숙제와 노트들을 가방에 넣으며 새로 바뀐 청소당번을 확인하려던 영서에게, 갑자기 다가온 주민이 영서의 책상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일어서려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선 영서가 나? 하고 되묻자, 주민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서 네가 이번 과학실 청소당번이구나. 부탁한다. 과학실 키는 청소 다 끝나고 교무실에 내 자리에 놔두면 돼. 너도 청소당번이니? 못 보던 얼굴인데.”

“저는 오늘 전학 온 우주민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아직 청소 구역이 안 정해져서, 영서 도와주려고 왔어요.”

“그래? 착하네, 영서랑 친하게 지내렴. 영서도 주민이한테 잘 해주고. 둘이 잘 하고, 문단속 잘 하고 나와라? 선생님은 교무회의 간다.”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젊은 과학 선생은, 항상 풍성하게 많은 머리칼을 큐빅이 박힌 헤어핀으로 깔끔하게 틀어 올린 친절한 교사였다. 그다지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동글동글하고 수더분한 인상에 작은 키, 완벽한 수업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좋은 평판을 갖고 있는 교사였다. 그녀는 으레 선생들이 하곤 하는, 공부를 잘하거나 자신이 맡은 과목을 잘하는 일부 학생들만 편애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학생 이름을 잘 외우고 불러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중에도 영서를 기억하는 까닭은 영서가 과학을 좋아하는 것도, 다른 과목에 비해 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ㅡ영서는 국어와 수학을 잘했고, 영어와 과학은 꽤 고전하는 과목이었다ㅡ그저 지난 학기에 영서가 일으켰던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별다른 큰일은 아니었고, 항상 영서가 다니는 병원에 갈 만한 일도 아니었다. 때는 여름이 다가오던 5월의 끝자락, 중간고사가 끝난 후 영서네 반은 과학 시간에 평소처럼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대신 과학 교사인 그녀의 재량으로 과학실에서 개구리 해부실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원래 교과 과정에는 올라 있는 해부 실험은 사실 그동안 예산 문제나, 남학생들만 있는 학교에서 멀쩡하고도 진중하게 실험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사실상 넘어가는 부분이었는데, 작년에 그녀가 부임하고 나서 열정적인 의견 개진으로 1, 2학년은 한 번씩 과학 시간에 해부 실험을 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호기심과 본능적인 혐오감, 약간의 공포를 이겨내고 교사의 지시에 따라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저마다의 크고 작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개구리 해부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영서는 개구리의 심장을 떼어내다가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아하하, 거짓말! 누가 개구리 해부를 하다 기절까지 해?”

“웃지 마, 안 그래도 과학 쌤은 맨날 나 볼 때마다 놀리신단 말이야.”

과학실에 얽힌 영서의 비운의 스토리를 들으며 주민은 배를 잡고 웃어댔고, 영서도 입술을 툭 내민 채 대걸레질을 했다. 옆에서 방학 동안 해묵은 먼지들이 층층이 쌓인 실험 표본들을 먼지떨이개로 털어내던 주민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개구리가 그렇게 무서웠던 거야? 아니면 피를 보면 기절하는 타입?”

“무섭긴. 오히려 별생각 없었어. 조금 불쌍하다, 그 정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집게랑 메스로 다리를 갈라보고, 배를 갈라보고 하는데, 그때…”

“그때?”

영서는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찝찝한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잠시 멈췄던 대걸레질을 다시 하며 영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눈앞에, 그 개구리의 영혼이 멀쩡하게 두 눈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시체 배를 가르면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서있겠냐고.”

영서는 주민이 자신을 돌아본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의외로 편해진 분위기 탓이었을까. 분명 할 말이 있다고 해놓고, 청소 당번 일까지 도와주겠다고 따라와 놓고 주민은 할 얘기는 꺼내놓지 않은 채 다른 이야깃거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대부분은 영서에 대해 질문하는 정도의 이야기로, 영서는 대답하는 정도로. 그 개구리의 기억에 찝찝해진 영서가 괜히 애꿎은 대걸레만 박박 문지르고 있을 때, 어느새 주민은 영서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영서야.”

“엉?”

“나한테 했던 말… 나랑 아는 사이라고 한 거.”

“아, 그거? 음… 그런데 신경 쓰지 마.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어.”

영서는 가볍게 대꾸한 순간, 등 뒤에서 주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이상한 기분에 바로 뒤돌아보자마자, 무언가가 어깨와 팔을 밀치며 영서를 덮쳤다. 영서는 순간적인 기습에 저항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걸레가 넘어지면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영서는 일어서서 그것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통에 먼저 당황함이 앞섰다. 이게 무슨…?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며 눈을 몇 번 깜박거리자 그제야 캄캄해졌던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얼굴이 낯익었다.

“둘만 있는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먼저 이렇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권영서.”

주민이 싱긋 웃고 있었다. 영서는 당황한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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