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중퇴마비록-101화 (101/166)

101화

약 2주 전.

아직 남중고등학교가 개학하기 전의 이야기.

유혜리는 그날도 여전히 교내를 배회하고 있었다. 으레 지박령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언제나와 같이 학교의 운동장부터, 정문, 복도, 여러 교실들과 교무실, 급식실과 체육관까지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 지박령들과 혜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붙박여 떠도는 것은 이제 혜리에게 더 이상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영혼들에게는 그렇게 헤매는 것이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가 없지만 혜리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혜리는 남중고등학교가 여름 방학을 맞아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여름 내내 일직차사가 시킨 심부름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대개는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만약 귀찮은 마음이 들더라도 그와 약속한 것을 떠올리면 다시 힘이 나곤 했다.

언젠가 어느 날, 일직차사는 영서 없이 혜리를 불러내 말했다.

‘너, 견습 차사 해보지 않을래?’

‘예? 제, 제가요?’

아마 교내에 돌아다니던 그 기분 나쁜 전 교장의 망령을 퇴치하고 난 후였을 것이다. 이도는 무심한 얼굴로 엄청난 제안을 던지고는 놀란 혜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견습 차사라면…’

‘말 그대로 정식은 아니지. 원래는 아흔아홉 가지의 시험과 관문을 통과해야만 차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거든. 아무 영혼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 아니 애초에, 저승사자라는 거, 죽은 사람들 중에 뽑아서 하는 거였어요?! 시험까지 보면서?’

‘그럼 저승사자는 날 때부터 저승사자인 줄 알았냐?’

‘그건 또 그렇네요…’

‘비유하자면 저승의 공무원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필요한 자격이 갖추어진 영혼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받고, 앞서 말한 시험들을 통과하면 견습 차사가 되는 거야. 견습 차사에게는 상사이자 선배인 차사 한 명씩을 붙여주는데, 그건 보통 막내들한테 시키는 거거든? 이 일직차사님께서 직접 지도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영광으로 알아.’

혜리는 자신의 볼을 꼬집고만 싶었다. 실제로 고통이 느껴진다면 말이다. 그 정도로 얼떨떨하고 기뻤다.

‘와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도 예선은 통과한 거네요? 그 자격이라는 게 뭔지 물어봐도 돼요?’

‘……’

일직차사는 잠시 혜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나중에 알려주마. 아무튼, 일단 유혜리, 너는 자격이 갖추어졌다. 아흔아홉 개의 시험은 사실 상징적인 것으로, 요즘에는 영혼의 성질에 따라 가짓수를 줄이거나 늘여서 보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보통은 줄이는 거지만… 그래도 나 때는 엄청 힘들었는데.’

‘그, 그 시험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되는 건데요? 저 시험이라면 자신 있는데!’

눈을 빛내며 묻는 혜리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견습 차사가 되기 위한 시험은 방금도 말했듯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그 시험의 유형과 가짓수, 난이도를 정하는 것. 그게 누구 소관인지 아나?’

‘예?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네 눈앞에 두고도 모르냐?’

‘헉!’

혜리가 입을 가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삐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혜리, 넌 이미 시험을 통과했어.’

‘어…어떻게요?’

내가 이미 시험에 통과했다니, 무슨 소리지? 혜리는 행여 남자가 농담을 치는 게 아닌가, 자길 상대로 떠보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대답했다.

‘이승에 미련을 완전히 없애는 것.’

…그렇게 말씀하셨었지.

