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혜리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난간 사이로 양 발을 내놓고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었다.
노래라도 들으면서 리듬을 맞추는 것 같은 몸짓이었지만, 혜리는 그저 높은 바람이 부는 난간 사이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나무가 흔들리니까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 공기가 움직인다는 것은 혜리가 느낄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가사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고 있던 도중,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라, 못 보던 기운인데.
혜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까딱거리던 발을 멈췄다. 고개를 빼고 난간 사이로 운동장과 학교 주변을 살폈지만, 방금 전 스치듯 지나갔던 기운의 정체는 보이지 않았다. 학교 내에서 느껴진 건가… 하지만 교내에서 내가 모르는 귀신이나 기운은 아직 느껴본 적 없는데. 혹시 모르니 일직차사에게 보고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어라, 권영서?!”
학교는 이미 파해 남아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해가 지고 있는 운동장은 노을이 곳곳에 물들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는데, 혜리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업혀 학교를 빠져나가는 영서의 뒷모습이었다. 그를 업은 것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 느꼈던 새로운 기운의 주인인 것 같았다. 혜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뭐지? 영서가 또 쓰러졌나? 하지만 쓰러졌다면 학교 양호실도 있고,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데려갈 텐데, 분명 영서를 업은 이가 입은 것은 남중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 같은 반 친구? 주해강은 아닌데. 가서 확인해 봐야 하나? 여러 가지 목소리가 혜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서를 업은 저 의문의 학생에게서 수상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리가 느낄 수 있는 수상한 기운, 그 말은 즉,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야. 혜리는 여유롭게 바람을 맞으며 노을을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1층에 있는 교무실로 가기 위해 모습을 감췄다.
“젠장… 뭐로 문을 잠갔길래 이렇게 안 열려…”
해강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한번 어깨에 힘을 주고 문에 몸을 부딪쳤다. 두 번, 세 번 몸을 던졌지만 과학실 내에 둔탁한 파열음만 울릴 뿐, 문은 열릴 생각이 없었다. 걸쇠 같은 것이 걸려있는 거라면 차라리 충격을 줘서 부수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했으나,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물쇠가 걸린 게 아니라, 문 바깥에서 양 문 전체에 널빤지라도 못으로 박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이 흔들리지도 않을 수가 있나? 이 정도로 충격을 줬는데… 해강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찡그린 채 문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지금은 안 열린다니까, 멍청아.”
“…선생님도 앉아계시지만 말고 좀 도우세요!”
“소용없다고 몇 번 말해? 그렇게 무식하게 힘으로 박아대면 네 몸만 아프지.”
“선생님, 저희 지금 여기 갇힌 거잖아요! 왜 그렇게 태연해요?! 웬 이상한 놈이 저희 친구 몸을 빼앗질 않나, 게다가 영서는 그 이상한 놈한테 납치까지 당하고 우리를 가둬놨는데! 선생님은 걱정도 안 돼요?”
“권영서가 쉽게 죽거나 다칠 애는 아니거든, 적어도 내 생각에는. 아니면 뭐, 그놈이 영서를 잡아갔다고 해서 위험해질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나? 되게 걱정하네, 너.”
“그야 당연히 그렇게 끌려가면…!”
“끌려가? 누구한테?”
해강은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이도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태연자약하게도 그 난리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고, 영서를 업은 주민이 문을 잠그고 떠나갈 때까지도 이도는 오히려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안경을 벗어 셔츠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으며 이도가 선선하게 말했다.
“예전부터 네가 무척 신경이 쓰였는데 말이야, 주해강.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너를 아는 기분이 들었거든. 어디더라, 분명 어디서 너를 본 적이 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는 선생님을 오늘 처음 봤는데요.”
이도는 안경을 다 닦은 모양인지 흐릿한 과학실 전등에 안경알을 비춰보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흠집 하나 없어 보이는, 심지어 티끌조차 묻지 않은 듯한 안경을 잠시 돌려보던 이도는 푹 웃음을 터뜨리더니 낮게 속삭였다.
