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야, 영서 못 봤어?”
“몰라? 이번에 과학실 청소 당번이던데? 청소 중이겠지.”
“과학실?”
해강은 지나가던 아무의 어깨를 잡아채고 영서의 행방을 물었고, 영서의 반인 것이 확실한 그 애가 무심한 말투로 툭 대답했다. 언젠가 영서에게 치대는 해강과 질색하는 영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던 놈이었다. 해강은 그 애의 얼굴을 기억해두면서 알겠다며 잡은 손을 놓았고, 항상 얼굴에 떠있던 예의상의 웃음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비가 올 것 같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할까.
해강은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한 후, 영 괴상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과학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강 선생님은 너무 애들한테 잘해줄 필요가 없다니까. 자식들이 젊은 선생님만 보면 골려 먹으려고 아주 안달이 나 있거든요.”
학생주임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후루룩 소리 나게 마시며 불만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목소리를 조금 줄여줬으면 하지만 이도는 그저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학생주임이 진정으로 이도를 걱정해서, 기간제 교사로 오게 된 젊은 미남의 교사가 정말 학생들에게 약점을 잡히거나 무시당할 까봐 하는 잔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교무실이 떠나가도록 학생들의 바른 태도를 위한 선도와 교사로서 해야 할 마음가짐 및 행동에 대해 설교하는 학생주임을 보며, 이 선생은 옆에 앉은 지리 선생에게 귓속말을 했다.
“쌤, 아무래도 학주 쌤이 강 쌤 질투하는 것 같죠? 다 늙어서 웬 주책이야, 정말.”
“누가 아니라니. 그냥 적당히 말하고 넘어가면 될 거를, 아니 막말로 여자 쌤들이 그동안 애들 다루기 힘들다고 몇 번이나 얘기할 때는 별 신경도 안 쓰던 인간이, 강 쌤이 젊고 잘생겼으니까 괜히 저러는 거잖아? 우리 학교가 남고라 망정이지 공학이었으면 아주 난리도 아니었을 거야.”
“강 쌤도 저 인간 잔소리 들어주느라 힘들겠네요. 안 그래도 할 일 많을 텐데. 애들이 젊은 쌤 좋아하는 거야 뭐 늘 있던 일이잖아요? 뭐 그러다 마는 거고, 강 쌤이 사람 좋으면 애들한테 인기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정식 부임도 아닌데 너무 못살게 군다.”
젊은 교사들이 숙덕거리는 동안 이도는 겉으로는 미소를 잃지 않고 상사에게 대처하면서, 속으로는 영서가 말했던 것에 대해 찬찬히 되짚어보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계산 밖의 일이기는 했으나, 생각해 보면 또 아주 예상외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서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그 친구라는 놈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추후 아주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나아가 이도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지금 눈앞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중년의 학생 주임의 잔소리를 받아줘 가며 웃고 있을 때는 분명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남자였다. 그건 600년 전부터 그랬다.
“어머, 영서가 아직도 안 다녀갔나 보네.”
영서? 이도는 귀에 익은 이름이 들린 방향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교무회의를 마치고 나온 과학 교사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생물 담당의 민서현 선생. 민 선생은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자신의 책상에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중얼거린 것이다. 옆에 앉은 화학 교사가 그녀의 책상에 기웃거리며 물었다.
“영서면, 2학년 권영서요?”
“네, 이번 주 과학실 청소 담당이거든요. 제가 회의가 있어서 청소 다 끝나면 제 책상 위에 열쇠 놓고 가라고 했는데. 혹시 영서가 다녀가는 거 못 보셨죠?”
“어라, 영서는 오늘 교무실 한 번도 안 왔는데.”
“이상하다… 아직까지 청소를 할 리가 없는데… 까먹고 열쇠 가져가면 안 되는데 말이에요, 내일 수업 준비로 표본들을 옮겨놔야 해서.”
“에이, 원래 남자애들이 자주 덜렁대고 까먹고 그러잖아요. 내일 아침에라도 와서 열쇠 반납하라고 하면 되죠.”