혜리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해가 뜨고부터는 그늘을 찾아 교내만 돌아다녔더니 맑은 공기와 햇빛이 고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죽은 지 수년은 지났는데, 이제 내 관 뚜껑을 열어도 시체는커녕 흙과 벌레밖에 없을 텐데. 아, 아닌가, 나 화장했던가. 그렇다면 납골당 뚜껑을 열어도 뼛가루밖에 없을 텐데. 혜리는 때때로 살아있을 때의 습관처럼 맑은 공기를 폐 속 가득 불어넣고 찬란한 햇빛을 맞으며 서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그럴 수 있는 폐도, 얼굴도, 몸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 기분이란 게 뭐지? 사실 생각이라는 것도 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던가? 인류 역사상 수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심장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에 관한 끝없는 논의를 해왔다. 혜리는 살아있을 때 심장이라고 대답하는 쪽이었다. 왜냐면 뇌가 죽은 사람들은 현대의학의 도움만 있다면 얼마든지 심장이 뛰어 기계로 주입된 산소를 온 몸에 퍼뜨리고, 체온도 조절이 되고, 무엇보다도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는 죽음과 시체의 상징. 심장이 멎으면 더 이상 그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썩은 고깃덩어리가 되어갈 일만 남았지만, 뇌는 죽어도 심장은 남는다. 그러므로 심장. 혜리는 언젠가 그렇게 대답한 적이 있었고, 그걸 물었던 친구의 얼굴은 이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제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심장이든 뇌든, 동시에 부서져 버리면 그런 고리타분한 논의는 그대로 끝이다.

혜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유혜리는 오늘도, 견습 차사가 되기 위해 예비 상사인 일직차사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해강은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카드를 찍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약속한 시간보다 5분 정도 빠르지만, 언제나 그는 늦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전혀 빠르게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는 이미 자신을 맞을 준비를 다 마친 채 평소와 같은 우아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가 3년 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화상 통화나 메일로는 꾸준히 연락을 했으므로 3년 만에 재회하는 셈은 아니다. 그럼에도 해강은 그와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숨이 막혔다. 하지만 어쩌겠어. 도망칠 수도 없는데. 도망친들 그게 정말로 도망이나 되나. 해강은 혀를 차며 낯선 빌딩으로 들어갔다. 로비에만 들어섰는데도 이미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윤 실장이 아니면 김 상무일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그들보다도 덩치가 훨씬 작았고, 오히려 해강보다 왜소한 느낌의 보통 체격의 남자였다. 선글라스도 끼지 않고, 시커먼 정장도 아닌 약한 스트라이프 무늬의 진 회색빛 정장이다. 그리하여 해강이 예의 순진하고도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주해강 도련님 되십니까, 하고 물었다. 해강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이 미미하게 찌그러졌다. 대답조차 생략하고 해강이 먼저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남자도 말없이 따라붙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먼저 눌러주었다.

행여나 형의 성격상 주변인들을 결국 다 갈아치우고 새로 고용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 점이 해강으로 하여금 더욱 진절머리 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나 익숙한 차림새가 아니더라도 결국 형의 사람이었다. 해강은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남자가 안내하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13층에 위치한 스위트룸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다.”

“아, 드디어 왔구나.”

호텔 방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남자가 소지하고 있던 카드 키로 문을 열자 오히려 방 안으로 복도의 불빛이 쏟아질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해강이 들어서자 유일하게 작은 조명이 켜져 있던 안쪽 방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의 메인 공간은 이상하게 어질러져 있는 상태였는데, 마시던 샴페인 잔 두 개와 바닥에 나뒹구는 병, 다 녹아 물만 찰랑거리는 아이스버킷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갈겨진 수상한 종이들이 테이블 위와 소파 위에 널려있었다. 한 발짝 더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야경으로 빛나는 전면 유리창과 테이블 사이, 방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각도의 바닥에, 한 남자가 몸을 떨며 쓰러져 있었다. 얼굴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손을 뻗으려던 순간, 차가운 손이 해강의 뺨에 스쳤다.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도 안 해?”

해강의 어깨를 잡은 그 손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도록 담담하고 다정한 말을 건넸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해강은 허리를 바로 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손의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재희가 그곳에 서있었다.

반쯤 찢어진 정장 소매와 이상하게 어두운 액체들이 낭자하게 튄 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해강의 오금을 얼어붙게 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드러난 재희의 두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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