“말했잖아. 너는 나를 몰라도, 나는 너를 안다고.”
이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왼손에 안경을 든 채로 해강을 쳐다보았다. 해강의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본능적으로 경계심과 적개심이 드러났다. 이상해. 뭔가… 이 인간… 나를 안다니, 어디까지 안다는 거지.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설마 형 쪽의…
“이제 기억이 났어.”
이도가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해강의 귓가에,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철컥,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소리의 이유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 철컥, 하고 뭔가가 풀어지는 듯한 소리는 분명 문 쪽에서 난 것이었다. 다시 이도를 돌아보자, 그는 이미 해강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대체 언제?!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피하자 이도가 해강의 어깨를 잡아채고 낮게 속삭였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 영서한테 네가 어떤 애인지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네가 지금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거 아닌가?”
“…당신…”
당신 대체 뭐야,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입안으로 삼킨 까닭은, 이도의 눈과 눈을 맞추는 순간 저항할 수 없는 기이한 감상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뭐야, 이 기분 나쁜 감각은… 마치 내 속을 다 구석구석 훑어보는 듯한, 사람의 눈이 아닌 것 같은…
“…네 형이 거울을 노리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깜찍하기도 하지, 임재희.”
“…당신이… 어떻게 그걸…”
“글쎄다, 내가 너를 아는 이유, 그리고 네 형을 더 잘 아는 이유는… 네 형한테 물어보면 아마 잘 설명해 주겠지. 아니면, 아직도 그 작은방에 너를 가두고 제 입맛대로 휘두르고 있나? 아니지, 권영서에게 너를 붙여놓은 이유가 있을 텐데. 뭐, 그건 조만간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그때였다. 가벼운 발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듯하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강 선생님? 강이도 선생님, 과학실에 계세요? 영서는요?”
영서에게 청소를 맡겼던 젊은 과학 교사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이 해강과 이도 사이로 끼어들자마자 해강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도가 싱긋 웃었다.
“임재희에게 가서 똑바로 전해. 규율은 지키라고 있는 거고, 너는 이미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고. 뭐든지 볼 수 있다고 해서 뭐든지 아는 건 아니라고 말이야.”
“…영서는… 영서랑 당신은 무슨 사이지?”
“그건 네가 알 거 없어.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지만… 그래, 네 형에게 가서 일직차사가 그리 전했다고 말하렴.”
이도는 부드럽게 웃으며 해강의 이마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차가운 손이 닿자마자 해강은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몸에 힘이 주르륵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도의 손이 해강을 옆으로 비켜서게 하고 왼손에 들고 있던 안경을 다시 썼다. 그가 과학실의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초조한 얼굴의 과학교사가 서 있었다.
“아, 선생님. 걱정시켜서 죄송합니다. 영서는 이미 집에 갔더라고요. 여기 해강이가 열쇠를 대신 맡아주고 있었다 길래, 저도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머, 해강아! 너 아직도 집에 안 갔니? 이제 해도 지는데. 아니에요, 제가 그냥 와서 정리했어야 하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해강이도 이제 집에 가야지?”
“……네.”
해강은 무어라고 더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이도가 빙긋 웃으며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묘하게 굳어진 얼굴로 해강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말없이 복도로 멀어져 갔다. 과학교사는 의아한 얼굴로 뺨을 만지며 빠르게 사라지는 해강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머, 쟤가 별일이네. 항상 방실방실 웃던 애가 정색을 하고…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선생님? 영서랑 해강이가 싸우기라도 했나?”
“별일 아닐 겁니다. 영서도 집에 잘 돌아갔고요. 저희도 교무실로 돌아가서 마저 정리하고 퇴근해야죠.”
“네에… 뭐…”
미심쩍은 얼굴의 과학교사가 과학실을 둘러보고 문단속을 하는 동안, 이도는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강림 도령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이도는 알 듯 모를 듯 한 얼굴로 웃으며 메시지를 열었다.