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재희는 도톰하고 흰 수면의 샤워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오랜 비행의 여독이 풀어지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일정들을 소화하느라 말 그대로 동분서주해야 했던 2주였다. 한국에 수년 만에 귀국한 지 약 2주가 지나도록 해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지난주에 얼굴을 한 번 보고 온 것이 다였다. 습관처럼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가, 쌓여있는 수십 통의 메시지와 메일, 부재중 기록들을 본 재희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쉬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 인간들은 낮도 밤도 없는 모양이지. 하기야 인간들이란 원래 낮밤을 지켜 밝을 때는 일을 하고, 어두워지면 잠을 자도록 설계되었지만,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모범생처럼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같은 인간으로서의 재희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사업가로서의 재희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밀린 연락들을 하나하나 읽고, 부재중 기록은 지웠다. 메일과 메시지는 긴 순서대로 읽었다. 그중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들의 것도 지우고, 자신이 재희와의 거래에서 뭘 제공할 수 있는지부터 밝히지 않은 이들의 것도 지웠다.
삭제.
삭제.
삭제.
그렇게 한참 정리를 하고 나니 남은 메시지는 단 네 통이었다. 각각의 이름과 연락이 발신된 전화번호를 모아 비서에게 보내니 1분 만에 답장이 왔다. 한 명은 자신의 개인 연락처가 아닌 그의 비서 연락처라고 했다. 그 인간의 것도 지웠다.
남은 세 명.
재희는 남은 세 명을 데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판을 짜야 보다 더 이익을 챙기고, 덜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지 따져보기로 했다. 물론 세 사람은 이제부터 각자 자신과 연락한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업계 비밀이 되겠지. 국내에서 유명한 제약 회사의 이사장, 프로 골프선수로 유명한, 이제는 은퇴를 앞둔 스포츠 스타, 그리고 마지막은 재희도 알만한 방송국의 대표 국장이었다. 재희는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냉장고로 가 빈 잔을 하나 꺼내고 얼음을 담았다. 차게 식혀둔 샴페인 한 병도 꺼냈다.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와 편하게 몸을 늘어뜨린 그는, 입안에 하나 넣어온 얼음을 혀로 이리저리 굴리며 전송된 파일을 열어보았다. 세 명의 가장 최근 사진이었다. 거의 증명사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선명하게 찍힌 사진이어야 했다. 이 정도면 뭐, 괜찮네. 얼음을 까득 까득 깨물어먹은 재희는 다리를 꼬고 푹신한 쿠션에 몸을 완전히 누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내 여러 가지의 상황과 인간들의 모습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어두운 재희의 눈꺼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일은 해강이를 마중 나가야겠는걸.
***
해강은 두 눈을 의심했다. 이도도 예상 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힌 듯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네 사람의 침묵 끝에,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영서였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요!”
자신보다도 덩치가 작은 주민에게 깔린 채 영서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치자, 먼저 정신이 든 이도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힘을 준 것이 무색하게 주민은 이도의 손이 제 어깨에 닿자마자 두 팔을 놓고 사뿐히 일어섰다. 이도는 잠시 주민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매우 익숙한 기분은… 그러나 주민의 몸에 손이 닿았던 것은 아주 찰나여서,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음. 정전기로군.
이도가 전혀 다른 곳을 헛짚고 있을 때, 뒤따라 들이닥친 해강이 영서의 팔과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오히려 밀쳐져 쓰러진 영서보다도, 해강이 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금 필사적으로 웃으며 해강이 주민과 영서를 번갈아 보았다.
“아, 주해강. 너는 딱히 필요 없는데 말이지.”
“뭐? 무슨 소리야?”
“아닌가? 역시 있는 편이 좋을 지도.”
“대체 무슨…”
영서가 콜록대며 쏘아붙이자, 주민은 아리송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 힘만으로 네 명까지 잡아놓는 건 힘든데. 그 남자가 말한 거랑 조금 다르게 결과가 나와도… 뭐 상관은 없으려나?”
"뭐라는 거야, 진짜…!"
“주민아, 너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영서 때린 거야?”
짜증이 난 영서를 진정시키며 둘 사이를 가로막은 해강이 다급하게 물었다. 둘이 싸웠을 리는 없을 테고. 그때, 해강의 머릿속으로 낮에 영서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주민이가 나를 못 알아봐.’
영서는 해강의 등에 가로막힌 채, 그 너머로 주민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개소리하지 마, 이 가짜 새끼야!”
뭐?
해강이 영서를 돌아보았다. 영서는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거의 이를 갈 듯이 외치고 있었다.
“감히 그게 누구 몸인 줄 알고 뺏어?! 너는 내가 꼭 지옥 끝까지 처박아버릴 거야!!”
“여, 영서야, 뺏다니, 그게 무슨…”
“아하, 그런 거였네.”
멀뚱히 서 있던 이도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이라고 생각했더니, 역시 인간이 되면 기억력도 나빠지는 것 같다니까.
“저 애, 지금 다른 혼이 붙어 있는데?”
“네? 선생님은 또 무슨… 저 애라면, 주민이요?”
“주해강, 저리 비켜! 너는 저게 주민이로 보여?!”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해강은 눈앞에 선 주민을 다시 쳐다보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우주민이었다. 그동안 자주 만나왔고, 처음 병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의 누나가 죽었던 순간에도, 여 사장님과 함께 했던 여름방학 때도 분명 이 애랑 영서가…
눈앞의 사람은, 정말 주민이 맞을까?