느끼한 인상의 화학 교사는 민 선생을 안심시키려는 너스레를 떨었으나, 그녀는 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또래에 비해 몸이 다소 약한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평소 착실하고 성적도 좋은, 평범한 모범생인 영서였다. 이런 심부름을 깜빡할 리가 없는데… 이내 민 선생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다 말고, 어느새 자신의 뒤에 불쑥 다가와 서 있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일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엄마야, 깜짝이야! 어우, 강 선생님! 왜 그러고 서 계세요, 깜짝 놀랐네.”
“민 선생님, 과학실 가시는 길인 거면 저도 마침 가는 길인데, 제가 대신 열쇠 받아다 드릴까요?”
“예? 그렇지만… 아니, 열쇠요? 영서는 집에 가지 않았을까요? 학생들은 벌써 다 갔을 시간인데…”
“아, 사실 제가 영서에게 심부름을 또 시킨 게 있어서요. 아직 학교에 있을 겁니다. 혹시 잊어버린 걸 수도 있으니 제가 겸사겸사 가는 길에 받아다 드릴 테니까, 민 선생님은 쉬고 계시죠.”
“어… 그러면… 감사하죠. 부탁할게요, 강 선생님.”
민 선생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자, 이도는 목례를 하고는 교무실을 나섰다. 등 뒤에서 이도를 찾는 학생 주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깔끔히 무시했다.
과학실…
해강은 과학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표본들이 무섭다거나 분위기가 기분이 나쁘다,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과학실은 항상 여러 가지 약품과 표본의 보관을 위해 서늘하고 햇빛이 들지 않게 유지하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든 자재들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학교와 담당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겠지만, 해강은 과학실에 항상 쳐져 있는 커튼이나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들을 모두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어 햇빛을 들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어두운 곳은 싫다. 별로다. 더운 바깥공기와는 달리 서늘하고 건조하기까지 한 과학실 복도 앞에서, 해강은 과학실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깨달았다. 시간은 이미 종례까지 마치고 야자를 하는 학생이 아니고서야 전부 하교했을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늦게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담당 교사거나, 아니면 청소 담당의 학생일 것이다. 해강은 망설임 없이 과학실의 뒷문을 열려고 했다.
“어라, 너는… 그 보자, 누구더라?”
뒷문을 열려던 해강의 손이 멈추고 아래로 내려갔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해강의 맞은편, 복도 끝에서 장신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어스름한 해 질 녘의 복도는, 어둑어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곧 드러난 얼굴에 해강은 그가 새로 부임한 영어 교사라는 것을 알아채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저 해강이요. 주해강.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일이세요?”
“맞네, 주해강. 많이 봤었지.”
“네?”
“아,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
남자는 손사래를 치고는 웃는 얼굴로 성큼 다가와 과학실 문 앞에 섰다. 해강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비켜줄래?”
“선생님도 과학실에 볼 일 있으세요?”
“그럼, 선생님은 선생님만의 볼 일이 있지.”
“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도는 해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자식은 뭐 먹고 이렇게 키가 커.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이도는 항상 영서를 내려다보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자동으로 시선이 아래를 향하려다가 해강의 얼굴이 자신과 비슷한 높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선하게 잘생긴 얼굴이 항상 그러던 것처럼 빙긋 웃고 있었으나,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만만치 않은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이런 인상이군. 어디서 분명 본 게 확실한데 말이지. 게다가 이렇게 잘생긴 놈은 더 희귀한데. 이도가 진지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강은 갑자기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영어 교사의 눈빛에 살짝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뭐야, 이 인간. 나를 아는 건가. 그렇다면 역시… 형이 보낸 그쪽 사람인 걸까. 왜 나를 아는 것처럼 쳐다보는 거지? 해강의 웃는 얼굴이 조금씩 떨리자, 이도는 시선을 거두며 먼저 과학실의 뒷문을 잡고 열었다.
“과학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어라.”
“…영서야!!”
뒷문을 벌컥 열어젖힌 이도와, 그의 팔 너머로 고개를 들이민 해강의 눈에 동시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영서와 주민이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쓰러진 영서 위에 주민이 그를 깔고 올라탄 모습이라고 해야겠다.
낑낑대는 영서의 양 팔을 붙들고 있던 주민은, 불청객들의 방문에 고개를 돌려 누군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런, 정말 수고를 덜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