해강은 발밑이 훅 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짝 어질한 기분에 무릎이 후들거렸다.
…이 느낌, 예전에도 분명…
“네 명이라고 한다면… 역시 우리 셋하고, 네가 삼킨 그 우주민이라는 애까지 포함인 거겠군.”
이도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귀를 후비며 물었다. 영서는 답답했다. 아저씨는 왜 저렇게 태평한 것이며, 주해강은 입에 꿀 바른 것도 아니고 조용하게 있는 건지. 아까는 단지 방심해서 기습을 당했을 뿐이다. 다시 공격하면 저따위 잡귀쯤은…
“그쪽은 역시, 일직차사 강이도인가 보네요.”
“어라, 나를 알아?”
“모를 리가. 죽은 지 갓 일주일 지난 새끼 귀신들도 당신 이름을 전부 알고 있는데.”
주민, 아니 주민의 탈을 쓴 누군가가 후후 웃으며 재밌다는 듯 팔짱을 꼈다. 여유로운 그 태도에 영서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지만, 이도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천지 구분 못하고 덤비는 생 초짜는 아니라 이건가?”
“이래 보여도 혹시나 지옥에 갈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요. 그것도 아귀도라든가, 축생도는 말이죠. 그래도 혹시 만약 가게 된다면 어떻게 좀, 잘 부탁드립니다?”
히죽 웃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는, 분명 주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저 애는 주민이가 아니다. 해강은 단숨에 명확해지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이봐, 너. 주민이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야? 영서가 말한 것처럼 네가 주민이 몸을 뺏고 그 애 행세를 하는 거면 주민이는 어떻게 한 거야?”
“보기보다 말이 꽤 많구나, 너. 그 남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더니.”
“…뭐?”
해강의 당황한 얼굴을 본 주민이 키득거리며 웃다가, 영서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권영서, 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너 이 새끼가…!!”
“안심해, 죽은 거 아니니까. 죽은 건 오히려 내 쪽이지. 아, 그래서 말인데 이 몸, 오랜만에 가진 살아있는 몸이라서 좋기는 한데, 좀 더 건강하고 센 쪽을 찾을 걸 그랬나 봐. 뭐, 그래도 살랑살랑 웃어주니까 다들 친절해서 편하기는 하더라.”
명백한 모욕이었다. 영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해강을 밀치며 주민에게 달려들었다.
단숨에 멱살을 틀어쥔 영서를 해강과 이도가 말릴 새도 없이, 영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비릿하게 웃고 있는 주민의 얼굴에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너, 너무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
“네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아무리 그 거울을 가진, 그 여자의 핏줄이라고 해도… 그래 봤자 죽은 이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이지.”
주민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멱살을 잡은 영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영서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자식은 뭐지? 어디까지, 아니 어디서부터 알고 있는 거지?
그런 영서의 생각을 비웃듯 주민은 곱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 몸은 살아있는 몸이잖아. 네가 뭘 어쩔 건데?”
퍽-
방심한 배 위로 주먹이 꽂혔다. 급소를 맞은 영서가 괴로운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굽히자, 주민은 자연스럽게 쓰러진 영서의 몸을 부축했다.
“영서야!!”
“잠깐 기절시킨 거야. 걱정하지 마.”
영서의 몸이 축 늘어지자, 해강의 표정이 변했다. 주민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정신을 잃은 영서를 부축해 영차, 하고 업었다.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큰 영서를 그렇게 가뿐하게 업다니, 이제는 누가 봐도 주민이 아님이 확실해진 것이다. 해강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영서를 빼내려 했지만 주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 과학실에 결계를 칠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말이야. 아마 곧 인간들이 오겠지. 권영서를 얻었으니 너희에게는 그다지 볼 일이 없어. 그러니까 난 먼저 갈게?”
“무슨 개소리야! 영서 이리 내놔!”
“무서워라. 우리 귀염둥이께서 그런 욕도 할 줄 안다고 내가 분명히 전해줄게.”
생긋 웃은 주민은 영서를 업은 채로도 가뿐히 걸어 금세 과학실 문을 열었고, 해강이 달려들기도 전에 문은 그의 코앞에서 닫히고 말았다. 다시 열려는 순간 철컥, 하며 잠금장치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희는 지금 필요가 없거든? 힘으로 부술 거면 부수고 나오든가, 아, 물론 부술 수 있으면 말이야. 그럼 안녕,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명랑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더니, 이내 콧노래와 함께 발소리가 꿈결처럼 멀어져 갔다. 해강이 문을 열려고 몇 번이나 힘을 주었지만, 보통 자물쇠가 잠긴 것이 아닌 듯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작게 덜컹거리는 것도 없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잠긴 문에 해강은 약간의 패닉에 빠졌다.
“영서야, 영서야! 영서야!!”
“야, 시끄러워 임마. 죽은 거 아니라잖아. 애초에 쟤는 못 죽지만. 아직은.”
“…선생님, 왜 그렇게 태연하세요?! 영서가 지금 납치된 거잖아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와서 문이나 같이 열어주세요!”
해강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자, 이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못 나가.”
“예?”
“못 나간다고. 지금은.”
거의 단정적으로 확언을 내리는 그를 보며, 해강은 맥이 빠지고 말았다.
힘이 빠져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은 해강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남자.
저 녀석이 말한 그 남자라면.
해강은 숨이 탁, 막히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임재희.
형 짓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